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계시
나를 맞이한 사람은 추기경인 요도림 경이었다.
무려 교황 다음 계급인 추기경이다. 하지만 딱히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따지자면 나도 마스터니까. 그것도 역대 최연소 마스터다. 종교적인 존경이나 그 수를 생각하면 추기경이 한끝발 높기는 한데, 그렇다고 내가 함부로 홀대하거나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다. 게다가 이쪽은 황실의 요청으로 보호를 받을 몸. 그렇기 때문인지 요도림 경은 상당히 공손했다.
“안녕하십니까. 추기경인 요도림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유신후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20대에 마스터가 되신 분이라니… 역사 속에서나 존재하는 분을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설마… 사제이십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일단 여신님께 속한 몸이기는 합니다.”
“그, 어디서 세례를….”
“이미 없는 장소라 아마 모르실 겁니다.”
“…유감입니다.”
도적이나 몬스터, 전쟁 등이 흔한 곳이다 보니 신전이 사라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지간한 도적들도 신전은 피하는 편이긴 한데,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몬스터들이 신전이라고 피해가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역대 최연소 마스터가 사제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 나는 되려 내가 사제인 것을 알아본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신성력을 거절한 몸이다보니 몸에 신성력이라고는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만 해도 사제라는 직업은 내게 있어 전혀 메리트가 없었다.
내가 탐냈던 힘을 일행이 가져간 이상 솔직히 검사 계열 직업의 보정을 얻기 위한, 고유 스킬을 활용하기 위해 갖고 있는 계륵과 같은 직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감지할 줄은… 역시 추기경이라고 해야 하나?
‘티드린드 영지의 사제는 내가 밝히기 전까지는 내가 사제인 줄도 몰랐었지.’
나와 함께 이동한 아일딩 경 또한 내가 사제라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사제라고 한들, 이미 용병 단장이며, 황제는 내가 수련자라는 것도 아는 상황이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 터.
신전 또한 내가 사제일지라도 이미 황제가 요청해서 보호까지 하는 몸이다. 내가 황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뻔히 하는데 사제라는 이유로 수작을 부리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중립. 나처럼 말이 많이 오갈 이를 끌어들이는 것은 저쪽도 골치가 아프다.
그렇기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호감은 생기는 모양이었다.
“사제시라면… 대신전에 오셨으니 우선 기도실로….”
“유신후 님은 현재 몸 상태가 극히 좋지 못하십니다. 대신전에 보호를 요청하기는 했지만 사제보다는 저희 측 손님으로 대우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아일딩 경은 추기경을 향해 예를 갖추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본래라면 황실 기사라고 한들 추기경을 향해 저렇게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일딩은 황제의 전령이나 다름없는 몸이었기에 크게 주제를 넘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추기경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절차이긴 하나 사정이 특수하니 어쩔 수 없군요. 명심하도록 하죠.”
아일딩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현명한 선택을 해 주셔서 감사다하는 뜻을 전했고,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간혹 저희 측에서 사람을 보내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크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협조해주실 겁니다.”
물론 기본적인 규칙은 대신전 측을 따라야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 완쾌한 이후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이후 아일딩은 추기경을 향해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출입이 엄격한 장소인 만큼 아일딩은 신전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완쾌 이후 황제를 찾겠다는, 가벼운 약속을 잡은 이후 나는 추기경을 따라 대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1회차 시절에도 가본 적 없는 장소였기에 내심 기대되는 것이었다.
대신전의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나는 강렬한 신성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문을 경계로, 엄청난 농도의 신성력이 느껴졌던 것. 솔직히 말해서 문을 경계로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대기 중에 느껴지는 마력이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엄청나군요.”
“처음 대신전에 출입한 이들은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신전 내부는 특별히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물론, 성지에 비하면 적은 편이기는 합니다.”
