# 212
적수
중앙 전선에서만 활약하던 카바락.
벌 때문인지 그는 가장 치열한 전장에만 던져졌고 아무리 최상급에 달하는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곳이 중앙 전선이다.
백 단위의 마스터와 수백의 마법이 떨어지는 전장이자 가끔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나 전장을 휘젓기도 하는, 나조차도 아직 접근할 엄두를 내지 않는 곳이다.
나 혼자 혹은 직속 파티원들과 함께 행동해도 언제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다. 상층도 아닌 중층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활약하던 카바락이 남쪽에 나타났다. 그것도 하필이면 시디안 지역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인가.’
브리앙과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브리앙도 내심 이해하는 눈치였고.
그가 우연히 남부에 나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가 우연히 시디안 지역에 나타났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외팔의 카바락, 성자의 대적자.
그가 중앙 전선에서 활약하며 얻은 이름이다. 나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에 일조한 놈이기도 하다. 언제나 나와 싸우고 싶다며 나를 칭찬해 왔고 그 덕분에 가장 치열한 중앙 전선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은 중앙 전선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그런 그가 자유의 몸이 되기 무섭게 남부에 나타났다. 그것도 가이아 길드가 활약하는 장소에.
우연일 수가 없었다.
막 이동한 장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다.
일주일 전쯤이 마지막 연락이었고 도착에 필요한 시간도 있기는 할 테니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카바락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도대체 뭔 수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일행이 카바락과 싸우면 누구 하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 성장하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자신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 무작정 버티기만 한다면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그게 며칠이나 이어질 수는 없었다.
카바락이 일행을 파악하는 것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일행에게 익숙해지고 난 이후라면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그래도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마스터가 되었다고 했으니 버티는 것이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삐끗하면 죽는다.
이제껏 어떻게 키웠는데 중층에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젠장, 왜 하필 게이트도 없는 변방이라서!”
아쉽게도 시디안 지역에는 텔레포트 게이트는커녕 연락할 수단조차 없는 곳이다.
결국 몸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짧게는 이틀, 길면 3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나 최고 속도로 달린다면 하루도 안 걸린다.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조금 지치기는 하겠지만….
‘회복하면 돼.’
마력을 최대한 다리에 집어넣고 미친 듯이 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변한다.
처음 가보는 길이지만 주변에만 도착하면 된다. 최상급 마스터의 감지 범위는 상당한 만큼 방향만 알면 충분했다.
일단 지도도 받기는 했고.
초조한 마음을 억눌렀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최소한 머리는 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한나절 동안 달리기만 했을 때, 저 멀리서 강대한 기운이 감각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최소 마스터. 이 거리에서 저런 기운이라면 평범한 마스터는 아니다.
‘카바락.’
나는 즉시 내 존재감을 표출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전신의 마력을 최대한 끌어내 워 크라이를 사용한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내 감각 끝에 걸린 카바락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진다.
“크아아아아아아앙!”
곧이어 보답하듯 강렬한 워 크라이가 전장을 울린다.
수 km는 울릴 듯한 외침.
이 목소리는 분명, 카바락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수인들이 보였다.
‘랑(狼)족.’
귀찮은 쓰레기들.
나는 순식간에 강기를 만들어 사방으로 쏘아내며 폭발시켜버렸다.
한층 익숙해진 기술이다.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수백의 수인들을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방이 피바다가 되었고 내가 지나가기 무섭게 피들은 내게 흡수되었다.
잃었던 체력과 마력이 조금 회복된다.
회로 자체의 크기가 달라졌지만 나름 수백에 달하는 수인의 피다. 나름 도움이 되었다.
수인들은 내 어마어마한 존재감과 강기의 위력을 보고는 즉시 자리를 피해버렸다.
내가 내지를 워 크라이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터다.
그들을 뚫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주하연은 지친 얼굴이었고, 한바다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서윤은 머리가 산발인 상태였으며 하유진은 은신조차 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조연은은 화살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나머지 마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개중에는 나름 심각해 보이는 부상자도 있었으며 그에게는 사제가 둘이나 달라붙어 있었다.
그에 비해 카바락은 멀쩡한 상태였다.
예상했던 바다. 나만 해도 온갖 전력을 다한다면 내 일행들을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그럼에도 나와 꾸준히 대련을 했던 것은 만약을 대비했던 것이었다. 하나씩 익숙해지고 허무하게 죽지 말라는 의미에서. 내게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얻어 가라고.
