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약속했던 것.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나를 백작위로 임명한다는 말과 함께 귀족임을 증명하는 증서가 들어 있었다.
황제는 본래 ‘가이아’라는 이름을 성으로 붙여주려고 했었다. 길드 이름이 가이아이기 때문에 나름 배려라고 해 준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이름은 ‘신후 유 가이아’가 되어버린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었기에 성이 ‘유’임을 알리고 그대로 가문명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수련자라는 특성을 고려해 아마 유 백작 내지는 유신후 백작이라 불릴 터다.
두루마리에는 제국의 마스터이자 전쟁에서 여러 공훈을 세우고 최초의 성자이기도 한 나를 기리며 제국의 단승 백작위를 내린다고 적혀 있었다.
고위 귀족인 백작이다. 세습은 안 되지만 그래도 백작의 지위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내 공훈이 나쁘지는 않다만, 백작을 주기에는 모자라다 할 수 있으니 단승으로 한 모양이다. 아마 내가 마스터가 아니고 성자가 아니었다면 단승이라고 할지라도 백작의 작위를 받지는 못했을 거다.
어차피 여기서 후계를 둘 것도 아니니 단승이라고 불만인 것은 아니다. 뭐, 나중에 더 공을 세우면 세습 가능한 작위로 바뀔 수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 약속했던 독립작전권을 위한 독립부대 창설 권한까지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스스로를 호위할 수 있는 기사단의 창설을 허가하고 그 기사단에 한정해 독립적인 작전의 수립, 실행을 허가한다…라.”
“…결국 원하던 것을 모두 받으셨군요.”
“이렇게 바로 주실 줄은 몰랐는데….”
“광진에 대한 보답… 이라고 하시더군요. 이에 대한 정확한 발표는 후일 폐하께서 직접 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내가 직접 참여할 필요는 없다. 이미 백작의 작위도 받았으니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폐하의 권한이기는 하지만 백작쯤 되면 확실히 말이 나올 만합니다. 그렇지만 세습 귀족도 아니고 단승 정도라면 폐하께서도 큰 무리는 아닙니다. 타 귀족들도 크게 뭐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큼 유신후 백작의 위치가 남다르니까요.”
1황자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후 1황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배제한 채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을 전한 뒤 곧바로 먼저 자리를 피했다.
황제가 얼마나 권위가 강하고 통제력이 강한 편인지 새삼 느껴졌다.
‘괜히 중앙집권을 원하는 것은 아니군.’
그렇다고 해도 1황자쯤 되는 인물을 저렇게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제 자식이라고 해도 황자인데, 통제가 쉬울 리 없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던데, 그걸 진짜 실행하는 모양이다.
뭐, 1황자도 본인이 황태자만 된다면 중앙집권에 성공할 시 미래의 1인자다. 참을 수밖에 없을 거고 협조할 수밖에 없을 거다. 결국 자신도 황실의 사람이니까.
어쩌면 황제보다는 1황자의 자기통제력이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황자가 자리를 뜨자 교황이 조용히 읊조렸다.
“성자에 더해 백작이라….”
교황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더는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에는 들지 않을 거다. 일종의 성직자인 내가 귀족이기도 한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애초에 나는 교단보다 황제와 먼저 관계를 맺었으며 황실과 조금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게다가 나와 척을 지면 아쉬운 것은 교단이었다.
“축하드립니다. 기사단 창설이라… 그런 것까지 받으실 줄은 몰랐군요.”
“수련과 성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립작전권까지 얻으면 자유도도 훨씬 높아지니까요.”
황실의 보증을 얻어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움직임을 가질 수 있는 권한.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많은 귀족들이 반발할 거다. 황실이 멋대로 내려준 것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거둬들이기에는 내가 성자 임명까지 받으며 건드리면 도리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너무 높아졌다.
그들도 내심 황제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것에 가깝다는 것도 알 거다. 황제라고 그냥 주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아무 대가 없이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나저나 이제는 완전히 공표를 하셨으니 이전에 약속했던 것들을 이행하고자 왔습니다.”
순간 무슨 소리인지 의아했지만, 곧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성인의 전당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성유물의 개방. 그것을 약속드렸었지요. 이제는 충분한 자격이 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포함입니까?”
“물론입니다. 성자이신 유신후 님이 빠질 수야 없지요. 원하신다면 한바다 님께도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만….”
