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거래
실망. 솔직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황제는 무법자들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오죽하면 황제인 그가 내 힘이 더 커지는 것도 감수하며 하층 하나를 통째로 맡겼을까?
이미 나는 하층 두 개를 소유한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게다가 각자가 첫 번째, 두 번째로 열린 하층이며, 한국 쪽 하층은 모든 하층을 통틀어 가장 수준이 높다.
개인으로써도 가장 유명한 수련자이고 황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정석 광산을 통해 경제력도 상당하다.
최근에는 성자와 성녀 이야기까지 나오며 신전과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나를 적절히 견제할지언정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세 번째 하층을, 일부 흡수해 세력을 더 키워도 좋으니 무법자만 더 나오지 않게 처리해 달라고 믿고 맡겼다. 상당한 대가까지 제시하며.
그런데 그가 보기에는, 아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이번에 처리한 일은 엉망진창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능한 이인 프레드를 흡수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이건 황제가 허락하고 감수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내가 한 짓들은 황제의 부탁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에야 대부분이 중층으로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채우지 못해 대부분 하층에 머무르겠지만, 그것도 중층과 연결된 이상 오래지 않아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할 거다.
“나는 자네를 믿었지. 티드린드와 헬모사에서는 무법자들이 없다시피 했고, 그 원인이 자네 덕분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잘할 것이라 믿었고 일을 맡겼던 것이지. 그런데 이번 일 처리는 솔직히 실망일세.”
황제는 나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의 몸에서는 무형의 기세가 발출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준이 높은 전사나 마법사가 뿜어내는 것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국가의 지도자로서, 황제로서 보이는 위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향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법자, 카르텔 조직원들이라고 했던가? 대부분을 정리한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곳은 다른 하층과 완전히 다르더군. 완전히 그들의 소굴이고 완전히 무법자들에게 물든 곳이었어. 마음은 아프지만 그런 장소를 함부로 개방할 수는 없네. 자네라면 내가, 아니 제국이 현재 그곳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수많은 귀족들이 항의를 할 테고 백성들이 황실을 불신하겠지.”
황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미국 시민이라 말했던 최초로 탈출해온 그들이라면, 그래 조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보네. 하지만 페소타 내부에 있던 그들 중 일부라도 무법자로 돌변한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야. 어쩌자고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했는가?”
현재 제국은 무법자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고 무법자들에 대한 인상은 최악이었다.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고 했었습니다. 그게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확실히 현재 제국과 무법자들의 상황을 본다면 심정이 어떻든 현실적으로 그게 좋은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입가가 비틀린다.
“그래. 그대가 그걸 모를 리 없지.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정도로 프레드라는 이가 대단한 이인가?”
이미 보고가 들어간 상황이었다. 하기야 황제의 귀에 이런 이야기가 안 들어갈 리 없었다. 알게 모르게 관찰을 당했을 거고, 내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이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내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층에 갈 때도 황제 휘하의 제국군을 데려오거나 심문에 라프라소를 대동하는 등 정보가 들어갈 길은 많았다.
“그가 우수한 인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꼭 프레드나 저에게 도움이 되기에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가 계속 말하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폐하와 제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나와 제국이라… 무법자들이 더 늘어날 수 있는 환경에 황실의 신뢰성이 훼손될 상황을 만든 것이 도움이 된다고?”
반문하는 황제의 눈은 무척 차가웠다. 만약 말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이유를 듣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만나지도 못했을지도.’
그나마 해둔 것과 위치가 있으니 일행이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던 것일 터다. 지금 독대도 사실상 그들을 모조리 내게 넘기고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더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사람이 나이니 들어보겠다는 것이지 아마 상당히 보수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거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준비한 것의 가치는 아무리 황제라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할 거니까.
“무법자들을 포섭해 황실의 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걸 또 하란 말인가?”
