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약 3개월.
그 기간동안 나는 브리앙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다.
처음에는 강박적으로 생각해왔던 강해질 방법에 대한 고민을 멈췄을 때 한동안 적응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해 본 결과, 실제로 강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와 했을 때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냉정의 문신 효과를 크게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불안함을 느껴왔는데 문신의 영향으로 상당히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스킬 또한 내 힘인 만큼 딱히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덕분에 새로운 관점을 경험해 보는 것에 성공한 데다가 브리앙이 자신의 가문의 검술을 새롭게 재정립하고 배워온 과정, 가문에 남겨져 있던 아인모가 가문의 선조들이 남겨 놓은 자료들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러시아 쪽 하층이 열렸고 황제 휘하의 수련자들이 모조리 그쪽에 투입되는 사건이 있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최근 무공의 효용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상당히 이어지는 중이기도 했고.
‘어쩌면 전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날지도.’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무공에 대한 위협으로 저들이 들고일어난 거다.
그런데 무공이 유출되고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슬슬 밝혀지는 와중이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너지는 만큼 곧 바로는 아니더라도 전쟁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곧 바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이야기다. 저쪽에서는 여전히 날이 갈수록 활약해대는, 무공을 사용하는 무인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 중일 테니까.
실제로 이쪽은 의심과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수인이나 오크 쪽은 되려 더욱 위협을 느끼는 것 같기는 했다.
그간 브리앙에게 아인모가 가문의 검술에 대해 배우며 끝내 경지를 올리지는 못했다만 다른 관점과 부족했던 부분을 상당히 보충했다.
아인모가 검술은 나와도 제법 상성이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했다.
황제가 나름 신경을 써 준 것 같았다.
최근 브리앙은 더는 가르칠 것이 없자 가끔 나와 대련을 하거나 내가 묻는 것에 대답해 줄 뿐 그냥 내가 점점 검술에 익숙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실정이었다.
“…3개월 만에 밑천이 다 털릴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하군요, 그 스킬이라는 것은.”
말은 저렇게 했지만 브리앙은 내 재능에도 상당히 감탄하는 중이었다.
다만 나는 진짜 재능 넘치는 이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직 익숙해지려면 멀었습니다.”
“백작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정도만 해도 저는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브리앙은 어딘가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하층이 열렸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브리앙의 말에 나는 러시아 지역의 하층, 빌레딜 지역에 관해 떠올렸다.
“빌레딜 지역이라고 했던가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주요 화제인 덕분에 반쯤 묻히기는 했습니다만….”
벌써 한 달은 더 된 이야기다.
“그게, 폐하께서 그쪽 지역의 몰살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브라질이나 멕시코와 같은 상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기야 거기서는 길드도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볼만한 이들이라면 형제 랭커 둘 뿐이다.
그마저도 나하고는 맞지 않아 걸렀지만.
‘완전 몰살이면 그 둘도 죽는 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일부 인원은 빼돌렸겠지. 그 둘은 특이하기도 하니 눈에 띄었다면 생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꼬시기는 했지만 무법자였던 이도 전향시켜 재활용해 먹는 황제인데 하나도 안 건지고 모두 몰살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확실히 백작 각하께서 대단하기는 하십니다. 제 고향을 위해 노력하시는 수련자는 가이아 길드 말고는 본 적도 없군요.”
이번 전쟁에서 많은 수련자들이 활약했으며 이름을 날렸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은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브리앙은 그런 점을 꼬집었다.
“게다가 최근에 나오는 수련자들 중 멀쩡한 이들이 무척이나 적은 것 같습니다.”
모든 하층에서 나왔던 무법자들에 아예 지역 자체가 완전히 점령되었던 브라질, 미국-멕시코에 이어서 러시아까지.
벌써 세 개다. 사실 뒤에 개방되는 하층들은 대부분이 저런 상태임을 고려하면 앞으로 멀쩡한 하층의 비율은 더더욱 낮아질 터였다.