“성지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지요. 이곳은 황도이기에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대신전일 뿐, 진짜 성지에 비하면 한끝발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녀님은 대신전과 성지를 번갈아 가며 거하시죠. 현재는 성지에 계십니다. 그쪽이 더 편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군요.”
성녀. 종교적 지휘는 교황과 비슷하나, 직권은 교황보다 아래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 성녀의 상징성은 교황보다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교황보다 성녀의 신성력이 더 높기도 하고. 주하연이 성흔을 받고 성녀의 직업을 계승했다고 하나, 아직 멀었다.
현재 성지에 거하는 성녀는 아마 주하연과 비슷한 나이일 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주하연과는 비교도 힘들 정도의 신성력을 자랑한다.
그게 맞는 수준이기도 하고. 괜히 조금 더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성흔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1년 이상, 2년은 아직 되지 않은 시점인 만큼 성장 속도를 보면 아마 납득을 하긴 할 거다.
뭐, 성흔이 있는 이상 애초에 부정은 불가능하지만.
“…그러고 보니 사제인 이상 대신전에 들르면 기도실로 가는 것이 절차라고 하셨던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황실 측의 요청도 있고 사정도 있으시니….”
신성력도 없어서 아마 그런 규칙으로부터 조금 더 널널하긴 할 거다.
“아뇨. 일단 사제의 몸이기도 하고, 여신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대신전의 기도실은 꼭 들러보고 싶군요. 가능하다면 먼저 기도실부터 갔으면 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좋은 기회인 만큼 꼭 가고 싶습니다. 황실 측에서 항의를 한다면 제가 원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긴히 원하시니, 바로 기도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요도림 추기경은 내 말이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겠지. 황실의 요청으로 받아들인 사람인데도 사제라는 것을 알자마자 규칙부터 꺼내든 인간이다. 게다가 추기경쯤 되면 어지간해서는 깐깐한 편일 수밖에 없었다.
중립 진영인 만큼 신전과는 친해지면 좋은 것들이 많았다. 특히 주하연은 성녀의 신분. 미리부터 잘 보여 놓으면 받아먹을 것들이 참 많았다.
‘남은주도 있었지.’
7대 성녀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당대 최고의 성기사. 그리고 현 성녀의 곁을 지키기까지 한다.
제법 좋은 그림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공간에 가는 대신 곧바로 기도실로 직행했다.
“이곳입니다.”
“엄청 크군요.”
“상징적인 공간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쓴 편이지요. 본래 개인 기도실은 따로 있고 이곳은 대신전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기도실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요도림 추기경도 같이 온 김에 함께 기도를 드릴 모양이었다. 그는 내 옆에 가지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중앙의 여신상을 마주 보는 위치. 가장 무난하기도 했고. 1회차 시절 보았던 사제들의 모습을 적당히 따라 한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자세를 잡고 기도를 시작한 지 5초도 채 안 되어,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환해진 것.
“으헉!”
요도림 추기경의 경악성이 들려온다.
응?
나는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나 또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거대한 여신상으로부터 시작된 빛줄기가,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신성력을 내포한 채로.
***
“이게 뭔 일…….”
“계시, 계시 아닙니까!”
나와 요도림 추기경은 둘 모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뜬금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계시요? 그게 왜 지금….”
상황 파악이 늦었다. 계시가 내려온다고?
계시가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여신이 자신의 뜻을 신도들에게 전한다는,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었다.
‘근데 여신은 가이아잖아?’
내 계약자인 가이아가 현재 수련의 탑의 여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수련의 탑이 가진 목적이 목적인 만큼 당연한 절차다. 그런데 문제는….
‘가이아는 자고 있는데?’
정확히는 잠들었다. 시간을 멈춘 대가 중 하나다.
그런데 계시를 어떻게 내려? 잠꼬대냐?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 현상은 계시 내지는 잘 쳐줘도 여신이 직접 축복을 내리는 현장으로밖에 안 보인다.