제국이 무법자들을 포섭하려고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무법자고 범죄자 놈들이라고 해도 고쳐 쓸만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층까지야 보통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경우가 많아서 가이드라인도 없이 폭주하기 일쑤였다. 그건 중층에 도착한 초기에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제국의 눈 밖에 나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제국의 힘을 제대로 느낀 결과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다. 게다가 제국은 애초에 신분제 사회이기에 어떤 의미로는 지구 보다 지켜야 할 선이 적고 능력만 되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범위도 넓기에 다시금 제국의 아래에 들어가고자 하는 무법자들도 존재하기는 했다. 초기에 폭주한 것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을 거다.
실제로 1회차에서는 전향에 성공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대우가 좋지 못해 사실을 숨기는 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러나 2회차는 달랐다.
그간 회유나 전향을 시도한 무법자와 그걸 받아들인 세력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모조리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게, 1회차보다 무법자들이 더욱 심하게 기승을 부렸고 이미지도 최악 중의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전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무섭게 배척과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한 번 찍힌 무법자라는 낙인은, 전향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해져 혐오감만을 불러일으켰을 뿐.
그만큼 감정이 최악이었고 끔찍한 대우를 받자 무법자들이 제국의 전향 요청을 묵살, 도리어 아예 재전향함으로써 다시 무법자가 되어버리는 이들까지 존재했다.
우습게도 배신자에 대한 처분이 심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법자들은 재전향한 이들을 잘 대우해줬고, 그 이후로 제국에 전향하는 무법자 따위는 없었다.
그 실패의 과정을 아는 황제는 전향에 대해 말하는 내 말에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황제조차 무법자들이 전향 가능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일일이 신성 계약서를 사용해 제한을 걸기에는 손해가 막심하지. 그렇게까지 해서 받아들일 만큼 대단한 전력도 못 되고. 애초에 믿을 수도 없는 이들을 어떻게 믿고 쓰라는 말인가?”
숫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전향에 성공한 무법자가 있는데도 말씀이십니까?”
“…전향에 성공한 무법자가 있다고?”
잠시 그 말을 생각하던 황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설마… 무법자의 전향을 받아줬다는 말인가? 그것은 제국 전체에 금지된 일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성공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시도조차 제국의 법에 어긋난다. 황제가 직접 금했고 수많은 귀족들도 동의했다. 무법자들은, 고쳐 쓸 수도 없고 그 시도만으로도 해가 된다고.
“금지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애초에, 그 무법자가 전향에 성공한 것은 몇 년 된 일입니다.”
내 말에 황제가 분노를 가라앉혔다.
저 모습을 보면 의도된 분노 같았다. 무법자가 전향에 성공했다는 사실보다 무법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법을 우선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전향을 시도한 무법자들은 분명 있습니다. 실패하기는 했으나 무법자들도 제국의 품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는 분명 있다는 뜻입니다.”
“그건 인정하지. 허나 그들은 스스로 기회를 버렸어. 제국은 그런 이들이 전혀 아쉽지 않다.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지. 자업자득이다. 그들은 제국에 너무 많은 해를 끼쳤고 나와 제국은 현재 무법자들을 배척한다.”
받아들여 본 결과 역효과가 더 크다. 그렇기에 황제도 아예 전향 자체를 고려하지 않게 된 것. 게다가 기껏 받아주었더니 재전향을 해 버렸다. 황제가 무법자들을 싫어할 만하다.
“그들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고, 인식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무법자는 믿을 수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황제는 딱 잘라 말했다.
“처음 했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무법자들을 포섭해 황실의 개로 만들어 줄 수 있다.
그 말을 떠올린 황제가 나를 유심히 살폈다.
무릇 개라 함은 충성심이 기본 아닌가? 게다가 황실의 개라고 했다.
“그들이 황실에 충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완강히 거부하던 황제이나 계속되는 내 말에 한 번쯤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수련자들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을 이루겠다는 황제의 꿈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법자들은 날뛰고, 반 이상 차지했어야 할 하층은 반도 차지하지 못했다.
영국은 사실상 나에게 넘어왔다. 나와 협력 관계를 이루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황제 쪽에 받아들였다고 해도 좋겠지만, 나와 황제의 관계는 황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내가 교단과 친해지는 데다가 상상 이상으로 성장이 빨랐으며 뭐하나 황실에게 종속되는 것이 없었다. 황제 휘하라기보다는 거의 협력자에 가까운 관계. 황제로서는 조금 불만스러운 점이 있을만했다. 황제가 생각하는 협력 관계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독일과 프랑스가 열렸을 때 내 개입을 막았다. 허나 성과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무법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 거기에다가 차례로 개방된 하층을 차례로 차지하지 못했다.
