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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66화 (166/317)

# 166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 오래 걸렸어야 할 전투를 빠르게 끝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카가가각!

내 공격을 느낀 건지 쿠니쿠는 급하게 강기를 뽑아내 내 공격을 막아냈다.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강기를 뽑아내 방어하는 기술. 뭐, 흔하게 호신강기라고 불렸던 기술이다.

문제는 효율이 좋지 못해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한다는 것. 몇 분 유지도 못 한다. 랭커가 되어도 상시 유지는 불가능하며 차라리 사제나 마법사에게 실드 마법을 받는 것이 나을 정도다.

대신 방어막의 소재가 강기인 만큼 호신강기의 방어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다. 중급 마법은 무난하게 막고 두께에 따라 상급 마법을 막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전사 계통이 급한 순간 쓸 수 있는 만능 방어막이라고 할까.

그리고 덕분에 내가 기습적으로 사용한 전설급 아이템, 이카로스의 꿈에 달린 옵션인 블링크를 이용한 기습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다.

‘쯧, 실수했네.’

정확히는 숙련도 부족이다.

완전한 마스터가 된 것은 2회차가 처음이고, 동급의 마스터와 싸우는 것은 이번이 고작 두 번째다.

게다가 전설급 아이템 이카로스의 꿈은 착용해 사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내가 옵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반응이 조금 늦었다. 상대를 흥분시켜 빈틈을 유도한 것은 좋았지만 그 틈을 이용했는데도 제대로 된 유효타가 되지 못했다.

과하게 마력을 소비시킨 만큼 이득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다시 만들 수 없는 기회인 만큼 어떤 의미로는 내 손해에 가까웠다.

블링크야 두번 더 사용할 수 있지만 이제는 써 봐야 즉시 대응이 가능하다. 마스터의 감각은 보통이 아니다. 방금 같은 짓을 했다간 오히려 근처로 이동하는 즉시 내가 이동할 공간을 찾아내 선제 공격을 해 버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블링크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할 때나 한 번 가능한 기회였는데 날려먹었다.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도 전체적인 우위는 변하지 않는다.

“크, 으… 이런 수를 숨겼, 었나.”

쿠니쿠는 이미 완전히 대비가 된 상황이었다. 이전의 과한 흥분이 가라앉은 상태. 아무래도 내가 눈을 돌린 것 부터가 계략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아쉽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확실히 만만한건 사실이지만 상대는 마스터. 이제는 대놓고 한눈 파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마 즉시 공격해 오겠지. 결국 제대로 싸워 이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다시금 검을 들어올렸다.

쿠니쿠는 이전과는 다르게 자세만 잡을 뿐 먼저 들어올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마력을 그리 낭비했으니 조심하긴 해야 하겠지.

그래도 그의 무기는 도끼다.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된 무기임에도 대놓고 수비 자세라니…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리 티 내야 하나 싶었다.

‘그냥 단순히 내가 또 이상한 수를 쓸까 봐 경계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이 없을까. 충분히 경계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크답지는 않다. 야성을 억누르고 싸울 모양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든 네임드 오크인 만큼 가능이야 하겠지만….

‘언제까지 버티려나.’

나는 상념을 멈추고 즉시 바닥을 박차며 거리를 좁혀들어갔다.

마력의 우위를 점한 만큼 검강의 크기를 키우고 신체 증폭에 사용되는 마력을 더 늘렸다.

효율이 떨어지지만 괜찮다. 남는 장사다.

내가 달려들자 대비하던 쿠니쿠는 타이밍에 맞춰 거대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무기가 도끼인 만큼 역시 단순한 방어보다는 이런 방식의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한 견제 형식의 방어가 더 적합하긴 할 거다. 무기의 크기가 큰 만큼 내 검보다 리치가 분명히 더 길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피하며 다시 거리를 좁혀들어갔고 쿠니쿠는 뒤로 물러나며 견제를 겸해 무기를 휘둘렀다.

아무리 견제라지만, 맞으면 위험하다. 대부분의 공격을 피해내고 정 안 되겠다 싶은 공격은 쳐내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차라리 검강의 길이를 늘린다면 편하기는 하지만 그런 방식의 전투는 되려 저쪽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거다. 무기 위에 검강을 덧씌우는 것이 아닌 무기 길이 이상의 강기를 장시간 뽑아냈다간 호신강기 이상의 마력 낭비가 일어난다.

