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오크들은 인간과 다르다.
그들은 성을 세우지 않는다.
집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엄연히 마을이 존재하고 어미와 새끼들을 위한 부락이 존재하며 최소한의 목책 정도는 갖추는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과 비교하면 그 목책이라는 것이 민망할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솔직한 말로 A급, 아니 B급 용병만 되어도 오크들의 목책을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도 망루 정도는 운용한다.
그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성을 쌓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건축 기술은 존재하며 그들 또한 원한다면 인간에 비해 모자라기는 하겠지만 축성(築城)이 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가 강한 종족이기에 그럴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최소한의 방벽인 목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망루를 사용하는 것은 정찰과 정보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일 뿐이었다.
전투를 사랑하고 전쟁터에서 살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오크들이 좋아하는 것은 서로의 전력이 부딪치는 회전(會戰)이다.
동시에 그들은 공성전보다는 야전(野戰)을 사랑한다. 특히 평원에서 벌어지는 회전은 오크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투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평시 머무르는 장소는 드넓은 평원의 일부였다.
지노가드 요새는 산악 지형에 가까운 환경에 맞춰 세워진 요새로 끔찍한 험지까지는 아니지만 공략이 까다로운 요새임은 틀림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지형의 요새였기에 국경이 될 수 있다고 봐야 했다.
제국 입장에서는 조금 치욕스럽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위쪽의 평원 대부분을 포기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평원에서 오크들이 진을 쳤으며 가벼운 목책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역 표시의 효과 말고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오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영역 내부에서 편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보기 위한 망루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어두운 밤. 나는 삭월의 가호를 받아 하유진, 나서윤과 함께 움직이며 오크들의 눈인 망루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요새를 감시하는 오크들의 눈을 모조리 차단했고 그 대가로 대부분의 병력을 조심스럽게 빼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 쪽 진영보다는 오크들의 진영에 가깝게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들기 위해 달밤에 고생하는 와중이었다.
‘여섯. 여섯 망루만 차단하면 틈을 만들 수 있다.’
어디까지나 밤에 비밀리에 움직이는 만큼 망루 자체를 부수지는 못했지만 망루 내부의 오크를 무력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밀리에 오크의 망루로 침입해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서윤이 수면 마법을 행한다.
마력의 유동이 있기는 했지만 나서윤의 마법이 워낙 빠르게 발동되는 데다가 망루에서 망을 보는 오크들의 수준은 고작 C등급, 잘해도 B등급 수준의 오크에 불과했다. 수준의 차이가 엄청난 만큼 오크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죽이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형?”
“일단은 안전하게 병력들이 숨는 것이 먼저니까.”
이들이 죽어버리면 감시망이 뚫렸다는 것을 깨달은 오크들이 우리의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죽이는 것보다는 잠시 재워버려 잠시만 시선을 가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이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잠이나 퍼잤다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않을 거다.
둘씩 짝을 지어 망루에 있었기에 둘 모두 잠들었다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으면 모를까 멀쩡히 깨어났으니 그냥 지나갈 확률이 높지.’
경계 중 둘 모두 잠들었는데 깨고 나니 특별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찝찝함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찾아가서 근무 중 잤습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지나갈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형식적인 일에 가까운 만큼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제껏 인간이 성을 나와 그들을 습격한 적은 없었으니까.
‘인간이 멀쩡한 성을 두고 야전을 할 이유가 없지.’
목표했던 모든 망루를 무력화하고 신호를 보내자 3천에 가까운 병력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최대한 흔적을 줄이고 산을 넘어 지정된 위치로 스며든다. 하루는 산에서 보내야 하는 만큼 되도록이면 깊숙하게 들어간다.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나 이런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면 오크들이 발견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신경 써서 눈을 가렸다.
상대 세력을 늘 정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당연히 한두 군데서 그런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껏 없었던 일이고 준신화급 스킬을 가진 수련자가 최상급 마스터, 상급 마법사와 함께 움직이며 행한 일이다.
작정하고 한다면 잠시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무사히 병력들이 어둠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을 때 나와 하유진, 나서윤 또한 그들을 따라 산맥으로 스며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한다.’
작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지정된 위치에 마법 병단과 성의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고 저들의 본진을 쳐 피해를 입힌 이후 저들을 유인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힌다는, 무척이나 단순한 작전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걸려들지 않을 작전이었으나 이번에는 통할 가능성이 높았다.