“큰 도움은 되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신성력을 쓰지 않으시니까요.”
솔직히 나도 딱히 탐나지는 않았다. 나야 성흔 덕분에 신성력을 쓸 수는 있지만 나 또한 주로 쓰는 것은 마력이니까.
“저 또한 마력을 주로 쓰는 몸. 시련은 하연 씨와 은주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교황 또한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주하연과 남은주는 교황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둘이 자리를 비우자 나는 방금 생각난 것을 한바다에게 물었다.
“마스터가 되셨으니 스밸러스의 갑옷 2단계 시련에 도전해 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2단계는 던전 형식으로 시험을 치루기 때문에 당장은 힘듭니다.”
본래라면 최상급에 도달했을 때 도전해봄 직했지만, 한바다는 안전하게 가겠다며 1단계만 해방한 상태로 버텼다.
지금은 완전히 마스터가 되었으니 2단계는 거뜬하고 3단계도 낮지만 시련을 통과할 가능성이 생겼다. 당장 3단계에 도전하지는 않겠지만 2단계는 본인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오빠. 대공 쪽, 괜찮겠어?”
“당장 그들이 뭘 한 것은 아니니까. 대화야 거절할 거고, 우리가 먼저 뭘 하지는 않을 거다. 신경 쓰지 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움직인다.”
아무리 무공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우리 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예상외였다. 자신들이 개발한 것의 유용성을 알리고 조금 더 기반을 다진 이후 황제의 눈치를 덜 보게 되었을 때나 우리에게 조심스레 접근할 줄 알았다.
물론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들 내 일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훗날 우리 쪽에 접근해도 다이딘 대공 아래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야겠군.’
길드원들에게 언제든지 소집할 수 있다는 언질 정도는 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시간이 지난 이후 남은주와 주하연이 돌아왔다.
“교황이 뭐래요? 언니들.”
“그, 전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별거 없었어. 봉사활동이나 기도회 참석 같은 것이 대부분이야. 단지, 그게 입장 권한이고 각 성유물에 관한 인정은 따로 받아야 하나 봐.”
‘…봉사활동?’
“선택한 것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더라고. 성유물 자체가 사람을 가려서 아무나 못 쓴다고.”
“그럴 거면 입장 권한은 왜 설정했대? 짜증 나게. 일 두 번 시키네. 그래도 일단 성녀랑 수호 기사인데….”
사샤가 자그맣게 짜증을 부렸다.
“원래 거기 잘 안 여는 데라더라. 이번에는 자꾸 전례에 없었던 일이 일어나니까 대신전도 큰맘 먹고 연 거라던데? 그리고 본래 봉사활동이 아니라 제대로 시험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하연 언니 신성력도 그렇고 내 실력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판단하셨대. 그래서 그냥 최소한의 태도를 보는 것으로 대체한 거라더라.”
남은주의 말에 사샤는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입장 권한부터 얻어야겠군요.”
“네,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요. 어디까지나 교단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느낌이라….”
어려울 것은 없었다.
우스운 것은 남은주를 내가 빼내는 바람에 나 또한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은주가 내 수호 기사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일행들 수준도 되고 빠졌던 인원들도 채워진 만큼 슬슬 수준이 되지 못해 가지 못했던 던전들을 돌 예정이었는데 조금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나와 일행은 교단이 요구하는 봉사 활동과 기도회 몇 군데에 참석해야 했다.
우리가 신전과 함께 봉사 활동에 힘쓴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환대를 받았고, 일행들의 얼굴에는 뿌듯해하는 기색이 맴돌았다.
그렇게 교단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맞췄을 무렵, 마침내 다이딘 대공이 제국 전역에 발표했다.
새로운 마스터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비술, ‘무공’을 개발했음을.
***
새로운 비술의 개발에 제국 전역은 열광했다.
조금 더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 비술로 마스터가 되었다는 이가 나타났으니 충분한 증명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수련자들의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비술은 상당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무술임에도 마법과도 같은 효과를 내는 기술들도 무수히 많다는 정보가 퍼졌다.
