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56화 (156/317)

# 156

대신전. 다른 수식어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곳은 교황과 성녀가 거하는 장소다.

주교급 미만의 사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출입할 수 없었고, 내부의 한낱 잡부조차도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선발할 정도로 철저하기로 유명한 장소다. 오죽하면 1회차 당시 수련자 출신으로 성녀가 된 이가 자신의 휘하 인원들을 대신전 내부로 들이려 했을 때 실패했을 정도였다.

수련자들의 무시무시한 힘과 잠재력 때문에 어지간하면 허락해 줄 법도 하건만, 그딴 거 없었다.

차라리 황궁 중 하나를 안가로 내주었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대신전 내부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뭐 이런 사치스러운 안가가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일행들은….”

“머무는 것은 불가하나 면회 정도는 가능하실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다.

주교 미만의 사제는 출입조차 통제되는 장소에 면회라니….

주하연은 그곳이 얼마나 엄격한 장소인지 모르는 만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만 들어서는 엄청 안전할 것 같은데….”

“…이게 조금 불경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황궁과 비슷할 정도, 아니 어떤 의미로는 황궁보다도 더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골적으로 저희가 유신후 님을 내부로 불러들이면… 반발이 상당한 터라, 중립 진영인 신전을 통해 쉬실 수 있도록 힘을 좀 썼습니다.”

힘을 좀 쓴 것은 아닐 거다. 많이 썼겠지. 새삼 황제가 거래 상대로는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다.

“…저로써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증을 한 만큼….”

“네.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일행을 다른 던전으로 보낼 필요성이 사라졌다.

신뢰도 높은 정보를 바탕으로 안전한 곳에서 오크들과 싸우며 나름 성장할 수 있게 된 것. 이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오크들만큼 실력을 늘리고 공을 쌓기 좋은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저 말고 따로 온 인원도 있으니, 그쪽에서 사람을 보낼 때까지는 제가 지키고 있을 예정입니다.”

“…정말 신경을 많이 써 주시는군요. 폐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대신전에서 요양할 거라는 소식과 대신전이 얼마나 안전한 장소인지 들은 일행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일딩과의 일을 사샤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일행의 걱정어린 잔소리를 엄청나게 들어야만 했다.

나서윤이 가장 심했지만 의외로 한바다와 남은주의 잔소리가 주하연보다도 강한 편이었다. 나연은 입술을 깨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꼴을 본 사샤가 너도 한마디 하라고 닦달했지만, 그런 사샤를 이끌고 ‘수련하자.’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사샤가 난리를 쳤으나 나연은 휘둘리지 않았다.

이후 아일딩의 말대로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S급 용병을 거느린 거대 용병 단부터, 접경지에 영지를 가진 귀족, 접경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거대한 세력을 가진 한 세력의 수장이 보낸 이도 있었고 심지어는 1회차 시절 수도 없이 이름을 들었던 이로부터도 영입 제안을 받았다.

“…아르테인 공작가에서요?”

“네. 그쪽에서도 사람을 보냈더군요.”

아르테인 공작가. 무려 제국 제1검이라 불리는 체스토크 아르테인이 가주로 있는 가문이다. 1회차 시절, 수련자들이 만든 거대 길드를 산하에 두었던 네 가문 중 하나. 그중 하나가 내가 끈을 댄 황가다. 즉,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

상대가 상대인 만큼 숨길 법도 한데 아일딩은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일딩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하기야 보통의 기사라면 제국 제1검의 영입 제안이라면 아무리 황가가 대단해도 흔들릴 법했다. 하지만 나야 어차피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수련자. 딱히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만큼 황제는 내게 필요한 것들을 콕 집어 건네기도 했고.

훗날 날 이용해 뽑아먹을 생각이긴 하겠지만 그게 내게 불리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정치에는 큰 관심 없었고 제국 내에 영향력을 행사할 세력을 만드는 것도 지구로 데려갈 수 있는 이들에 한해서지 제국 내에서 권력을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얼마 되지 않아 황실 정보 단체와의 끈을 연결받을 수 있었다.

“각 지부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 그리고 제시하면 어떤 정보든 얻을 수 있는 패입니다. 일부 공개되지 않는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어지간한 특급 정보도 내줄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새로운 금빛 패. 아예 황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절대 유출되면 안 된다는 지부의 위치가 새겨진 지도.

아마 이것들은 내가 인벤토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훔칠 수는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곧바로 주하연을 불러 패를 건네고는 베더 요새 내의 지부 위치를 설명한 후에 말했다.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오크들과 싸우시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2차 전직을 할 수 있는 50까지는 절대 저를 만나러 오시면 안 됩니다.”

