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주하연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저도 솔직히 그 사람 최근 행동이 별로기는 했으니까요.”
질척대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 한다. 남은주를 이용해먹으려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고.
남은주와 애인 관계라는 소문이 나면 편하기는 하다. 아무리 지인을 이용한다 어쩐다 해도 길드장의 애인이 타 길드나 세력으로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소문 정도만 나도 문제는 해결이다. 무시하고 접근한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징벌하면 그만이다. 상대가 크면 황제와의 협력을 통해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지. 이런 일이라면 황제는 아주 환영할 거다.
그러다 만약 진짜로 애인이 된다면?
‘진짜 그렇게 되어도 상관은 없고.’
어차피 파티 내에서 2명이랑 사귀는 상황인데 이제 와서 무슨.
이런 상황에서도 페소타 지역의 청소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덧 페소타 지역의 사냥터와 마을은 사실상 청소가 끝났고 마지막 도시만이 남은 상태였다. 정확히는 마을 대부분이 성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저희들이 습격을 한다는 소문이 퍼진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만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에 뭉쳐서 싸울 속셈인 것 같았어요.”
하유진이 가져온 정보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놓친 인원은 없었지만 사냥을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끊긴 마을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
우리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최대한 끌어모은 것이었다.
현재 페소타의 성에는 엄청난 수의 인원이 밀집된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 봐야 나 혼자서도 쓸어버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야, 골치 아프겠네.”
“확실히… 하나도 안 죽이려면 골치가 아프기는 하겠네.”
“뭐, 필요하면 몇 죽여도 상관없겠지. 수뇌부만 살리면 되지 않을까?”
사샤가 고개를 돌려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리더님아가 받아들인 거니 우리는 따라야지.”
킬킬거리며 웃는 사샤. 귀여운 얼굴로 하는 말치고는 내용이 살벌하다.
허락도 받았겠다, 빨리 처리하고 쉬자는 사샤의 말에 일행이 웃음을 터뜨린다.
거절은 없었다. 일행도 지겨운 일은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후에 있을 보상이 빵빵하기도 하니까.
동시에 일행들이 흘낏 남은주를 살핀다. 그들도 최근 남은주가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주하연의 보고에서 이성훈이 남은주에게 많이 의지한다는, 속된 말로 집착 내지는 질척거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바로 곁에서 보지 않는다고 해도 일행들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괜히 하유진이 슬쩍 이대로 내버려둬도 되냐고 물어온 것이 아니었다.
남은주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내게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는 어필을 해온 것.
“은주 누나와 친하니 죽이지는 않을게요. 그냥 겁만 조금 줘서….”
물론 막았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두말없이 물러났다.
도적 길드에서 참 좋은 것들을 배워온 모양이다.
쓸모있는 기술은 또 어떻게 그리 잘 알아가지고.
카르텔 집단이 모조리 몰려있다는 성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하. 진짜 쓰레기들을 많이 봤지만 저것들은….”
“…격이 다르네.”
사샤의 말에 나연이 말을 잇는다. 나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성벽 위에는 아무리 봐도 피해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제대로 장비도 없이 성벽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무기조차 웬 나무를 깎아 만든 목창이었다. 아무리 하층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수준의 무기다.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있었고 성벽 위에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어이! 프레드!”
성벽 위, 누군가가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고함을 질렀다.
“역시 네놈이었나! 하기야 네놈 말고 누가 또 있을까! 네놈 약혼녀가 여기 있다! 함부로 덤빌 생각은 마! 당장 병력을 뒤로 물려!”
“…애나!”
하기야 하층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프레드와 그 일행들뿐이었으니 습격해 올 만한 이들이라면 프레드가 데려올 사람 말고는 없었다. 어쩔줄 몰라하는 프레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놈이 카를로스입니까?”
“맞, 맞습니다. 그것보다 신후 님, 애, 애나를, 제 약혼녀 좀 살려주십시오!”
하필이면 도시에 있었다. 카르텔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프레드를 버렸던 사람. 정확히 어디에 있을 줄 몰랐던 프레드의 약혼녀가 카르텔의 동료가 아닌 인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마 애매한 위치였을 거다. 카르텔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시점에 투항했고, 그나마 프레드가 탈출하기 전에는 프레드의 목줄 역할이라도 있었지, 프레드 탈출 이후에는 이용 가치가 없다시피 했을 거다.