다행히 그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동안 싸웠을 텐데, 직속 파티원들 중 누군가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신후, 오빠?”
지친 얼굴의 남은주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 고생했….”
풀썩.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은주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애써 일어나려는 듯한 모습에 한바다가 남은주를 부축한다.
“하하. 오랜만에 보는 데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건가, 유신후?”
카바락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이다, 유신후. 그대… 엄청나게 강해졌군. 그대도 끝에 다다랐는가? 아쉽군. 너 또한 아직 대전사가 되지는 못하였구나.”
“그랬다면 너는 진작 죽었겠지.”
“아하하. 그런가. 그대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구차하게 살아남았으니 말이야.”
말은 구차하다 하면서도 그는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대 휘하의 인원을 죽이지는 않았어. 두어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었는데… 너는 참 적절한 순간에 등장하는군.”
두어 명은 죽일 수 있었다는 말에 일행들 사이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슬쩍 눈을 돌려 확인하자 피를 토하는 한바다와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해 고개를 떨구는 남은주의 모습이 보였다.
‘전열 둘….’
둘이 죽는다면 사실상 진형은 붕괴된다. 후열도 모두 죽는다고 봐야 한다. 살아남을 수 있는 인원은 몇 되지 않았을 거다.
“…거짓말.”
나서윤이 거칠게 말한다.
“X발… 진작 죽일 수 있었으면서… 생채기 하나 내지 않고 우리를 죽이려 가지고 놀았….”
“서윤아.”
나연이 그런 나서윤을 뒤에서 껴안았다.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그대들을 죽이기 위해 내가 부상을 입으면 안 되지. 멀쩡한 상태에서도 유신후에게 졌는데, 상처를 입은 채로 그를 맞이하라니, 나더러 자살하라는 셈인가?”
거기에 더해 최상의 상태로 싸우고 싶다는 욕심 또한 있는 모양이었다.
“흠, 급하게 찾아온 모양이야. 유신후, 전투는 내일로 미루지. 마침 나도 막 전투를 치른 몸이….”
나는 그런 카바락의 말을 무시한 채 강기 세 발은 순식간에 쏘아버렸다.
목표는 카바락을 향해 날렸지만, 목표는 카바락이 아니었다.
유쾌한 웃음을 흘린 카바락이 강기를 쳐냈다.
다만 저 강기는 이전에도 썼던 기술이다.
단숨에 강기가 쪼개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을 덮쳤다. 이미 알고 있던 기술인지 카바락은 침착하게 반응하려 했다.
다만 앞서 말했듯 목표는 카바락이 아니었다.
“이런, 피해라!”
강기의 파편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버린다.
카바락의 곁에는 네임드 오크가 넷이나 있었고 내가 목표로 했던 이들은 저것들이었다.
순식간에 강기의 파편이 그들을 덮친다.
다만 일부를 카바락이 처리했고, 그들 스스로도 네임드 오크인 만큼 빠르게 반응해 죽은 놈은 없었다.
그러나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네임드 오크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으르렁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쪽 사람을 건드렸으면, 너희도 피는 봐야지.”
“…여전하군.”
카바락은 입꼬리만을 올린 채 자신의 반대쪽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과거 내가 잘라버린 팔의 흔적.
“물러난다.”
카바락은 흥분한 네임드들을 통제했다.
“왕자님!”
“그만. 저놈은 그냥 달려온 것이 전부지만 우리는 전투를 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싸우면 우리가 손해야.”
“나를 위한 배려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지가 불리한 상황을 피한 것뿐이었나? 예전에는 안 그런 것 같았는데, 많이 약아졌군.”
“그대에게 배웠지.”
카바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몇몇 인간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오크와 다르게 흥분한 인간은 하나같이 형편없더군. 야성도 없고, 제힘을 제대로 발휘도 못 하던데, 덕분에 공을 더 많이 세워서 조금 더 일찍 풀려날 수 있었지.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확실히 은근히 시비를 거는 꼴은 평범한 오크 같지는 않았다.
“그 웃기는 금술 때문이 아니라?”
“…들켰나?”
카바락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술을 받은 이가 나온 모양이로군. 어땠는가? 그들은? 아쉽게도 나는 징계 와중이라 만나본 적이 없어.”
