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휴식
짧았던 2차전. 그 전투가 끝나고 나자 우리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즉시 지노가드 요새로 돌아갔다.
지금 승리에 취해 다시 이 평원을 수복하겠다고 날뛰었다간 잃을 것이 더 많다. 결과적인 손해다.
그렇기에 승리에 취하기보다 챙길 것만을 챙긴 채 곧바로 요새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상당량의 보급품이군요. 무기나 갑옷에 식량… 재활용이 가능한 물품들이 많습니다.”
“규모가 규모니 말이죠.”
나는 딱히 그러한 보급품들이 필요 없었기에 싼값에 지노가드 요새에 우리 몫의 전리품을 넘겨버렸다.
경험치도 상당 부분 챙겼다. 두 명의 상급 네임드를 처치했고 군대도 사실상 생존한 오크가 천 남짓에 불과했다.
상급의 네임들들이 죽어버리고 2차로 상급 마법이 작렬하기 무섭게 마지막 남은 네임드의 후퇴 명령에 오크들이 눈물을 머금고 도망친 것.
어지간해서는 물러나는 법이 없는 오크들임에도 더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2차 전투의 대승으로 일행과 길드원들의 레벨이 크게 상승했다.
1차까지 합하면 평균 7~8 정도 상승한 상태. 80에 도달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내 레벨 또한 올라 86에 도달했다. 3차까지 4밖에는 남지 않은 상황. 3만에 달하는 군대를 쓸어버렸는데도 90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 혼자 활동한 것이 아니니까.’
그나마도 대규모 군대를 처리해 가산을 많이 받았으니 이 정도였다.
단순히 머릿수대로 나누거나 직접 죽인 이들에게서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면 지금 레벨도 되지 못했을 거다.
“세 명이 죽었어요.”
“…….”
주하연이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껏 정예 길드원들이 단 한 명의 사망도 없이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은 아니다.
압도적으로 적은 수이기는 하나 분명 몇 명의 사람이 죽어왔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전투로 셋이나 되는 길드원이 죽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헬모사 지역에서도 1년간 싸우며 죽었던 정예 길드원이 고작 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큰 손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만큼 A급에 달하는 최정예 전사 오크들의 수준이 높은 것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다면 더더욱 강해져야만 한다. 아깝고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셋의 죽음보다는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만약 공격을 포기하고 수성전을 선택했다면 이보다 덜 죽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성장할 기회를 잃었을 거다. 저들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번 전쟁을 통해 안 그래도 많은 수련자들이 우리를 쫓기 시작할 텐데 안전하게 갈 수만은 없었다.
죽은 것은 우리 길드원들뿐만이 아니다. 병사들 또한 3천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교단에서 보낸 사제들이 있는 이상 많은 이들이 회복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피해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초반에 5천에 가까운 오크를 죽이고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만한 손실이다. 그렇기에 승리했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분위기가 좋기만 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이겼다. 당분간 지노가드 주변은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지노가드 요새로 복귀하자 어마어마한 환영을 받았다.
긴장하고 있었던 성민들은 승리의 소식에 환호했고 레이즈는 이번에야말로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다. 동시에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 또한 잊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가이아 길드원들은 죽은 동료들을 추모하며 한동안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축제는 일주일 가량 지속되었다. 얻은 전리품이 한가득이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그사이 우리들의 승전 소식은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중앙 전선과 남서부, 남부의 수인 전선에까지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오크들은 급히 중앙의 전력을 깎아서 일부를 북부로 돌렸고 덕분에 중앙은 가장 격렬한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전투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공격을 할 이유도 없었고 전력이 줄어든 마당에 오크들이 쉽게 공격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나는 이쪽 일이 정리되었다는 사실을 황실에 알리며 가이아 길드원들 대부분이 남부 쪽으로 이동해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고 오크들의 병력이 줄어들어 중부가 안전해진 만큼 일부 병력을 북부로 돌려 최소한의 안전을 유지했다.
중앙의 병력 중 일부를 북부로 돌리기는 했으나 오크들이 보낸 것에 비하면 정말 적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이익을 본 셈.
덕분에 레이즈와 안 그래도 높았던 가이아 길드의 이름값이 상한가를 찍었다. 교황 또한 성자와 성녀의 이름이 높아진 데다 많은 병사들이 사제들 덕분에 살았다며 많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니 교단 내에서 내 입지는 더더욱 견고해져만 갔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때의 축제가 지나갔다. 약 3일간 죽은 길드원들에 대한 추모가 끝나자 남은 축제 기간 동안 길드원들은 나의 허락하에 축제를 즐겼다.
나 또한 일행들과 잠시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다들 곧 다시금 다른 지역으로 향해야 할 테니까.
“오빠, 이것도 좀 먹어 봐.”
“신후 씨, 오늘 밤에는 나랑….”
“신후 오빠. 저거, 저것 좀 봐요.”
축제 기간 동안 요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축제에 등장하기 무섭게 난리가 났었다.
“성자님과 성녀님이다!”
“그 수호기사 분들도….”
“대마법사 님도 같이 계신 데?”
“바보야, 저분은 마검사야. 최연소 대마법사이자 최연소 소드마스터라고.”
“바보는 너고. 언제적 이야기야? 최연소 마스터는 하유진 님이시라고!”