중국은 대공에게, 일본은 공작에게 빼앗겼으며 브라질은 여러 귀족들의 지원을 쏙 뽑아먹고는 뿔뿔이 흩어져 무법자들과 동조해버렸다.
무법자들은 날뛰고 힘의 균형은 어지러워졌다. 홀로 모든 귀족을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이대로 간다면 중앙집권의 꿈은 포기해야만 한다.
현실이 여의치 않아 결국 미국과 멕시코가 개방되었을 때 인력 문제 때문에 결국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거래가 계속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현재 내 성장 속도를 본 이상 내가 중층을 떠나기 전에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일 지경이다.
내가 떠나면 균형추는 오히려 저쪽에 넘어가 버린다.
황제로서는 당연히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위험하다.
그런 상황에 내가 달콤한 제안을 하는 거다. 나는 이번 사건을 제외하면 나는 황제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 더더욱 끌릴 만할 터.
물론 나는 이번에도 황제를 실망시킬 생각 따위는 없다. 황제만한 파트너는 중층에 없었다. 이번 제안은 나에게도 황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황제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그도 끌리는 거다. 공식적으로는 배척할지언정 그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이 늘어나는 것을 거절할 턱이 없었다.
“무법자들도 자신들이 결국 패배할 거라는 사실을 알기는 할 겁니다. 단지, 언제까지 버티고 살아남느냐가 문제일 뿐이죠.”
무법자들은 자신들의 성장에 따라 결국에는 국가 전복도 가능하다고 꿈꿨을지 모른다. 허나 제국이 그들을 진짜로 적대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얕보던 거주민들의 힘은 그들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성장은 어느 순간 막힌다. 진짜 능력이 되고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벽이 있다. 일반적으로 레벨 70 정도가 1차 벽이지만 과거의 남은주마냥 잠재력이 하쯤 되면 훨씬 빨리 벽이 등장할 거다.
괜히 전향하려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현 제국 상황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결국 오늘만 사는 선택을 해 버렸지만.
1회차 시절 무법자가 아닌 정당하게 성장한 수련자들의 길드와 랭커들이 등장해도 끝끝내 우위를 지켰던 것은 거주민들이 주축이 된 제국이다. 무법자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본인들 욕구에 미쳐 저지르고 나니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다.
“충성을 받아내려면 역시 먹이를 줘야겠죠. 무법자들이 원하는 것은 대귀족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설령 원한다고 해도 그게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교육을 시켜야겠죠.”
“당연한 소리를. 무법자 따위가 상층부로 올라오게 둘 수는 없네.”
“하지만 희망은 줘야죠. 충성하면 대가를 얻는다.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요. 그 희망을 받을만한 괜찮은 놈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네가 포섭했다는 그자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는 절대로 배신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하지?”
“무법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가 자살할만한 놈은 아닙니다.”
광진. 이중 스파이라는 거짓으로 성공적인 전향을 한 이다. 그는 내 길드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감시를 받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길드원은 그가 진짜 무법자였다는 것을 모른다. 어디까지나 지시로 인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알고 있겠지. 그는 나름 감시를 당하기는 했으나 편한 생활과 이중스파이 행위로 인해 무법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명예를 누렸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길드 내에서 나쁘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 목줄을 쥔 내가 알게 모르게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니까. 허나 그뿐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만나는 여자도 제법 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해 주는 이들과 살아왔으며 목숨의 위협이나 천대받는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무법자 시절과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한 삶이다. 나는 광진이 그런 삶에 빠지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근간을, 나는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광진이 그냥 순수 무법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의 지금 생활은 끝이다. 물질적 풍요도, 보장된 안정도, 그간 받았던 인정도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버릴 거다.
지금의 광진은, 그럼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나는 광진을 얻은 과정과 그의 목줄을 틀어쥔 상황을 황제에게 숨김없이 밝혔다.