“형편없더군. 쓰레기야.”
사실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상급 마스터가 엄청 부족하나마 최상급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물론 진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효율도 쓰레기고 무형 강기의 최대 강점인 기운을 숨기는 기능도 많이 부족했으니까.
열화판의 열화판 수준이랄까. 내 것도 불완전해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제국에 알리기는 했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나오지는 않을 거다.
“그랬나? 아쉽군. 제대로 목숨을 걸지는 못한 모양이아.”
감상을 듣기 무섭게 카바락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나 또한 잡지는 못했다.
일행들의 안정이 우선이다.
그렇게 카바락과의 재회는 내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
주하연으로 부터 갑작스러운 카바락의 기습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예 홀로 나타나더니 이후 휘하의 네임드들이 하나씩 합류했다고. 첫날의 전투에서부터 압도당했다는 말을 전했다.
“신후 씨와의 대련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건 대련이 아니군요. 가르침, 그래요. 신후 씨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작 죽었을 거에요.”
“…….”
나서윤이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카바락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던가?’
주제를 모르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나서윤의 재능은 분명 뛰어나나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카바락의 재능은 나서윤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나서윤은 그것이 분한 듯했다.
“게다가 오늘 합류한 네임드 둘까지 합하니…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저 멀리서 워 크라이가 들렸을 때, 처음에는 적인 줄 알고 절망했었는데… 서윤이가 알아채더라고요. 신후 씨가 왔다고.”
“…오빠의 마력이었으니까. 목소리도 비슷했고.”
그 상황에 내 마력과 목소리를 판별할 정신이 있었다는 것이 더 대단했다.
일행들은 사제와 포션의 힘을 빌어 다행히 멀쩡한 회복을 할 수는 있었다. 한바다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후유증은 없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은 멀쩡하지 못했다.
“…은주는 어떻습니까?”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으니까요.”
몸은 멀쩡했다. 다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
마스터가 된 이후, 아니 사실상 나에게 본격적인 지원을 받은 이후 남은주가 죽을 뻔한 것은 없다시피 했다. 위기 자체가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본인은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와중이었지만, 몸이 쉽게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며칠에 걸쳐 오크의 형상을 한 괴물을 제일 앞에서 끝없이 상대하다 보니 머릿속 깊숙이 공포가 새겨진 모양이다.
내가 남은주를 찾아갔을 때 남은주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면목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왜 고개를 숙이고 그래? 얼굴 좀 보자.”
“죄송해요, 신후 오빠.”
“뭐가 미안한데.”
“…내가, 겁쟁이라….”
“네가 포기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일어나려고 하고 있잖아. 뭘 그런 걸로….”
정신적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처럼 의지만 있다면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아이템들을 이용해 치료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조금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의지를 갖기가 무척 힘들 뿐이지. 다만 남은주의 경우에는 더 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남은주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장비를 착용하고 일어서면… 눈앞에 괴물 오크가 서 있는 것 같아. 몸이, 그냥, 굳어서….”
작게 울먹이는 남은주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는 한동안 그런 남은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서운 것은 이해해.”
당연하다. 카바락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놈이다. 그런 놈을 정면에서 며칠간 물러나면 아군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버텨낸 거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남은주가.
수도 없이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참았을 거라 생각한다. 본인 말대로, 남은주는 은혜도 모르는 나쁜 년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다만 나는 오히려 이게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층에서 한 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남은주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상층에는 거인이 있었고, 크기부터가 다른 그런 괴물과 마주하게 된다면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심이 들 수 있었다. 남은주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다. 다만 거기서는 극복하기가 더 쉽다.
그냥 정면에서 부숴보면 적응해 가며 차차 나아질 테니까.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시스템의 보조에 아이템, 스킬이 즐비하고 경지를 올려가며 정신적으로도 단단해지고, 수많은 경험을 하며 상층까지 도달한, 단련된 수련자들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럴 것이었으면 진작 무너졌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비록 이곳이 상층은 아니지만 일찍 만났을 뿐이다. 남은주는 큰일이 없는 한 상층에 도착할 수 있는 최상위에 해당하는 수련자이며 아직 의지를 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찍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이 좋을 수도 있었다.
이겨내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공포심 때문에 상대가 커 보이는 거야. 걱정 마라.”
나는 남은주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 공포의 근원을 내가 없애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