잠깐잠깐 쓰는 것도 마력이 90을 넘겼기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되었을 뿐.

전투가 계속되자 이전처럼 내 검의 휘두름에 따라 매혹 효과가 발생했지만 역시 오크 답게 시야가 돌아감에도 야성을 이용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견제하고 있었다.

반쯤 억눌렀는데도 불구하고, 네임드급 오크 특유의 반응 속도 내 매혹이 의미 없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심지어 카바락과는 다르게 회피와 방어에 중점을 두며 접근을 원천 차단한 덕분인지 상처마저 낼 수 없었다.

돌아가는 타이밍에 맞춰 잠시 강기의 길이를 늘려 상처를 내기 위해 휘둘러 보았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쿠니쿠를 맞추지는 못했다.

‘역시 네임드인가.’

쿠니쿠는 예상보다 잘 버텼다. 말을 더듬고 단순한 듯 보였지만 저 경지는 소수의 오크들만이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전투의 주도권은 내가 온전히 쥐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주변의 방해는 전혀 없었다.

오크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애초에 끼어들 엄두모 못 내는 것일 터다.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1:1 전투에 끼어드는 것이 나름 실례이긴 하나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끼어들어도 충분히 상관 없는 상황이고 오크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도움이 되었다면 진작부터 끼어들었을 터. 능력이 되지 않으니 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계속 밀어붙이는 와중 쿠니쿠가 강하게 바닥을 디디며 도끼를 있는 힘껏 위로 올려쳤다. 이번에도 견제의 성격이 크다. 선제공격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피하는 게 좋은 공격.

하지만 나는 검으로 막아냈다.

막아내는 동시에 몸이 위로 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마력을 이용해 땅을 붙잡거나 강하게 저항하면 버틸 수 있었지만 나는 저항하지 않고 몸만을 보호한 채 위로 치솟아 올랐다.

얼떨떨한 표정의 쿠니쿠.

하지만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위를 바라보며 강기를 키운다.

내가 허공에 체공하는 사이 쿠니쿠는 정확하게 도끼를 휘둘러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허공을 박차며 공격을 피한 뒤 하늘 밟기를 이용해 어중간한 높이에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

애매한 높이에서의 공격에 쿠니쿠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그의 몸에서 드디어 제대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리치의 문신이 활성화되며 그의 몸에서 난 피를 흡수, 내 검기에 추가적인 피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순간 동공이 흔들리는 쿠니쿠였지만 재빠르게 태세를 정비, 다시금 방어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적극적으로 하늘 밟기를 이용해 공중에서 상대를 몰아쳤다.

위에서 공격하는 자가 아래서 방어하는 자 보다는 당연히 유리하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는 쿠니쿠는 반격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전보다 더 상황이 악화된 것이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아직 숙련도가 조금 부족해서 발판이 생각만큼 튼튼하지는 못하다. 공격의 위력이 줄어들었고 하늘에서 밟을 수 있는 발판의 수는 50걸음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땅을 밟고 지상에서도 전투를 치뤄야만 한다.

그래도 변칙적인 공격에 반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쿠니쿠는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고 그럴 때마다 내 공격력은 계속해서 증가해 갔다.

“크, 으.”

이대로 간다면 자신의 패배가 확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쿠니쿠는 강하게 팔을 휘둘러 내 공격을 맞받아 쳐버렸다.

콰아앙!

콰직.

커다란 굉음과 함께 내 발판이 박살난다. 나는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갔고 그 와중에 다시금 발판을 생성, 그것을 박차며 빠르게 지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사이 쿠니쿠는 작정했는지 마력을 강하게 활성화하며 억눌렀던 야성을 개방시켰다.

이제껏 오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투를 해왔던 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

옳은 선택이다. 그나마 저게 승산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크아아아아아아아!”

쿵! 콰앙! 후웅!

다시금 워 크라이를 내지르고는 뒤를 생각하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내게 돌진한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막고,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주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저 버티고 시간을 끌 뿐. 어느새 우리의 역할이 뒤바뀌었다.

저렇게 힘을 낭비해주면 오히려 고맙다.

쿠니쿠의 근육이 크게 팽창하고 다시금 강기가 타오른다.