“…찾아가면… 안 된다고요? 어째서?”

“성녀니까요.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아….”

기왕이면 3차 전직을 하고 더 공적을 세운 이후에 밝혀졌으면 하지만, 그러면 너무 늦다.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좀 신경 써서 신전을 피해 다니고, 전직은 티드린드 영지 쪽에 말해서 조용히 치르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타 국가 수련자들이 나타나기 전에 제대로 자리를 잡자면 2차 전직 이후가 적당하다.

부족하긴 하지만 아주 약하지도 않고, 나도 이제 마스터가 되었으니 완전히 휘둘리지는 않을 터다. 황제도 나름 후원을 시작했으니 대신전이 주하연과 남은주를 완전히 묶어 놓을 수도 없을 테고.

“그러니 그 전에 신전은 되도록이면 피하세요. 그리고 50을 찍는 날에 저를 만나러 오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2차 전직을 할 수 있는 레벨이 되어야겠네요.”

주하연은 슬프고 아쉬워했지만 이전처럼 헤어진다고 매달리지는 않았다.

하기야 지구 상황도 알게 되었고 타 국가 수련자들이 등장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지도 알게 되었는데 나를 간병하겠답시고 도움도 되지 않는 주제에 허송세월을 하겠다고 했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일행이 노력하면 할수록 나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든다.

지금 일행은 레벨이 40도 채 안 되지만, 진짜 작정하고 위험만 조금 감수하면 내가 회복이 되기도 전에 나와 만날 수 있었다.

짧으면 두 달이 채 안 걸릴 테니까. 안전을 중시하며 조심조심한다고 해도 일행의 수준이라면 길어도 3달이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다. 숙련도를 최대한 뽑아먹을 생각에 최대한 늦출 예정이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는 불사의 육체 숙련도를 보면… 솔직히 이 고통은 아픈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후 오래지 않아 내가 대신전으로 이동하는 날이 다가왔다.

시기가 예상보다 무척 빨랐는데, 아무래도 아르테인 공작가까지 움직이자 황제가 조금 서두른 듯했다.

덕분에 일행과 제법 이른 시기에 떨어지고 말았다.

“툭하면 헤어지네요.”

주하연의 말에 일행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튜토리얼이나 미궁 때가 제일 힘들었지만… 차라리 그때가 그리울 정도예요. 신후 오빠한테 정말 많이 혼났었는데….”

“…내심 신후 님 파티에 들어가면 빨리 성장하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리 발목을 잡을 줄은….”

“그건 아니죠 누나. 그렇게 따지면 저희 모두가 신후 형 발목을 잡는 거일걸요?”

“…틀린 말은 아니네. 우리가 신후 발목 잡는 건… 맞는 얘기니까.”

“니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답답아? 이 중에서 니가 제일 약한 건 알지?”

“…입 좀 다물어줄래?”

“…빨리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오빠.”

-그리고 얼마 안 남았어요. 19살이 되기 전에는 갈 거니까. 나 아직 마음 안 변했어요. 언젠가 오빠 옆에 설 거에요.

갑작스러운 전음. 심지어는 얼마나 발전시켰는지 주변 인원들이 그 마력의 유동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정령인 사샤조차 나서윤이 내게 전음을 보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나는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제 발목을 잡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헤어져서 미안할 정도입니다.”

“…아뇨, 저희가 강했다면…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만… 그걸 계기로 더 강해지시면 됩니다.”

“물론이에요. 최대한 빨리, 병문안 갈 테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헤어지기 전 주하연과 하유진을 불러 가벼운 조언을 건넸다. 정확히는 하유진에게. 주하연은 만약을 위해 같이 언질해두었던 거고.

하유진은 내 말에 눈을 빛냈고, 주하연은 가벼운 우려를 표했다.

“도적 길드요?”

“네.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그쪽은… 조금, 질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는데요?”

“조금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유진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래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기술들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암살 쪽 기술 등은 신전에서 배우기에는 별로 좋지 못한 기술들 투성이니까요.”

하유진이 배운 기술들이 무척 부족하기는 하다. 함정 감지나 해제, 은신 등을 제외하면 별거 없었으니까. 그나마 은신은 최근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전 확인해 보고 싶어요, 누나.”

“…유진아?”

“도움이 된다면 배워야죠. 확실히, 다른 누나들에 비하면 가진 스킬들이 부족하기는 해요.”

“…알겠어요. 신후 씨 말도 있고, 유진이도 이렇게 의지를 보이니… 하지만 정 위험하다 싶으면….”