그러니 취급이 저따위지. 그놈의 형제를 부르짖던 놈들은 어디 갔나 싶었다.
‘못 찾았을 때부터 이리될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남은주 쪽에 신경이 몽땅 가 있어서 조금 소홀했다.
그리고 솔직히 잡혀 있어도 방법은 있었고.
“유진아.”
“네. 형. 약혼녀 안전만 확보하면 되는 건가요?”
나는 프레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약혼녀를 최우선으로 두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더 다칠 수는 있지만….”
“…….”
프레드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일단은 저 여자부터 확보하도록 해. 내가 조금 도와줄게.”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하유진이 저들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허공으로 녹아든다.
뛰어난 은신술이다. 이 자리에서 하유진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나서윤 정도다. 그나마 내 파티원들은 근접하면 인식할 수 있겠지만 현재 성벽에 접근하는 하유진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할 거다.
“으음….”
아니 정정이다. 한바다가 유사하게 찾아내고 있었다.
‘멀지 않았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괜히 길드 내에서 3번째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 중 가장 지원을 못 받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하다. 하기야 재능도 최상에 가까운 상급이었고 나연처럼 정체기도 없었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주하연과 남은주도 근접하게 따라가고 있으니 부족한 것은 아니다만.
“네놈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나머지 인원은 뒤로 물려라! 협상은 그때부터….”
말이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다. 설마 저걸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유진이 은밀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나는 천천히 성벽을 향해 접근했다.
그런 내 모습에 카를로스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 뭐냐! 당장 물러서!”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에 무기가 없는 것을 본 카를로스가 잠시 방심한다. 인벤토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 태도가 무방비라는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니까.
“겁도 없는 놈이군. 이봐! 저놈에게 화살이라도 선물… 컥!”
내가 접근하며 틈을 보인 사이 완전히 옆까지 접근한 하유진이 목울대를 향해 단검의 손잡이를 처박아 버렸고, 카를로스는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움켜쥐었다.
그사이 하유진이 풀려난 프레드의 약혼녀를 붙잡고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형!”
그리고는 곧바로 나를 향해 집어 던진다.
당황한 나머지 다른 카르텔 조직원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고 프레드의 약혼녀는 무사히 성벽 밖을 비행했다.
나는 순식간에 마력을 활성화,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그녀가 떨어질 위치로 달려들었다.
“쏴…!”
뒤늦게 카를로스가 활을 쏘라 지시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순식간에 약혼녀, 애나를 붙잡고 즉시 자리를 이탈했다.
퍽! 퍽!
바닥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 늦은 반응이다. 떨어질 위치에 대고 미리 공격했다면 모를까 저렇게 뒤늦게 쏴 봐야 늦을 대로 늦은 상황이다. 물론 미리 공격을 했다고 해도 당할 내가 아니었지만.
하유진은 이쪽으로 시선이 돌아간 그 짧은 순간 그새 세계 동화 스킬을 통해 자신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카르텔 쪽은 순식간에 목표를 잃어버렸다.
나는 프레드에게 약혼녀를 안전하게 건네주었다.
애나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프, 레드?”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될 줄은 몰랐는지 프레드의 얼굴에 한줄기 동요가 느껴졌다. 하지만 제품에 돌아온 애나를 보고는 연신 감사를 표해왔다. 어찌 되었든 그가 원했던 목표는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프레드의 감사 인사에 고개만 끄덕여주고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내가 검을 꺼내 들자 주하연이 다가와 물었다.
“직접 나서실 셈이에요?”
“그럴 생각입니다.”
“피해가 꽤나 생길 것 같은데….”
“성문만 부숴도 알아서 무너질 겁니다.”
힘의 차이. 그걸 보여줄 셈이었다. 이번 일에서 크게 한 것도 없으니 이번에는 조금 거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허무하게 인질을 빼앗겨버린 카를로스가 광분하고 있었다.
주변의 조직원들을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인다.
