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는가? 타 대 귀족들처럼?”
내가 직접적인 영지가 없고 실제 귀족은 아니지만, 내 무위는 마스터다. 평범한 평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신분이 평민인 것도 사실. 그런 내가 귀족이 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작위가 준 귀족인 기사나 준남작, 하급 귀족인 남작도 아니고 무려 백작의 작위를 요구했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영지가 없다 뿐이지 드넓은 영지이자 급속도로 발전 중인 티드린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며 동시에 무력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그런 내가 백작의 작위와 함께 독립작전권을 요구했다.
황제가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이건 단순히 내 길드의 세력을 키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순한 용병 집단과 작전권을 지닌, 그것도 고위 귀족의 군대는 권한과 책임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폐하와 계약 관계를 끊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어찌하여 그런 요구를 하는가? 그대는 성자이기도 하며 자네 연인 중 한 명은 무려 성녀지. 슬슬 그 사실도 발표할 때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슬슬 교단 측과 이야기를 통해 사실을 알릴 날이 머지않았다.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우리의 신성력을 보면 충분히 공표해도 충분한 수준이니까. 신전 쪽에서도 꾸준히 요구해 오기도 했고, 우리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고위 귀족 작위인 백작과 독립작전권까지 달라? 이게 세력을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대는 그대의 세계를 구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권력에 욕심이라도 생긴 건가?”
말을 하는 황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도 스스로 그리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내가 황제를 돕겠다는 모습이 명확했으니까.
이전의 대화만 봐도 그렇다. 그냥 페소타를 멸망시키면 될 것을 굳이 황제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고 광진까지 팔아넘기며 방도를 알려왔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세력을 만들어 독립하려고 한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낄 만했다. 내가 정말 그런 것을 원했다면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타 귀족들과 비밀리에 연합을 한다던가 무법자들을 이용해 더 혼란을 일으켜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던가 교단을 이용해 성군을 조직, 단순한 용병단에서 벗어나는 간단한 방법도 있었다.
“앞뒤가 안 맞는군. 그대가 정말로 그런 것을 원했다면 이런 방식은 무척 비효율적이야.”
“그거야 그럴 생각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백작의 작위와 독립 작전권을 원하는 이유를 밝혔다.
“타 길드들을 억누르고 자유롭게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입니다. 게다가 이건 폐하께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같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군.”
“그거야 저는 저희의 공동의 이익을 언제나 생각하며 움직이니까요.”
내 말에 황제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또 어떤 이익이 서로에게 주어지는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말해보게.”
방금 있었던, 무법자들을 이용해 황실의 힘을 강화할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일까. 황제는 내 엄청난 요구에도 한결 편안한 자세로 내게 이유를 물었다.
“많은 수련자들이 중층으로 올라왔지만, 아실 겁니다. 진짜 저희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무척이나 적습니다.”
“그렇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모든 수련자들이 자네 같을 줄 알았어. 아, 실력을 말하는 것은 아닐세. 가장 먼저 제국에 도달한 만큼 그대의 실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 마음가짐일세.”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더군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것일 테지. 제국도 그러해. 타 세계라고 다르지 않더군.”
물론 다 같이 포기하고 눌러앉으려는 모양새는 아니다. 단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인 만큼 슬슬 탑에 적응해 가는 것일 뿐. 아직까지 노력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초기에 비해 그 동기가 작아졌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우리 가이아 길드 내에서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들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이 산하이고 직속은 그 실력의 상승만큼 의욕이 꺾이지는 않았기에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았다.
참고로 의욕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은 1회차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욕은 꺾일 수밖에 없었고, 갈수록 지구로 돌아가려는 이들은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길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거고. 그들이 말없이 사라진 이후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파티를 수습하는 단계부터가 무척이나 고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제가 필요합니다. 타 귀족에게 붙어 지원을 받는 것까지는 이해하나, 그들이 노력도 없이 그들에게 붙어 정착하려는 모습은 무척이나 거슬리더군요. 그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귀족의 작위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고위 귀족의 작위가 필요하죠.”
특히 다이딘 대공과 아르테인 공작가, 애슐란 변경백은 가장 강한 세 세력이고 그 직위 자체가 어마어마한 만큼 하급 귀족 작위로는 부족하다.
“폐하의 명으로 움직이면 오히려 곤란합니다. 특히 세력이 이렇게 나뉜 상황이라면….”
황제와 귀족가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이건 황제의 탓을 조금 할 수 있었다. 하층을 제대로 황실 휘하에 넣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으니까.
“흠흠.”
그건 황제도 아는지 조금 어색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수련자가 수련자를 징치한다. 그것도 원래 세계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래대로라면 조금 웃긴 이야기다. 자유의지를 내가 뭐라고 구속하는가? 허나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로 수련자의 일은 수련자가 해결한다고 우길 수도 있었다.
황제도 적극 지지할 테고.
황실의 힘을 키울 것들이 아닌 타 귀족의 살을 찌울 수련자들이라면 황제도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뭐, 꼭 그들이 황실 아래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타 귀족의 살을 찌우는 대신 강해진다는 일념으로 오크와 싸워댔다면 황제도 저렇게 적극 지지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걸 위해서는 귀족 작위가, 그것도 고위 귀족 작위가 필요하다.
물론 내가 황제파인 이상 시비는 걸리겠지만, 내가 단순히 황제의 칼인 용병단으로 활동하는 것과 스스로 고위 귀족인 백작으로 활동하는 것은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칼 주인인 황제에게 항의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활동하는 나에게 항의를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앞서 말했듯 수련자 이야기를 꺼내며 당당히 맞설 수 있고, 세력으로도 성장한 내 가이아 길드는 결코 얕보지 못한다.