긴 역사 중에서 제국이 오크들에게 이정도 규모의 선제공격을 한 적이 없다시피 했다는 것과 지원이 전부 온 것도 아닌데 성을 무방비로 두고 오크들의 눈을 피해 이쪽에 매복했다는 점, 인간들이 오크들과 피해왔던 야전을 하려고 한다는 점 등 오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 엄청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레이즈가 상당히 과감했지.’
솔직히 그가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을 통째로 비운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힘든 일이니까.
차라리 안전하게 뒤 병력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린다면 무난하게 성을 지킬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이런 작전을 허가한 이유는 간단했다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이점이 있으니까.’
성공만 한다면 병사들의 피해도 줄어들고 이후 지원군이 온다고 한들 성을 공격할 엄두도 못 낼 것이며 어마어마한 공적까지 세운다.
성공할 가능성도 무척이나 높다 보니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력의 차이도 크다. 단순히 붙어도 이쪽의 전력이 우위인데 매복까지 당한다면 저들은 일방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의 눈을 피해 산맥에 자리를 잡는 것에 성공했지만 레이즈의 표정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다.
“…오늘만 넘기면 되는군요.”
“하루만 산에서 버티면 됩니다. 오크들은 이상을 눈치채기 힘들 겁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유진과 나연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오크들의 진영을 정찰했다.
다행히 예상대로 하루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오크 정찰대를 모두 없애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당연한 행동이었다. 급하게 눈이 가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오크들이 재차 정찰대를 파견해 요새를 확인했지만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할 거다.
일부 병사를 남겨 두었고 주민들을 징집해 돌아가며 여전히 요새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실상은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을 거다.
하지만 지원 자체가 일부라도 왔다는 것은 깨달았을 거다.
오크들의 눈을 가리며 정찰대의 시체에 가벼운 메시지를 남겼으니까.
‘뭐, 나름 경고라면 경고일 수도 있지.’
성을 넘보지 말라며 내 이름을 남겼다.
카바락 덕분에 오크들 사이에서도 내 이름은 나름 유명할 거다. 아마 그들은 정찰대가 전멸한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내 등장을 알려 함부로 침공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랬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게 만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이쪽에 있음을 알려 전쟁을 최대한 억제한다. 대전사에 가까운 네임드, 카바락을 정면에서 쓰러뜨린 나다. 아무리 저들이라도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남부의 전선이 커진 만큼 지노가드 요새 전선에서 전투를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원하는 바일 테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눈치를 채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적어도 하루 만에 전략을 알아채 단숨에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실제로 그런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매복은 실패하겠지만 우리가 뒤를 잡고 회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쪽도 필연적으로 제법 피해를 입겠지만 저들은 전멸시킬 수는 있을 거다.
그것만 해도 일단 목적은 달성한다.
다행히 저들은 하루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망루에서 재워버렸던 오크들도 일어난 이후 우리의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산을 타고 넘었다. 망루 위에서 이미 지나간 우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대한 흔적을 지우기도 했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후임자들과 교대했고, 서로 아직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은 채 천천히 어둠이 찾아왔다.
레이즈는 낮에는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밤이 되자 오히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군요. 눈치챈 기색도 없고… 성공적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나같이 낮에 자게 해 두었으니 지금은 멀쩡할 겁니다.”
산맥 중 오크들이 오지 않는 조금 깊숙한 곳에서 쉬던 병사들은 밤이 되자 위치를 조금 조정했다.
너무 깊은 산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너무 얕지도, 그렇다고 너무 깊지도 않은 적당한 위치.
동시에 좌우로 제법 경사가 높아 일방적으로 때리기 좋은 위치를 매복 지점으로 잡았다.
“선조들이 언제나 주변 지형을 꼼꼼하게 확인하신 성과를 제 대에 보는군요.”
크게 깊은 산맥은 아니니 여기 정도까지는 따라올 터. 최대한 많은 오크들이 딸려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럼 움직이죠.”
“무운을 빌겠습니다, 백작 각하.”
승리를 위해, 내가 직접 미끼로 움직이는 거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가장 앞장서 움직이는 지휘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정예 길드원들과 함께 오크들이 머무는 평원을 향해 달려나갔다.
***
평원의 오크들은 한창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밤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행성인 오크들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깨어있는 인원이라고는 경계병들뿐이었다.
