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유진아, 오랜만이다.”
“드디어 완전체가 되었네?”
“이번에 암살자를 데려왔다고?”
한바다와 남은주, 주하연이 식당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익숙한 인사를 건네는 하유진은 셋과 가벼운 해후를 나누었다.
그러나 잡다한 이야기도 잠시, 어느새 길드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럼 도둑 길드를 나왔지만, 여전히 널 따르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네?”
“네. 암살자 교육 같은 거 받다 보니까 되게 쓸만한 게 많더라고요. 이런 거 익힌 사람들이 우리 길드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따라온다는 사람들도 다 받아들였어요.”
“잘했어. 안 그래도 길드 내에 도적 쪽 사람이 부족했는데….”
“에이, 뭘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바다 누나, 그 반지 뭐예요?”
“…전설급 아이템. 신후 님이 주셨어. 컨디션 조절에 도움이 되는 옵션이 많아서 항상 끼는 편이야.”
“최초로 신후 씨에게 반지를 받은 사람이지.”
흠흠.
내 가벼운 기침에 주하연이 피식 웃는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묘한 눈초리를 많이 받아서 주하연과 나서윤에게 활력 증진 옵션이 붙은 링을 맞춰서 선물해야만 했다.
그것도 내 것까지, 디자인을 맞춰서.
딱히 주지 않는다고 뭐라 하지는 않았겠지만 크게 힘든 것도 아니라 그냥 맞춰 주었다.
한참 식사를 하며 하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주하연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꺼냈다.
“신전 쪽이랑 황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뭐랍니까?”
“신전 쪽에서는 슬슬 성녀로 선언해도 될 수준인데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흐음… 뭐 슬슬 괜찮은 시기이기는 합니다.”
확실히 일행의 평균 레벨은 70대 도달했다. 첫 번째 고비에 도달한 셈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 정도로 실력이 상승했다는 뜻이다. 성녀로 발표해도 크게 말이 나오지 않을 수준의 실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다.
우리 세력도 만만하게 보며 건들 만큼 약하지는 않으니 이제는 발표해도 상관없기는 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럼 신후 오빠도 같이 성자 선언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
“…맞아.”
문제는 나까지 같이 발표한다는 것이 문제다. 기왕에 하는 거 신전 측에서는 최초의 성자인 나와, 그런 나와 연인관계이기도 한 주하연의 존재에 대해 동시에 발표하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고, 이전부터 꾸준히 요구해온 것이었다.
갓 소원성취를 한 나서윤이 조금 불만을 가졌지만 그런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성격이 아니었다. 나서윤이 문제시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수호 기사를 정해야 하잖아요. 저는 안 된다고 했다던데….”
그게 불만이었다. 성자나 성녀가 되면 전담 수호 기사가 붙는다. 주하연이야 남은주가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대신전 측에서도 막지 않을 거다. 그런데 내가 문제다.
“마탑 쪽 사람이라서 안된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름 그 시대 용사의 힘도 이어받았는데.”
“그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성기사의 지위를 받아야 하는데 마검사인 너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
주하연이 어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둘은 생각보다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주하연은 내게 다른 연인이 생길 수 있음을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고 나서윤이 내게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그녀가 새치기한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둘은 오래전부터 같이 행동해온 파티원이다. 서로의 입장도 있는 만큼 둘은 표면적으로 크게 마찰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을 테고.
되려 나서윤이 정식으로 연인이 됨으로써 둘이 되려 조금은 더 친근해진 느낌도 있었다.
“그럼 결국 교단 측에서 붙여준 사람을 써야 하는 건가요? 하지만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수련자도 아닌 사람이 저희 파티에 끼어들면 나중에 지구로 가면 곤란한데….”
“그래서 한바다 씨를 어떻게 명목상으로라도 집어 넣어보려고.”
“될까요? 신성력도 없고 그쪽 지식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대신 실력은 확실하니까. 교섭해 봐야지.”
“…뭐, 바다 언니라면….”
나서윤이 슬쩍 한바다를 바라본다.
이미 대충 언질을 받았던 듯 한바다는 그리 당황해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수호 기사라 함은 항시 붙어 다녀야 한다는 명목이 있는 만큼 한바다는 믿을 수 있고 이미 사실상 파티 단위로 붙어 다니는 만큼 그나마 나은 선택이기는 하다.
게다가 한바다는 나연과도 가까운 사이다. 그런 만큼 나서윤과도 생각보다 친하다.
“바다 언니라면 괜찮죠. 기왕이면 통과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쪽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만큼 가능은 할 거야.”
“황실에서는 뭐 때문에 연락이 왔답니까?”
“새로 하층이 또 개방되었다고, 가능하다면 도와달라네요.”
“이제 와서요?”
남은주가 미간을 찌푸린다.
“어지간하네. 이쪽에 처박을 때는 언제고.”