첫 번째 기도실의 중앙 여신상에서 빛이, 그것도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내포한 빛이 내리쬐는데 그거 말고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가 회복된 이후 성지로 보내어라.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이건 그냥 대놓고 계시다. 문제는 저 목소리가 가이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아니, 정확히는 구분이 안 된다. 여성의 목소리 중 아이, 어린이, 소녀, 성인, 중년, 노년의 목소리를 합쳐 마구 뒤섞어 놓은 듯한, 어떤 의미로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우습게도 듣기 싫지는 않다는 점과 거룩하게 들린다는 점만큼은 계시 같기는 했다 .
요도림 추기경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뜻을 이해했다. 일단 가는 것은 나니까. 대신전이 대단하긴 하지만 황실과 척을 지기는 어렵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도림 추기경이 기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여신이시여. 따르겠나이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공손한 자세로 여신상을 향해 경배를 보내는 요도림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쁜 기색은 사라졌고, 엄숙하다 못해 숭고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천천히 나를 내리쬐던 빛줄기가 줄어들었고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기도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신성력의 잔재만이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했다.
“…계시라니….”
요도림 추기경은 환희에 찬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유신후 사제님. 사제님 덕분에 제가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었나이다.”
“아뇨, 저도 뭐가 뭔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숙해야 할 기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여기 분명…!”
“이게 무슨 소란… 쿼노 추기경?”
“요도림 추기경, 이곳에, 이곳에 방금 여신님께서…!”
“진정하시지요 쿼노 추기경. 맞습니다. 방금 여신님께서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진, 진정입니까?”
“제 신앙을 걸고 말씀드리는바, 여신님의 계시가 맞습니다.”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여신님께서는?”
“여기 이 유신후 사제님께서 몸이 완전히 회복된 이후 성지로 초대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사제요? 어째서 사제가… 사제가 대신전에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만….”
“황실의 요청으로 이곳에서 요양을 하게 된 유신후 마스터님입니다. 과거에 연이 닿아 사제가 되셨다고….”
“이런 놀라운 일이….”
이후 쿼노 추기경의 뒤를 이어 몇몇 추기경이 더 기도실을 향해 달려들었고, 마침내 교황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교황 크로나트는 요도림 추기경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두고 극진히 모시라는 엄명을 내렸다.
황실의 요청이었지만, 이제는 여신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갑작스러운 부름이 궁금하기는 했다. 가이아는 분명 잠들었을 터. 퀘스트 창도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속임수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이상했다. 그래야 할 의미도 없었고, 그 빛에서 느껴지던 기운은 분명 가이아의 신성력이었다.
‘결국 가 봐야 한다는 건데….’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나는 내게 배정된 곳에서 일행이 오기까지 불사의 육체 숙련도를 쌓는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신전의 주교들을 비롯해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배정된 이들까지 모든 이들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공손했다. 내가 여신의 계시를 통해 성지로 초대되었다는 것이 대신전 내부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한낱 잡부조차 상당한 검증을 해야만 대신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만큼 대신전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신실함이 깊은 이들. 덕분에 나는 육체적으로 상당히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성수에 포션에 매일 신성력으로 샤워하며 육체 관리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었다. 여러 추기경들이 가끔 시간이 난다면 병문안을 핑계로 나를 주기적으로 찾았던 것.
덕분에 나는 여러 추기경과 연줄을 만들 수 있었다. 때때로 교황에게 초대되어 식사까지 했을 지경이라 나로써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평소 행동을 조심해야 하기는 했지만,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대신전 내부에서 내 평판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지금 이 인맥에 더해 성녀 주하연과 성기사 남은주까지 합해진다면 대신전은 그 어떤 수련자들보다 우리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면 내가 우려했던 대신전이 주하연과 남은주를 성지나 대신전에 묶어두려는 것도 방지할 수 있겠다 싶었다.
‘성지에서 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지간히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에야 중립 진영이었던 대신전이 우리 쪽으로 돌아서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내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