이후 하층들은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가벼운 잡담과 수련을 반복하는 단순한 일상이 이어졌다. 부인분들과는 연락 안 하냐는 말에 한쪽 지역을 정리하고 수인들이 날뛰는 새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해서 한동안 연락을 못 한다는 말에 조금 안타깝다는 말을 들었다.
최근 일행들과 연락한 것은 일주일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아쉽게도 이번에 가는 지역은 변방이라 마탑이 너무 작아서 연락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의뢰를 받았다고.
덕분에 비교적 일행들과 연락을 자주 했으나 이런 일들도 있고 세 달쯤 되니 일행들은 하나같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었다. 나서윤이 조금 더 많이 하는 편이었다.
최근 길드원들의 평균 레벨이 80에 도달하는 기염을 토했고, 내 직속 길드원들은 어느새 내 레벨을 넘어선 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고작 3개월이기는 했지만 전쟁 상태라는 점이 상당히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특히 희생자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일행들의 성장과는 별개로 전쟁은 점점 이상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왕춘 노사….’
그 양반이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 말고도 제법 많은 자신의 몸에 맞는 무공을 만들어낸 이들이 활약을 이어가고 있지만 왕춘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 수련자는 내 길드 말고는 없다시피 했다.
부족한 실전 경험과 수준 높은 적들을 상대하며 그의 무공 팔선무는 매일매일 진화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도 상당히 활약하기는 했다만 왕춘에 비하면 상당히 모자란 활약상이었다.
다이딘 대공 측에서는 왕춘과 무공 개발자들이 힘을 합하면 제2의 가이아 길드가 나올 수도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와중이다. 무공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필사적으로 잠재우고 꾸준히 개량 중이라며 약을 팔았다. 그러나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나며 의견이 분열되는 상황이다.
천하의 황제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는 중립으로 돌아섰을 정도니까.
그러한 과정을 보고 있는 수인과 오크들이 공세를 늦출 이유가 없었다.
되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게다가 무법자들이 이전처럼 다시금 무공 개발자들을 훔치려는 시도를 계속해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한심한 짓거리지만 나름 필사적인 행동일 거다.
그에 반해 북쪽은 중앙 쪽에서 올라온 병력들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전투는 없다시피 했다.
가이아 길드가 떠났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이미 대패한 북쪽 전선은 그냥 현 상태 유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듯 요새에서 적당히 떨어진 지점에서 가만히 이쪽을 경계하고만 있었다.
문제는 그 수가 5만에 가깝고 네임드 또한 20개체에 주술사가 5개체나 된다.
황제는 만약을 대비해 이쪽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전력을 보내 놓고도 현상 유지라니… 솔직히 낭비에 가까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저 정도 전력을 빼버렸으니 중앙 쪽에서 전투가 일어날 리가 있나. 덕분에 애슐란 전선과 남쪽만 난리다.
나 또한 슬슬 손이 근질거렸다. 부족한 부분을 채웠고 새로운 관점을 체험해 보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써 보지는 못했다. 그런 만큼 슬슬 다시 실전을 위해 남부로 내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일이 터져버렸다.
카바락이 시디안 지역에 출현했다.
그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나는 대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디안 지역. 그곳은 얼마 전 주하연을 비롯한 내 길드원들이 도착했다는 남부의 변방 지역이었으니까.
***
“또 늘어났어, 하연 언니.”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지원은?”
“타 지역에 연락은 도착했을 거야. 병사들이 파견이 올 것 같기는 한데….”
“영국 왕실 길드를 비롯한 산하 길드원들도 소집했으니 지원이 오고 있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냐. 상급 마법사나 마스터가 더 필요해. 젠장, 말이 돼? 무슨 오크 새끼가 혼자서 마스터 열을 상대로 버텨? 저 외팔이 새끼 보통이 아냐. 리더 님아는 저런 놈의 팔을 어떻게 자른 거야?”
사샤의 말에 침중한 분위기가 되었다.
카바락이 등장한 지 3일. 최초에는 그 혼자 시디안 지역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외쳤다.