사샤 또한 조금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다.
나로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일부 인원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무법자들 때문에 지금 황실이 골치라… 게다가 이번에는 조금 특이한 상황이라서요.”
“특이한 상황이요?”
하유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독일이랑 프랑스 쪽처럼 두 국가가 한 번에 포함된 하층인가 봐요.”
“헤에. 독일이면 저희처럼 황실에 붙지 않았어요?”
“맞아. 프랑스는 애슐란 변경백에게 붙었어.”
중층의 상황은 1회차와 유사하면서도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애초에 헬모사 지역이 박살 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우리 쪽은 상당히 자생을 잘한 편이고 헬모사의 인원이 티드린드로 가버리는 바람에 여력이 남은 황실은 독일과 프랑스가 개방됨과 동시에 애슐란 백작가와 영입 전쟁을 펼쳤다.
과거에는 둘 모두를 품었던 애슐란 백작이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절반에 불과한 프랑스만을 갖는 것에 그쳐버렸고, 그 때문에 1회차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져 버렸다.
‘무법자들이 풀려났지.’
현재는 1회차보다 무법자들의 세력이 더 커져 버렸다.
황실과 애슐란 백작가가 무법자의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황실에 조언을 하기는 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한국과 영국의 무법자는 내가 처리했기에 황실은 1회차보다 무법자의 위험성을 더 늦게, 동시에 비교적 낮게 인지했고, 하나라도 더 인재를 빼먹고 싶었던 애슐란 백작가는 제3세력이었던 무법자들을 받아들이고 만다.
덕분에 무법자들이 더 빨리, 더 많이 커져 버렸다. 웃긴 것이 무법자들이 자신들의 포지션을 잘 정했다.
독일, 프랑스 쪽이 서로 싸워대는 것에 질린 중립 세력이라고 자신들을 포장했고 그게 먹혔으니까. 덕분에 독일 프랑스가 서로 싸우면서도 배척했던 무법자들을 애슐란 백작가가 비밀리에 받아들였고 사상 초유의 귀족가의 지원을 받는 무법자 집단이 탄생했다. 물론 그들의 본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원을 받는 사이 중층 적응을 끝낸 무법자들은 비밀리에 지하로 숨어들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고 애슐란 백작가가 그들의 위험성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무법자들이 단순히 신분제에 잘 적응하고 적당히 또라이 같은 놈들이면 모르겠는데, 현대의 법이라는 고삐가 풀려버린 무법자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거주민들을 막 대했고 그 정도가 아무리 신분제인 제국에서라도 용납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자제하는 듯 보였던 그들이지만, 그간 두 국가의 배척을 받았던 것은 보상이라도 받듯 납치, 학대, 고문, 살해 등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는 바람에 애슐란 백작령에서 발붙일 곳을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뒤늦게 애슐란 백작가가 그들을 쳐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쳤다.
결국 지원은 받을 대로 받고 사고는 사고대로 친 무법자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버렸고, 제국에 커다란 암 덩이가 생겨버렸다.
이런 사건을 통해 수련자들의 가능성을 눈치챈 다이딘 대공과 아르테인 공작가는 이어 나타난 중국과 일본을 각각 휘하에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1회차와 같은 순서였지만 조금 달랐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들 하층이 등장함과 동시에 지하에 스며든 무법자들이 각 하층의 무법자들을 모조리 흡수해 왔다는 것. 제국 입장에서 돌아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브라질이 결정타였다.
각 하층을 대표하는 집단과 리더가 있던 것과는 다르게 브라질은 춘추전국시대나 다름없었고 대부분이 쓰레기들 투성이었다. 본래라면 앞서 제국이 무법자의 위험성을 깨달아 이들을 제재했을 텐데 제국 내부의 무법자들 때문에 대응이 늦어졌고 브라질이 그대로 풀려나 버린 것.
제대로 수련자들과 접촉하지 못한 여러 귀족들에게 뿔뿔이 흩어져 지원을 빨아먹은 그들이 아예 전원 무법자들에게 동조해 버렸다.
덕분에 현재 제국 전역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에 따라 수련자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알아버린 제국은 공식적으로 하층이 개방되면 일단 격리를 기본 방침으로 잡았다. 브라질이 등장할 때 이미 적용되었어야 할 정책이었는데, 한발 늦어버렸다.
“근데 두 국가가 같이 포함된 거랑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게… 독일 프랑스처럼 비슷한 세력이 아니라 한쪽이 아예 밀렸거든.”
‘음?’
익숙하다. 무척이나 익숙한 이야기였다.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국가입니까?”
“미국과 멕시코요. 미국이 완전히 멕시코에게 밀렸다던데요? 미국 쪽에서 제국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자기들은 여력이 없다고 하네요. 제국 내부가 혼돈이라 그쪽에 인력을 투입하기가 꺼려진다고….”