덕분에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귀족들, 정확히는 지휘관들 같은 상층부를 위한 작은 파티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그냥 단순 다과회 같은 것이었다. 다만 가 봐야 도움이 될 것은 없고 순전히 청탁이나 이쪽 눈치나 보는 이들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 길드원들이 성민들을 설득했고, 덕분에 축제 기간 중에는 우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예의를 지킬 뿐 간섭하는 이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 덕분에 우리들 또한 편히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연.
그녀는 생각만큼 축제를 쉽게 즐기지 못했다.
“걔, 수련하자고 나 부르는데.”
아직 축제 기간이다.
사샤의 말에 나는 곧바로 나연을 찾았다.
“왜 이러고 있어?”
“…신후야?”
나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그런 나연을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바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나연에게 말했다.
“이거 휴가지만 엄청 짧다. 다음 목적지는 남부야. 오크도 오크지만 무법자랑 수인들도 껴 있을걸?”
“…알아.”
나연은 이번 전쟁에서 아직까지는 큰 활약을 하고 있지는 못했다. 물론 아주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중급 정령, 게다가 사샤까지 성장해 두 가지 계통의 중급 정령 마법을 쏟아내는 그녀는 분명 어지간한 병단 소속 마법사 20명분을 혼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나 나서윤 같은 임팩트도 없었고 그녀 자신이 마스터여서 네임드들을 막는 것에 힘을 보태지도 못했다.
주하연 처럼 200에 달하는 정예 길드원들을 살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도 않았으니 내 직속 길드원치고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합신도 못 하는 마당이니까.’
뭐가 부족한 지는 나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워낙 정령사는 귀하고 나연 수준의 정령사는 1회차에서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한 나연은 1, 2회차를 통틀어 모든 수련자들 중 역대 최고 수준의 정령사다. 엘프와 비교를 해도 결코 꿇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엘프들 중에서도 전투에 한해서 나연보다 뛰어난 정령사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미안. 괜히 신경 쓰게 만들었네. 다들 즐겁게 노는데.”
사샤가 일러버린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나연의 곁에 앉았다.
조급해하지 말라거나 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그런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별로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도 내 도움으로 상당히 성장했는데 일행들은 그보다 더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또다시 뒤처졌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생각에 매몰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나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간단히 말했다.
“일단 3차 전직부터 생각하자. 남부로 가면 경험치도 쌓일 거고 잘만 하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조건이 충족될 수도 있어.”
나연은 화제가 달갑지 않았는지 이야기를 돌렸다.
“…너는 안 간다며.”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 남아 브리앙에게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울 예정이었다.
게다가 나는 스킬들 덕분에 조금 늦어도 레벨 90찍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양민 학살 전문에 전투 지속력, 거기에 경지도 높아 1:1도 문제가 되지 않는 데다가 하늘 밟기가 있어 도망도 유리하다. 솔직히 말해서 대전사라도 만나지 않는 이상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레벨 90보다는 그랜드 마스터에 관한 실마리가 더 중요했다.
“나에게는 이쪽이 더 중요하니까. 내가 없더라도 남쪽에서 길드원들이 당할 일은 없을 테고.”
나연 또한 내 말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수인들 중 그랜드 마스터나 대전사와 맞설 수 있는 존재는 고작 둘에 불과한데 둘 모두 온건파 소속이라 움직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저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안전보다는 그냥 내가 같이 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 듯했다.
“은주도 보낼 거라면서. 그래도 돼?”
“응. 교단 쪽에는 말해 뒀어. 여기 사제단과 성기사단이 머물며 나랑 같이 있는 조건으로 허락해 줬고.”
교황이 불평을 하기는 했다. 수호 기사가 이렇게 자주 떨어지면 곤란하다고. 내게는 고작 두 번째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려 두 번이라는 듯했다.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연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냥 넘겨버렸다.
나연이 허공을 바라본다.
이전과는 달랐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대화를 하면서도 알 수 있었다. 나연은 딱히 조급해한다거나 의기소침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녀 또한 상당히 발전했다. 막막하기는 하더라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고 목표도 있었으며 포기하지 않을 이유도 충분했다. 이전처럼 답답하지도 않았으며 나름의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나연이 입을 열었다.
“그냥 레벨도 조금 올랐고 해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어. 그렇게까지 조급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샤가 과민 반응한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실히 조금 답답하기는 하네. 길도 잘 안 보이고. 합신도 또 실패했어.”
씁쓸한 미소를 지은 나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강해지면 나중에 엘프의 숲으로 가자.”
내 말에 나연이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엘프들 중에서는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상급 정령 셋이면 랭커도 위협을 느끼고 전투를 피한다. 그다음 단계인 최상급 정령은 각 개체 하나하나가 거인 이상의 존재다. 그랜드 마스터는 되어야 상대가 가능한 이들. 사샤는 아직 더 성장할 여지가 있었다.
“후후. 여전하네.”
나연은 자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은 고마워.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 볼게. 그다음에도 안 되면 부탁하고.”
“언제든지 말해.”
“…그런 건 서윤이에게 해야 할 말이고.”
“서윤이에게도 언제든지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다행이야. 으음… 서윤이 울리면 안 된다?”
“갑자기 뭔 소리야?”
“아하하. 아냐, 미안.”
나연은 갑작스레 공통된 화제인 나서윤을 너무 막 써먹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한동안 나연의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런 나연에게 술이나 마시자며 다시금 축제의 현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나연은 웃으며 내게 이끌려왔고 곧이어 우리는 축제의 현장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