제국은 이러한 비술의 개발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주적인 오크들과 끝없이 싸우는 중이었고, 엘프&드워프 연합은 언제나 인간을 견제해 왔으며 수인들 또한 인간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사방이 적인 제국의 환경상 힘에 대한 추종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다이딘 대공은 아예 무공에 대해 널리 알리겠다며 제국의 유력 귀족과 명성 있는 무인들을 자신의 영지로 초대하는 강수를 두었다.
현재 개발된 무공은 3종에 불과하나 수십 종류의 무공이 현재도 개발 중에 있으며 거의 개발이 완료된 무공도 몇 종류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개발된 무공 3종을 이번 연회에서 모두 시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공은 고작 3종만이 완성되었다고 말했지만, 수련자들이 출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벌써 완성된 비술이 3종류나 된다는 사실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경각심을 가졌으며 동시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비술인가, 어떤 비술이기에 마스터가 탄생했는가. 경계심과 함께 강한 호기심, 더불어 탐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렇기에 대공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이러한 상황에 상당히 당황한 듯 급하게 나를 불러들였다.
나는 주하연과 남은주를 성인의 전당으로 보내고 대신 나연 자매와 성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황제를 만나기 위해 황실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라면 남은주가 이리 쉽게 내 주변에서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만 상황이 특수한 만큼 성기사 한 명을 대동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어차피 황제는 혼자 만나기에 상관은 없었다.
황제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왔는가.”
황제는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대는 처음 보겠군. 이쪽은 체비니르 재상과 큘리스 대장군일세.”
“반갑습니다, 백작.”
“드디어 만나는군. 그간 폐하께서 얼마나 꽁꽁 감추셨는지….”
둘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그간 황제가 나와 독대를 주로 한 만큼 그 주변 사람들과는 만날 기회가 없기는 했다.
애초에 내가 관심을 갖지 않기도 했고, 인맥과 세력을 만들기를 원치 않았던 황제가 제한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백작이 된 데다가 독립작전권까지 손에 넣어버린 만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번 다이딘 대공의 소식은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듣기로는 그 무공이라는 기술이 수련자들뿐 아니라 제국민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조금 느리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비교 대상이 수련자라 그렇지 5년에서 10년 정도면 충분히 효과를 볼 것이라고 이야기가 나왔었다.
실제로 재능 좀 있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력을 다뤄왔던 거주민 기사는 무공을 익힌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익스퍼트가 되었으니까.
마력을 가공, 특유의 단전을 만들고 마력과 오러의 중간쯤으로 추정되는 기운, 내공이라 명명한 기운으로 치환해 특유의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솔직히 말하겠네만, 그런 기술들이 실제로 그대의 세상에 있었다는 말인가? 그대들의 세상에는 마력도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수련자들이 중층에 다수 나타났기 때문인지 지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모로 알려져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래 그 뜻은 저런 비전의 기술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무술 용어였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저들이 말하는 실존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무공은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공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기술들을 뜻하는 거겠죠.”
“이제는 공상이라고 보기 힘들지. 실제로 만들어졌다지 않은가?”
“확실히 이제는 실존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반문에 황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다. 정확한 것은 대공이 발표하는 것을 확인해 봐야겠지. 거기에 더해 안정성이나 실제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을 해 봐야 하고. 그러나 마냥 방치할 수는 없지. 그것이 정말 뛰어난 기술이라면 뒤처지게 되니 말이야.”
‘쯧. 확실히 초반에는 좀 끌리긴 하지만….’
그건 정말 초반에나 그렇다. 완성되었다는 것들도 태반이 엉터리고 부작용투성이다. 가장 중요한 안정성이 거지 같다.
‘게다가 그냥 복권에 가까운 기술들이고.’
잘만 구한다면, 그리고 운만 좋다면 정말 쓸모 있는 기술들도 있다. 실제로 내가 괜찮게 보는 기술도 있었고. 하지만 있으면 좋은 수준에 지나지 않아 굳이 찾아가 거래를 요구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시점에 만들어졌는지도 의문이고.
“그래서 나는 일단 초대에 응할 생각이다. 물론 내가 직접 갈 수는 없지. 가벼운 일은 아닌바. 대리인으로 큘리스 대장군을 보낼 셈이다.”
나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대가 대장군과 동행했으면 하는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무공에 큰 관심도 없고 저쪽에 신경이 쏠린 사이에 여러 영지를 돌며 알짜배기 던전을 털 예정이다. 그런 곳에 쓸 시간은 없었다.
나는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