미국과 멕시코.
‘드디어 열렸군.’
내가 기다리던 하층이다.
미국. 복수자 프레드.
미국 출신의 랭커.
그가 마침내 중층에 도착했다.
***
“미안.”
“아냐, 오빠.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황제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기 전, 나는 나서윤에게 가볍게 사과했다.
얼마 전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나서윤은 오래전 얻었던 아이템, 베갈타의 인정을 받는 것에 성공했다. 덕분에 큰 격노인 모랄타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얻었고, 나와 함께 퀘스트를 깨러 가기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실의 요청에 따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아직 황제에게 확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행에게는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미 말한 상태였다.
“다음번에 같이 가면 되지 뭘 그래, 오빠.”
“그래. 그때는 꼭 같이 갈 테니까.”
“응.”
짧은 대화가 끝난 이후 나는 홀로 황제를 만나기 입궁했고 곧바로 황제가 기다리는 장소로 안내를 받았다.
“오랜만이로군.”
“네.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황제는 이전과 다르게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확실히 고생을 좀 하는 모양이다.
“우선 그간 고생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군. 최근 오크들의 침공이 뜸하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그쪽도 포기한 듯했습니다.”
“다행이로군. 모두 그대와 그대의 길드 덕분이지. 그에 따른 포상이 따로 있을 거라네.”
“감사합니다.”
사실상의 임무 종료 선언.
가벼운 치하가 끝나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할 셈인가? 여전히 치열한 전쟁터를 찾아 수련을 할 셈인가?”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던전들도 찾아봐야 하고요.”
“음… 그런 것도 있다고는 들었지.”
“최근 수련자들에 대해 제국에 상당히 널리 퍼졌더군요.”
“…그놈의 무법자들 때문이지. 자네의 충고를 새겨들었어야 했어.”
황제는 무척이나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련자의 존재와 그들이 강해지는 방법이나 목표, 그들이 타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 등 여러 정보가 제국 전역에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무법자들의 짓이다.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 더 많은 귀족가와 접촉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제국에서 무법자들과의 접촉을 차단하려는 시도를 해 왔지만 수련자들의 존재와 가치를 알게 된 귀족가들이 비밀리에 접선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리될 것을 알면서도 황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리려면 존재도 알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법자를 제외한 모든 하층의 수련자들이 귀족가에 속한 것은 아니다. 주요 길드와 강자들 위주로 영입되었고 자유로이 움직이는 수련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급이 떨어지는 이들이다. 그들마저 감지덕지기는 하다만 그들이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귀족들이 더 욕심을 부렸고 무법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들과 비밀리에 접선하는 것이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 특히 귀족들의 욕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무력은 쓸 곳이 많았고 정 안되더라도 단기적으로 사용하고 버리면 그만이니까.
덕분에 제국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국의 꼴이 이렇다 보니 자네가 해 놓은 것들이 더 부각되더군. 자네의 출신인 티드린드나 자네 휘하에 들어간 헬모사 쪽은 무법자들이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쯧. 처음 홀루 지역이 열렸을 때 그대와 함께할 것을 그랬어. 그때의 선택이 후회될 줄이야….”
홀루 지역. 프랑스와 독일이 나온 지역이다.
“이제 와서 염치없다는 것은 아네. 하지만 도저히 부탁할 곳이 없더군. 그대도 들었겠지만 새로운 하층이 개방되었네. 도대체 뭐 이리 많은지… 그대 차원이 얼마나 위험한지 간접적으로 알겠더군.”
“…….”
“이번에 개방된 지역은 페소타 지역일세. 근데 이번에는 조금 특이한 상황이야. 홀루 지역처럼 완전히 다른 두 세력이 존재하지만 한쪽이 압도적인 상황이더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황실은 현재 그쪽으로 돌릴 인력이 부족하네. 그렇다고 다른 가문에게 일임하자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고….”
하층 하나를 장악한 귀족은 엄청난 힘을 손에 넣게 된다.
아무리 수련자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익숙한 병력 수천이 손에 들어오는 거다. 게다가 상당수는 B급 용병, 즉 기사급 힘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세가 약한 가문이라도 하층 하나의 전력, 그 반만 손에 넣어도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영지가 되니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 힘만 된다면 무법자고 뭐고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기를 쓸 테니 도저히 믿고 맡길 수가 없더군.”
그럴 거다.
“그에 반해 자네는 이미 전적이 있으니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지. 일부를 흡수해 덩치를 더 불려도 좋네. 부디 무법자가 더 늘어나지만 않게 해 줄 수 있겠나? 사례는 충분히 하지.”
황제는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지 상당히 저자세로 나왔다.
“대가를 듣고 싶군요.”
어떤 의미로 건방진 행동이지만 황제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나는 원하는 것들을 입에 담았고, 만만치 않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