“호오… 확실히… 그런 상황이라면 이제 배신하기는 힘들겠군.”
무법자들이 어떤 꼴인지 생생하게 아는 광진이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고 미래도 없는 무법자의 삶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할 수도 없는 허튼짓만 하지 않고 주는 것만 잘 받아먹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이 알아버린 이상 내게 반항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사라졌다. 격차도 심각하니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굳이 현대인이 아니더라도 행복하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고 제 욕망만 충족할 수 있다면 반항할 이유가 없다. 극소수의 야망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그런 이들은 튀어나오는 순간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무법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그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희망과 가능성을 던져주고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발버둥치도록 저들끼리 경쟁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천천히 길들인다면 그들은 황실의 개를 자처할 겁니다.”
“흠….”
어려운 생각은 아니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나 나는 가능하게 만들 키 카드를 갖고 있었다.
광진. 이 카드가 없다면 아무리 나라도 황제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무법자들을 방치한 이유도 이거지.’
내가 필사적으로 황제에게 무법자들의 위험성을 알리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광진이라는 정말 희귀한 카드를, 아주 좋은 타이밍에 팔아먹으면 받을 수 없는 것도 받을 수 있다. 본래 상대의 사정이 좋지 않으면 본래라면 팔 수 없는 것도 파는 법이다.
“전향을 유도할 무법자들에게는 광진이 실제로 성공적인 전향을, 그것도 신분을 성공적으로 세탁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들도 끌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광진이 과거 진짜 무법자였다. 그 사실이 소문날지언정 겉으로는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광진은 황실의 철저한 보호와 비호를 받을 거다. 동시에 이제까지보다 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속은 엄청나게 불편해지겠지만.’
알 만한 이들은 대부분 알게 되겠지. 수많은 위협이 찾아올 거다. 물론 이전의 전향했던 무법자들과 광진의 차이점은 있다.
바로 내 길드 소속이었다는 것. 나와 주하연은 머지않은 미래에 성자, 성녀로 알려질 거고, 현재 내 길드의 명성도 무척이나 높은 편이다. 그런 길드 소속이었던 이의 과거가 무법자라고? 한동안 혼란이 이어질 거다. 한동안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물론 그래도 위협 자체는 생기기 시작할 거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간 편히 쉬었으면 이제 일을 해야지.
“특히 제국의 현실을 알게 된다면 페소타의 생존자들은 더욱 필사적일 겁니다. 무법자 취급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된다면 필사적으로 아님을 증명하려 할 테고, 실제 무법자였다면 더더욱 새 신분을 얻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죠. 광진이 사실 과거 무법자였다는 소문을 은밀히 흘리면 효과가 괜찮을 겁니다. 제국의 힘을 보여 저쪽에 붙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무법자들과 싸워 공을 세우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광진을 통해 보여주면 됩니다.”
간단한 당근과 채찍이다. 광진을 광대로 만들어 황제의 개를 늘린다.
“또한 붙잡은 무법자들을 저들에게 노예로 내린다면 저들의 욕망 또한 충족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이쪽으로 전향한다고 한들 모든 무법자들이 한 번 빠졌던 폭력성을 버릴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붙잡은 무법자들을 처형하는 대신 일부를 노예로 넘김으로써 해결이 가능할 거다.
본래 노예를 어떻게 대하던 그것은 주인의 마음이다. 허나 제국에서 실제로 그렇게 했다간 좋은 취급은 못 받는다. 노예는 비싼 재산이고 재산을 함부로 대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허나 그 노예의 예전 신분이 무법자였다면 현재 제국의 정서상 어떤 취급을 하더라도 소유자가 머저리 취급을 당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부족한 점은 전장에 내보냄으로써 해결하면 그만.’
어차피 그들이 충성을 증명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전투에 참여하고 거기서 폭력성을 마음껏 노출하라 그래라. 본인이 죽을 가능성이야 원래 무법자일 때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을 거다.
그럼에도 또 아군이나 거주민들에게 함부로 손을 댄다면 당연히 처형이고.
내 말에 황제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건 최고의 상황일 뿐 당연히 이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무법자들이 그간 보여온 모습이 상상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도 애초부터 무법자들을 분별해 달라고 나에게 페소타를 떠넘겼던 거다.