정말 제대로 맞으면 이제껏 유리했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뒤집힐 수 있었기에 나는 신중한 마음으로 쿠니쿠의 공격에 대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씩 반격해 매혹 효과를 노린다. 이미 피를 흘린 이상 내 반격에는 바리치의 문신 효과 덕분에 추가 피해가 묻어나온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쿠니쿠의 체력을 갉아버리며 그가 스스로 망가지기를 기다렸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폭주한 쿠니쿠의 강기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부풀었던 근육이 조금씩 줄어들고 신중히 대응했던 공격들이 조금씩 가볍게 느껴진다.

현재의 나보다, 이전에 싸웠던 카바락보다 강했던 근력이 점점 떨어져 간다.

그 틈에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일행을 확인했다.

슬슬, 저쪽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쿠니쿠가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시간을 끌며 안전한 승리를 원했다간 저쪽이 먼저 패배할 판이다.

‘역시 아직 네임드를 나 없이 잡는 것은 무리인가?’

하유진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빠르게 지워낸다.

“쿠후, 크으….”

쿠니쿠는 자신의 마지막 도박이 실패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본다.

어느새, 그의 공격이 끊겼다.

“끝인가?”

가벼운 도발.

그러나 쿠니쿠는 거친 숨을 내쉴 뿐 내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내 차례군.”

이어, 나는 쿠니쿠가 보여주었던 것을 그대로 답습했다.

깔끔한 형태의 검강을 포기하고 마력을 과도하게 집어넣어 강기를 불태운다.

동시에 육체가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준까지 마력을 쏟아붇고 워 크라이를 지르며 몸을 내던졌다.

쿵! 쿵! 쿵!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격돌음이 주변에 울린다.

한 번의 공격이 들어갈 때마다 쿠니쿠는 서너 발자국을 뒤로 물러나야 했으며 쿠니쿠의 검강은 내 검강과 격돌할 때마다 조금씩 깨져나갔다.

마력이 거의 없다는 증거다.

검강의 위력부터 눌리기 시작하고 신체 능력마저 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손쉽게 승부가 나 버렸다.

매혹에 걸려버린 쿠니쿠의 고개가 돌아간 순간, 야성으로 버티며 막아왔던 공격을 떨어진 신체 능력이 제대로 커버하지 못했고, 내 검이 그의 복부를 그대로 훑어버렸다.

후드득.

쿠니쿠의 내장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크아아악!”

거친 비명. 자신의 상처가 치명적이란 것을 깨달은 그는 같이 죽겠다는 식으로 내게 몸을 던져왔지만, 상대해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몸에 치명상을 남겼다는 느낌이 오자마자 그의 목숨을 건 반격을 흘려버리고는 그대로 물러나며 공중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크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는 쿠니쿠.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검강이 깃든 도끼를 나를 향해 집어 던졌지만, 나는 가볍게 회피함으로써 그의 마지막 발악을 뭉개버렸다.

쿵.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일행이 밀리는 장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하아, 하아….”

“상당한 실력이군.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야. 영웅의 경지에 들지도 못한 이들이 블레이드를 막는다? 그리고 이 몸을 이리 오래 붙잡아 둔다고?”

네임드 오크 고른은 무척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이리 오래 시간이 끌릴 줄은 몰랐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찬사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바다와 남은주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모습. 고른이 혹여 후열을 노리지 못하도록,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세였다.

그들의 마력과 신성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 차례 스킬을 사용하면 아마도 강기를 버티지 못할 거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남은주가 중얼거린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분명히 차이는 날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버티는 것만이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절반만이 맞는 생각이었다.

버티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언제까지 버티지는 못한다.

오래지 않아, 버티는 것이 불가능해질 터였다.

나연과 사샤의 정령 마법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도 못했고 조연은의 화살은 연신 허공을 지나쳤으며 주하연의 여신의 가호, 실드 스킬은 반사는 커녕 일격조차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그나마 나서윤의 중급 마법이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고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을 막아냈다.

피하고, 막고, 베어낸다. 베어져 폭발해버린 나서윤의 중급 마법은 분명 조금이나마 피해를 주겠지만 의미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갓 중급 마법을 배운 수준으로는 네임드 급 오크에게 효율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움직임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남은주와 한바다는 중간에 몇 번이나 고른의 움직임을 놓쳤고, 그 부분을 나서윤이 커버했다.

오러로 육신과 감각을 강화한 나서윤만이 부족하나마 겨우 고른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주하연의 성녀의 축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 주하연마저 신성력이 바닥났다.