솔직히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이딴 환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프레드가 저놈이 우두머리라고 확인까지 한 마당에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주하연은 나를 향해 성녀의 축복을 걸어주었고 능력치가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거 없어도 충분합니다만?”
“잘 다녀오라는 인사 대신이라고 해 두죠.”
피식.
아무래도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남은주를 내 수호 기사로 데려오겠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금세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주는 것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탑에서의 이성 관계가 자유롭고 능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는 하지만, 20년을 넘게 지구에서, 그것도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사람의 기억과 감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도 흔한 투정 하나 부리지 않는다. 적응력과 절제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여유롭게 성벽 쪽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조직원들을 두들겨 패던 카를로스가 분노하며 나를 가리킨다.
“쏴버려! 죽여버려라! 어차피 인질이 있는 한 함부로…!”
검에 마력을 쏟아붓는다. 축복 덕분에 증폭된 능력치. 거기에 마력으로 근력을 한 번 더 강화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힘이 전신에서 느껴진다. 나는 즉시 폭발적인 속도로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에 카르텔 조직원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인다.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
핑- 핑-.
이내 반사적으로 화살을 쏘아낸 이들이 몇 있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내 속도를 쫓지 못한 화살이 내 한참 뒤쪽에 박혀버린다. 성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나는 한순간에 성벽에 도착했고 그와 동시에 검강이 솟아오른 검을 있는 힘껏 성벽을 향해 찔러 넣었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과 함께 성문이 파쇄된다. 동시에 남은 충격이 성벽을 울렸다.
성벽 전체가, 옅게 진동한다. 미세하지만 분명 성벽 위의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이었다.
눈앞에 부서진 성벽이 보인다. 그 뒤로 여러 인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최대한 성벽에 충격이 가도록 손을 썼기에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일부가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어있었고,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보이는 내 모습에 턱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마력을 크게 개방하고 곧바로 워 크라이를 사용했다.
일대를 울리는 내 외침에 파괴된 성문 앞이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괴, 괴, 괴물이다! 도망, 도망쳐!”
“으아아아악!”
성문을 부수기 위해서는 공성 병기가 와야 하는데 인간이 검 하나 들고는 성문을, 그것도 일격에 부숴버렸다.
아무리 성이 큰 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벽의 높이가 5m가 넘는다. 그런 성의 성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상식을 벗어난 무력에 형제니 인질이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카를로스마저 친위대를 소집해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걸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성 내부를 휘저으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기절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방향을 카를로스가 있는 쪽으로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죽이지는 않는다. 내 실력으로 실수할 리는 없었다.
“컥!”
“항, 항복하겠습니다. 살려주…!”
“꺼져! 저리 꺼지라고 이 괴물아!”
“저는 적이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항하고 도망치며 살려달라 외치는 피해자든 항복해오는 조직원이든 가리지 않고 기절시켰다.
그들은 내가 다가가는 족족 사람들이 쓰러지자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으로 착각해 비명을 지르며 최대한 나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기를 썼다.
대부분 피가 나지 않았지만, 저들이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카를로스 쪽을 향했다.
접근 속도를 빠르게 하지는 않았다. 느리되, 절대 놓치지 않는 속도를 유지했다. 카를로스를 비롯한 친위대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고, 일부 친위대들은 내가 카를로스를 쫓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래 봐야 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하겠지만.
카를로스는 겁에 질려 어떻게든 성을 빠져나가려고 기를 썼지만, 성 외부로 통하는 문들은 내 일행들이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하층이기는 하나 수련자인 만큼 5m 정도의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뛰어내려 도망치려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 시도들 또한 의미는 없었다.
“사샤.”
“엉.”
사샤가 성벽 위쪽을 날아다니며 위로 올라오는 곳을 무너뜨려 버리고 뛰어내리려는 이들을 빠르게 제압해 나갔다. 하유진 또한 그런 사샤에게 협력해 성벽 위쪽의 탈출 또한 막아버렸다.
그나마 빠르게 뛰어내리는 것에 성공한 이들도 있었지만, 성 밖에는 우리를 따라 지원 온 일부 병력과 이제껏 우리에게 보호되어온 피해자들도 다수 있었기에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 인원은 전무했다.