영지가 없다고 무시할 수 없을 지경. 당대에 한하는 힘이기는 하나 어차피 다음 대는 없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니까.
자본이 밀리는 것도, 배경이 밀리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성자가 될 몸이기도 하니 여신의 뜻을 내세워도 되기는 하겠군.’
카드가 많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백작 건은 이해했네. 그렇다면 독립작전권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인가?”
“저는 그간 많은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아실 겁니다.”
“당연한 말을.”
내가 주로 이용한 것은 황실 정보 단체다. 당연히 황제의 귀에 들어가야 정상이다.
“여러 정보들을 토대로 던전들과 저희가 강해질 유물, 적당한 수준의 적, 사냥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방법을 몇 개 구상해 놓았습니다만, 단독작전권이 필요한 경우가 많더군요.”
물론 지금도 상당수의 던전은 내 휘하의 길드원들이 털어먹고 있었지만 중층의 던전은 수가 엄청나게 많다.
무엇보다 진짜 좋은 던전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협력을 요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 귀족의, 국경에 접한 영지인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수인과 오크 양쪽에 국경을 접한 애슐란 변경백을 들 수가 있다.
그의 영지에서 작전을 펼치려면 아무리 황제에게 협력을 요청해도 변경백이 막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거부라기보다, 지연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그쪽의 방어 책임은 변경백이 가장 크니, 동시에 권위도 가장 크다.
그러나 내가 황제가 인정한 독립작전권을 가졌다면 그의 병력을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건 크다. 타 영지의 던전과 유물을 합법적으로 털어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 상위 던전과 위험 지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수련자는 나와 내 길드원들뿐이다. 그러니 최대한, 당당하게 선점해야 한다.
게다가 중립 완충 지역이나 타 종족의 지역에 던전이 존재하는 경우도 다수 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자 황제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가 좋은 것들을 모조리 선점하고 합법적으로 수련자들에게 간섭한다라… 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는군.”
황제는 자신이 얻을 이점까지 빠르게 계산해 냈다.
자신은 유일하게 방해받지 않고 수련자들을 키울 수 있으며 반대로 귀족들은 수련자들을 이용한 무력의 성장에 상당한 방해를 받을 거다.
물론 받자마자 저들을 제한할 생각은 없었다. 말했다시피 자칭 신선 때문에 한동안 혼란이 있을 것이고, 그게 빌미가 되어줄 테니까.
실제로 황제가 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당분간은 성장에 주력해야 한다.
성자 임명도 있었고, 황제가 건네줄 검술 비전과 선생의 교육 또한 받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황제의 우위성이 상당히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게 해주는 지원을 끊지도 못한다. 그건 황제 쪽에서 먼저 배신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또 내가 먼저 배신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황제가 현재 해 주는 지원이 독보적인 것은 맞지만 앞서 말한 다이딘 대공을 비롯한 세 대귀족이 못 해줄 지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와 믿음. 백작의 작위와 독립작전권을 준다는 것은 전적으로 나를 믿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장고 끝에 황제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대가 원하는 것 두 가지를 모두 내주지. 단.”
황제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이유 없이 줄 수는 없지. 그대가 성자가 된다면 곧바로 넘기도록 하겠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황제는 결국 나를 믿기로 결정했다. 그간의 행동과 내가 제시한 이익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곧바로 광진을 불러들였다.
광진을 먼저 준다는 것. 나 또한 황제를 믿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것이었다. 신뢰의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내 행동에 황제 또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선불을 받는다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어차피 배신은 못 하겠지만.’
내가 성자가 되고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 귀족에게 넘어가면 그만이다. 황제가 최고의 거래 상대인 것은 맞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더이상 최고의 거래 상대가 아니게 된다. 앞서 말했듯 지금 받는 지원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타 귀족에게도 받을 수 있다.
내게 불려 온 광진은 내가 자신을 황제에게 팔아넘긴다는 것을 듣자마자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약,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내가 너한테 해준 약속이 뭔데?”
“제 신분을 바꾸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정확히는 너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었지. 신분을 바꾸는 것은 그 과정이고. 걱정 마. 폐하께서 너를 아주 아껴주실 예정이시거든.”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이 팔려간다는 사실에 광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오죽하면 황제의 앞에서 소리를 높인다는, 나도 안 하는 짓을 할 정도였으니까. 역시 간덩이 하나는 진짜 크다. 광진을 살려 보관해온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앞장서는 일들이 많을 텐데 배짱이 있는 것이 훨씬 좋다. 게다가 잠재력까지 높으니 금상첨화다.
황제는 감히 자신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광진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상당히 쓸만한 ‘상품’이었으니까. 이 좋은 상품을 시끄럽다는 이유로 부수기에는 그 유용성이나 치른 대가가 무척이나 컸다.
그간의 안정된 생활이 격변을 맞이하는 거다. 동요하는 것이 당연했다. 황제는 넓은 마음으로 상품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광진이라고 했던가? 전향에 성공한 최초의 무법자라고?”
광진은 황제의 말에 덜덜 떨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오래전 일입니다! 지금의 저는 결코 무법자가….”
“과거는 사라지지 않지.”
엄중한 황제의 말에 광진이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나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건 그냥 길들이기다. 현재 제국이 무법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광진은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해 일을 해 줘야겠어. 아, 걱정하지 말도록. 시키는대로 한다면, 지금 누리는 것 이상의 풍족한 삶과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지. 이 또한 유신후 길드장과의 약속이니.”
황제의 가벼운 립 서비스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광진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운명은 그의 손을 떠났다.
나와 황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