‘여기에 상급 마법이라도 하나 내리꽂으면 3천은 지우고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아쉽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네임드 오크만 다섯이니 순식간에 거대한 마력의 유동을 느끼고 이쪽을 향해 달려올 거다.
마스터 둘이면 이미 발동된 상급 마법이라도 막을 수는 있었다.
단, 그럴 경우 그들은 더이상 전투에 참가는 할 수 없게 되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여기서 전력으로 저들과 싸우는 것이 아닌 가능한 한 피해를 입히고 유인하는 것.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나서윤을 비롯해 마법사는 데려오지도 않았다. 나연 또한 마찬가지.
그녀들은 현재 매복 중이다. 나는 이전처럼 하유진과 함께 망루를 무력화하고는 직선으로 오크들의 주둔지를 향해 돌진했다.
망루를 무력화하기는 했으나 이전과는 다르다.
정예 길드원 200을 모조리 이끌고 달려왔다.
눈을 가리는 것은 잠시뿐. 곧바로 오크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적, 적! 적이다!”
평원에 자리 잡은 뒤 실제로 이런 습격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오크들의 목소리에서 조금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인, 인간이? 어째, 서!”
나는 그런 이들을 무시한 채 비도 일부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들에게 집어 던졌다.
쉭-! 퍽!
몇몇 경비 오크들의 순식간에 쓰러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습격을 알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쿵쿵쿵!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오크들의 주둔지가 빠르게 밝아진다.
아무리 처음 습격을 당해 당황스럽다고 해도 저들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는 회로를 활성화하고 빠르게 강기를 뽑아냈다.
이전과 차원이 다른 속도로 마력이 반응한다.
순식간에 강기가 완성되었고 나는 이전 왕춘이 했던 짓을 떠올린다.
‘이렇게… 하면 되나?’
정확히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전의 마스터들과의 싸움과 거기에 더해 왕춘의 기술을 보고 영감을 얻었지만 구현은 어디까지나 내가 해내는 것.
스킬화된 무공의 힘으로 이루어냈던 왕춘과는 다르게 나는 순수하게 내 기량을 바탕으로 해내는 것이라는 점 또한 큰 차이였다.
늘어난 마력과 회로의 재구성에 따라 이전과 다르게 한 차원 상승한 뛰어난 마력 컨트롤을 바탕으로 이전이라면 진즉 타올랐을 강기의 형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마력의 유입에 강기가 제 형상을 유지하기 힘든지 고속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심 이건 이거대로 쓸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마침내 원했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이전 카바락과의 전투를 떠올린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크들의 주둔지는 시시각각 가까워져 갔고, 어느새 먼저 일어난 몇몇 오크가 목책 위로 올라가 화살을 쏘아낼 것 같은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조연은이 훨씬 빨랐다.
그녀는 마스터. 그것도 드물게 활을 사용하는 마스터다.
순식간에 쏘아낸 화살에는 강기가 깃들어 있었고, 순식간에 목책 위의 오크들을 쓰러뜨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런 활 솜씨를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있다.’
이전 카바락이 했던 거다. 내가 못 할 것은 없었다.
나는 어느새 균열 투성이가 되어버린 강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크게,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향해 휘둘러진 검.
동시에 균열 투성이인 강기가 내 검을 떠나 빠르게 목책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는 목책에 닿기 무섭게 강하게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이전 카바락이 사용했던 강기를 날리는 기술.
그 위력만 해도 보통이 아닌데, 나는 거기에 이전 마스터와의 싸움때마다 보았던 강기의 파편과 왕춘의 무공을 보며 상상했던 기술을 구현해 냈다.
강기의 파편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일대를 초토화 시키는 기술.
날아간 강기가 폭발한 지점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파편이 사방을 향해 비산했다.
‘수류탄.’
일종의 강기 수류탄에 가까웠다.
단숨에 목책이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반경 50m에 이르는 공간이 모조리 찢겨나갔다.
그 범위 아래, 살아있는 오크는 오직 하나였다.
‘허.’
그마저도 멀쩡한 형상은 아니다.
몸 이곳저곳이 찢겨나가 전신이 피투성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 그 오크는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내뱉고 있었다.
‘네임드 오크.’
개전을 알린 일격에 운도 좋게 무방비한 네임드가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