“유신후! 내가 찾아왔다! 나와 싸우자!”
갑작스러운 강대한 마력이 담긴 외침에 주하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즉시 성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막 도착해 수인들을 몰아낼 준비를 하던 도중 일어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수인들 다수가 쳐들어왔다는 말에 찾아왔는데, 뜬금없이 저런 미친 마력을 자랑하는 오크라니.
그 정체는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었다.
“…카바락?”
애초에 만나본 적도 있었지만, 팔 한쪽이 없는 오크, 그리고 어지간한 마스터는 씹어먹을 것 같은 마력과 기세. 그리고 특유의 잘생긴 외모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챌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그가 신후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고, 주하연은 즉이 성벽으로 나서 사실을 밝혔다. 어차피 유신후가 남쪽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신후 씨는 없어요. 다른 곳에 있죠.”
“호오, 네가 그 유명한 성녀인가. 가이아의 유신후는 어디에 있지?”
주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북쪽이에요.”
“북쪽? 설마 아직 북쪽 전선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건가?”
“그래요.”
“…하. 드디어 그를 보는가 했거늘, 너무나도 아쉽구나.”
몇 개월의 시간을 들여 중앙 전선부터 남쪽의 전선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심지어 이미 도착했을 때 가이아 길드가 떠난 경우도 있었다고.
그는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간들에게는 텔레포트라는 기술이 있다 들었다. 게다가… 너희들 중에는 유신후의 여자도 있다고 했던가?”
확실히 그의 동료 사랑은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카바락은 자신이 그를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 그를 불러내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엇갈린다면 이번에는 또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른다. 그럴 바에야 이곳에 가이아 길드를 묶어두고 그를 불러 내는 것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대들, 강해 보이는군.”
주하연의 곁에는 직속 파티원들과 마스터에 도달한 정예 길드원 10명이 서 있었다.
정예 길드원들 중 마스터에 도달한 이가 벌써 두 자릿수다. 무공이 쫓아온다고 한들 가이아 길드의 명성이 견고한 이유 중 하나였다.
“심심풀이로는 적당하겠어. 어차피 내 수하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야.”
아무래도 혼자서 달려온 듯 그의 곁에는 수인들 뿐이기는 했다.
그렇게 가이아 길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수인들뿐이라면 별거 아니었다. 수가 많기는 했으나 가이아 길드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수준 높은 이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다만 거기에 카바락이 끼어들자 양상이 달라졌다.
카바락은 괴물이었다.
만약 이제껏 유신후와의 대련이 없었더라면 직속 파티원 중 누군가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이들은 전투 중에 느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신후 오빠가… 봐준 거였나?”
카바락과의 전투는 지옥이었다.
남은주는 공격을 몇 번 버티지도 못하고 반쯤 무릎을 꿇었으며 한바다는 제자리를 지키기도 급급했다.
하유진의 은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간파당했고 주하연의 가호와 버프가 더해져도 카바락의 공격 한 번을 막기가 힘들었다.
나서윤이 분전하였으나 거기까지였다.
후열에서 상급 마법을 캐스팅하는 아멜리아를 향해 워 크라이 한 번으로 마법을 깨뜨렸을 때는 모두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이가 없게도 빠른 정령 마법 연사를 통한 물량으로 승부한 나연이 아멜리아보다 더 도움이 되었을 정도였다.
만약 그때 조연은을 비롯한 정예 길드원 중 마스터에 도달한 인원 다섯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카바락의 손에 누군가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가 대전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경험을 쌓은 데다가 노련하고 능숙한 싸움을 했을 뿐. 자신의 힘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음에도 가이아 길드는 카바락의 손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수준이 높아진 이후에도 유신후와의 대련에서 승률은 유신후가 더 높았다. 게다가 이건 대련이 아닌 실전이다.
숫자로 밀어붙여 어떻게든 그를 막아 내었으나 그게 한계였다.
게다가 매일매일 그의 수하들이 뒤늦게 합류해 왔고, 가이아 길드는 더더욱 궁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