성벽을 완전한 감옥으로 만들고 내부를 청소해나갔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성이 함락된다. 성 내부가 심각하게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에 죽은 인원들이 제법 나왔지만, 카를로스를 비롯한 친위대원들을 전원 산 채로 확보했기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주로 도망치며 길을 막는다고 저들끼리 죽이거나 도망치는 과정에서 짓밟혀 죽은 이들도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수고랄 것도 없었다.
프레드를 향해 다가가자 그는 나를 향해 고개부터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모든 것들을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걸로 계약은 이행된 겁니까?”
“물론입니다, 길드장 님. 앞으로 가이아 길드에 뼈를 묻겠습니다.”
“환영하죠.”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슬쩍 그의 약혼녀를 바라보자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카를로스를 비롯한 카르텔 조직원들에게 맞은 흔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프레드와 이야기를 하며 상당히 많이 운 모양이었다. 대충 봐서는 내게 말했던대로 배신을 용서한 모양이다.
어차피 프레드가 책임질 사람이니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무법자에게 붙었다는 사실은 숨겨 주는 것이 좋겠지.
‘어차피 마지막에 인질이 되었으니 미담으로 꾸미면 되려나?’
프레드를 탈출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프레드가 영입되었고 카르텔의 조직원들을 대강이나마 분류했다. 물론 100퍼센트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아마 상당수가 피해자로 위장해 숨어있거나 조직원이 아니었더라도 카르텔에 협력하고 동조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긴 채 피해자인 척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러나 그걸 내가 일일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혹여 저희 길드에 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일부는 받아들이죠.”
계약의 일부다.
프레드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물론 다수는 안 된다. 소수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애초에 프레드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수뇌부의 처리, 카르텔 조직원들에 대한 징치, 살아남은 거주민들과 피해자들의 처우 등은 프레드와 리프라소가 마무리를 할 예정이었다. 프레드는 이후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카를로스를 비롯한 조직원들에게 다가가는 프레드의 모습은 반쯤 광기에 차 있었다. 그 비틀린 웃음에 저들이 겁을 먹었을 정도였으니까. 비록 이번 회차에서 약혼녀를 잃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한차례 조직원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해도 한참 부족할 터였다.
카를로스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애타게 프레드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구했지만 프레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수많은 피해자들과 거주민들 또한 복수가 자유로움을 깨닫고는 대열에 동참했으며 내가 떠나기 전의 페소타 지역은 피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 한동안 페소타 지역의 광기가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허나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이쪽의 일이 일단락되었음을 확인한 후 나는 일행들과 함께 황제가 있을 황도로 향했다.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잠시 티드린드에 연락해 사람 한 명을 황도로 불러들인 뒤 곧바로 황제에게 독대를 신청했다.
본래라면 며칠 전에 신청해야 하지만 신청자가 특별 취급을 받는 나이기도 했고, 황제의 요청을 막 처리하고 돌아온 덕분에 금세 황제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황제는 독대를 허가하며 동시에 시종을 통해 말을 전해왔다.
-페소타 지역의 일은 리프라소를 통해 중간중간 보고를 받았고 막 최종 보고까지 받았다. 그대들이 의뢰를 완수했음을 인정한다. 고로, 일행의 황실 창고 입장을 허가한다.
“일 처리 진짜 빠르네….”
“…그래도 조금 이상하기는 하네요. 분명 불만이 있을 텐데….”
“처리한 게 신후 님이니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일행의 걱정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건은 제가 잘 마무리 할 테니 창고에서 좋은 아이템이나 골라들 오시기 바랍니다. 생각 정도는 하셨겠죠?”
일행은 하나같이 기대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인원들은 여전히 내게 걱정스럽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내가 손을 내젓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내가 이전에 받았던 것처럼 입장을 위한 패를 지급 받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했다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다.
경우에 따라서는 2~3일 걸릴 수도 있었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나는 곧바로 시종장에게 안내되어 황제가 기다리는 장소로 향했다.
안내된 장소로 들어가자 황제가 홀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가? 무척이나 빨리 끝냈다고 생각하네만?”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황제의 말투에서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기색을 눈치챘다.
“제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내 말에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는 돌려 말할 필요가 없긴 하지. 그렇네.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망했다네.”
실망했다.
그 말에, 나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