끽해야 10분. 이후에는 버프가 없는 상태로 저 괴물과 맞서야 한다.

나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만큼이나 강해졌는데도, 저 오크 하나 상대하지 못한다. 카바락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절망감이 몸을 엄습한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버티고 있다 보면 그들의 리더가 와 줄 테니까.

호기롭게 짐을 나눠 들겠다고 나섰는데, 꼴사납게 그의 지원을 기다린다.

일행들의 마음에 자그맣게 부끄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크아아아아!”

저 멀리서 쿠니쿠라 불린 오크가 워 크라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일행은 누구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여기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이는 단 하나 고른 뿐이었다.

“…승부가 났나. 쯧. 시간이 없군.”

유신후가 가끔 이쪽을 바라보았 듯, 고른도 가끔 저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로는 굴욕적인 일이나, 일행은 그런 굴욕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었다.

고른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층 진지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

내가 도착했을 때 일행은 정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아니,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다.

아마 내가 1분만 늦었어도 한 명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응하지 못한 고른의 공격이 남은주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조금 위험을 감수했다.

“블링크.”

훙.

제법 가까운 지점.

애매하다면 애매할 수 있는 장소에 내가 나타날 것을 직감한 고른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공격을 포기했다.

남은주의 철벽의 수호자는 강한 밀림 저항이 있는 만큼 그녀를 베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뚫고 나가 나를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녀를 베고 난 후에는 내 공격에 치명상을 받겠지.

그렇다고 남은주를 무시하고 내게 직접 달려들기에는 상당히 위험하다.

타이밍이 잘 맞는다면 나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겠지만 조금 늦는다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나를 포함한 일행들에게 포위되는 것이다.

아무리 반쯤 리타이어한 이들이라도 내가 포함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짧은 시간에 계산을 끝낸 고른은 뒤로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나타남과 동시에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남은주가 무너졌다.

“……죄송해요, 오빠.”

한 발 늦은 나서윤이 내게 말했다.

죽을 위기를 넘긴 남은주는 등을 떨며 어째서 자신이 살았는지 깨달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잘 버텼어. 늦어서 미안하다.”

처음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니 실수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빨리 도착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이런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내가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음. 쿠니쿠는 죽었는가… 그대, 강하군.”

고른은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크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무척이나 가까운 존재이며 익숙한 것이다.

그는 나름 쿠니쿠와 동료였을 터인데 나에게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듯했다.

‘친하지도 않은 존재가, 함께 하층에 지원을 왔다고? 어째서?’

나는 가벼운 의문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아직 여력은 충분했다.

“상처마저 없군.”

내 모습과 기세를 살핀 고른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깃들었다.

아무래도 나와 자신의 힘을 비교하는 모양이다.

마력을 제법 사용한 상태이긴 하나 그에게 크게 밀리는 수준은 아니다. 내가 조금 부족하긴 하겠지만 전투를 하기에는 충분한 수준.

저쪽은 아예 일방적으로 때린 만큼 여전히 멀쩡한 상태고.

마력은 조금 소모되었겠지만 그게 다일 거다.

‘…운이 좋았군. 쿠니쿠가 이쪽이었으면 진작 당했겠어.’

아까의 전투를 살펴보면 고른이라는 오크는 상당히 밸런스가 잘 잡힌 녀석이었다.

그에 비해 쿠니쿠는 파괴력이 강한 타입이었고. 물론 나도 고른이 상대였다면 전투가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르니 의미가 없는 가정이기는 했다. 아마 위험하다 싶었다면 내가 결국 끼어들었겠지.

서로를 관찰하기도 잠시, 판단이 끝난 듯 고른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하지.”

“뭐?”

“물러나겠다.”

“…물러나겠다고?”

“그래. 이미 쿠니쿠가 당했고, 이 장소는 그렇게까지 해서 차지할 구역은 아니다. 그대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조금 낮아 보이는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특이한 오크다. 왜? 어째서? 전투는 그들의 삶일 텐데?

“…이곳은 오크의 영역일 텐데? 오크가 영역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믿으라고?”

“이곳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런 만큼 상관없겠지. 그건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

“…목적?”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그래서, 싸울 건가?”

나는 곧바로 대꾸했다.

“네놈들에게 항복한 인간을 몽땅 포박해서 내놔. 그러면 놔 주지.”

“좋다.”

…뭐?

망설임이라고는 단 한 톨도 없는 대답에 나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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