“…확실히 그대로만 된다면 최고의 시나리오군.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말이야. 아마 제국민들의 반발이 보통이 아닐 터.”
“그래도 해볼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성공한다면 폐하의 휘하에 하층 하나, 그 이상의 전력이 생기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충성과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법자들과 싸운다면 반발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애초부터 받아들일 때 편성부터 완전히 따로 하고 이 팀원들은 전원 무법자들로 의심되는 이들이라는 소문을 흘리면 된다. 제국민들의 반발과 위협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올 거고 더더욱 필사적으로 충성하도록 만들 수 있다.
죽어 나가며 무법자들과 싸우는 모습을 홍보한다면 그들을 무법자들과 분리할 수 있을 거다.
그 뒤는 일사천리다. 무법자들 사이에서도 성공적으로 제국에 전향한 진짜 예시가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거니, 엄청나게 끌릴 거다.
내 설명에 황제가 중얼거린다.
“확실히… 광진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페소타는 내 휘하에 넣을 수 있겠군.”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제국민의 반발을 막을 방법 정도는 금방 생각했을 거다. 사실, 내가 할 일은 광진을 이용해 황제를 설득만 하면 되었다.
황제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으니, 저런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성공했다고 봐도 된다.
본래라면 페소타의 인원들을 황실 휘하에 넣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을 바꿨다. 도리어 포기했던 무법자들의 전향과 그들을 황실의 개로 만들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된다.
게다가 그들은 나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도 않는다. 황제도 이제는 안다. 그간 보여왔던 수련자들 중 내가, 그리고 내 휘하의 인원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그들을 제외한 수련자들의 성장 속도도 엄청나기는 하다만, 나처럼 상식이 붕괴되는 수준은 아니다.
나와 내 일행 같은 경우는 정말 극소수다. 저들은 정말 오래, 운이 좋다면 수십 년은 써먹을 수 있는 황실의 힘이 되어 줄 거다.
“그래. 확실히 그대의 제안은 한번 해 볼 만하군.”
황제의 인정에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번 페소타 쪽의 일 처리를 그렇게 한 이유를 알겠어.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군.”
“과찬이십니다.”
“그럼 마지막 일이 남았군. 그게 가능하려면 광진이 필요하지. 광진이 없다면 페소타의 인원들조차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 말이야.”
광진이 없다면 시작부터 힘들다. 과거 무법자였다는 과거를 흘리고 동시에 가이아 소속이었다는 말을 흘려 혼란을 주며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그래야 페소타 지역 출신의 수련자들이 인식을 바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계적인 과정이 이어질 거다.
페소타 쪽 피해자들과 섞여 있을 무법자들. 그리고 피해자들이 제국에 알려진 무법자들의 이미지를 알고 공포에 떨며, 무법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을 준 뒤 광진의 과거를 은밀히 흘려 희망을 준다.
그리고 그들이 무법자들과 싸우며 필사적으로 결백을 증명하고 광진이 누리는 것을 보며 황실에 대한 충성을 기른다.
그들도 금방 알 거다. 황실 말고는 그들을 받아줄 곳이 없다는 것을. 필사적인 충성경쟁이 시작될 거고, 그들이 무법자들과 싸워 이름을 알릴 때 그들이 무법자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을 은밀히 흘리면 된다.
아마 열심히 부정할 거다. 대부분은 실제 피해자니까. 오히려 화를 내겠지. 하지만 소문을 막지는 못한다.
더더욱 필사적이 될 거고 무법자들도 혹하기 시작하겠지. 광진 하나만 해도 혹할 텐데, 거기에 저 집단 자체가 무법자들이 전향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멀쩡히 대우받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광진을 사지. 무엇을 원하나?”
나는 황제의 말에 입술을 핥았다.
이건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황제라도 절대 주지 않으려 할 거다.
당연하다. 지금 나와의 관계만 해도 충분히 불만스러울 텐데, 이것까지 내주면 황제는 나를 통제할 수단 대부분을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한 뒤 어렵게 말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백작의 작위와 독립작전권을 원합니다.”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