“황실 정보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면 해결될 겁니다. 제가 뒤에 있다는 것도 알 테니… 도적 길드도 척을 지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일행과 헤어진 나는 대신전으로 이동되었다.

***

“또 헤어졌네.”

나서윤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우리가 부족하니까요. 이번에 형이 무리한 것도, 저희가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렇긴 해. 분명 우리는 다 같은 시기, 같은 지점에서 시작했는데 우리는 왜 걸림돌일 뿐일까?”

“…그 말 다른 수련자들이 들었으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거다.”

나연의 한탄에 한바다가 조심스레 타박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 없어요. 단지, 우리가 또, 우리의 부족함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짜증 날 뿐이에요. 신후 오빠는 이번에도 헤어지면서 줘야 할 것은 다 주고 갔어요.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요.”

“…그렇지. 그 상황에 우리가 성장할 방법에, 안전장치, 심지어는 목표 지점까지 성장해 주고 갔으니까.”

주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결국 또 이렇게 됐네. 따라갈 만하면 멀어지고, 따라갈 만하면 더 멀어지고… 우스운 건 그렇게 멀어졌는데도 신후 씨보다 강한 이들이 널렸다는 거지만.”

정말 강해지는 것에는 끝이 없다며, 언제쯤 대등하게 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열심히 하면 금방 만날 수 있으니까….”

“그놈의 노력. 고집불통 리더 같으니라고. 또 가서 제대로 쉬지도 않겠지. 그저 강해만 진다면 진짜….”

“이해는 가. 신후가 같은 파티원인 우리한테 하는 것만 봐도, 거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수준이잖아. 저런 사람이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겠어?”

“……지구 꼴도 말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속이 엄청 탈 거다. 시간이야 멈춰져 있다고 하지만 신후 님 성격이면 그것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겠지.”

“은근히 정 많으니까요. 그 사람. 타인에게는 가차 없는 면도 있지만… 자기 사람이나 조금 선한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기도 하고….”

주하연은 말을 멈추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결국 우리가 빨리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신후 씨의 짐을 나눠 들고 그 사람 곁에 서려면, 강해져야죠.”

“맞는 말이에요. 오빠 곁에 서려면, 자격이 필요하니까. 병문안 조건이 레벨 50이라고 했던가요?”

“그래 맞아.”

“최대한 빨리 올렸으면 해요. 고작 레벨 50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그 빌어먹을 오크, 제가 죽이고 싶거든요.”

나서윤은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 레벨이 60대라고 했던가요? 그럼 한 70 정도면 잡으려나? 아니, 오빠는 특별하니까 80이나 90은 되어야 할지도. 마탑도 들리고, 스킬 슬롯도 마저 채우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근본적인 원인은 오크가 아니라 그냥 니들이 약해서 그런 건데. 안 그러냐 답답아?”

“…그렇기는 하지만 신후를 다치게 한 것은 사실이니까. 서윤이에게 말해도 소용없을걸?”

“…하여간 난 쟤 진짜 무서워. 네 동생 왜 저래?”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환경도 그렇고 신후랑 붙어 다니다 보니 조금… 아니, 8층 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런 기질이 있기는 했었나 봐.”

“너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그거야, 저 성격 덕분에 신후에게 신뢰도 얻었고, 이런 세상이라면 차라리 저런 게 나아. 나보다, 더 잘 적응하고 있으니까.”

“너도 알긴 아는구나? 알면 좀 고쳐 이 답답아.”

“하지만 내 성격이 이래 먹은걸.”

“바꿀 수 있어.”

“…바다 언니?”

“그런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과할 필요는 없다고 봐. 나만 해도 미궁에서, 나름 독재자로 불렸던 몸이니까.”

“…언니가요?”

“응. 약자가 꼭 선한 건 아니니까. 별의별 인간 군상을 다 봤지. 덕분에… 신후 님이 왜 고정 안전 구역에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너도 조금 더 사람들을 겪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솔직히 너도 대충 짐작하고 있지? 생각보다 세상에는 회색 인간이 많아. 아니, 탑의 특성을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이 회색 인간이려나? 그리고 약자라고 무작정 도와주면 결국 손만 벌리고 널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만 주변에 가득해져.”

“…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원래 대부분 회색이에요. 아니, 어쩌면 회색으로 위장한 검은색 투성이겠죠. 엄청 이기적이고. 바다 씨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아직 사람들에 대해 희망적이네요.”

“…도움을 주면 제대로 은혜를 느끼고 보답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적어도 탑에서는 너무 희귀한걸요?”

“그렇긴 합니다. 그러니 더욱 규칙을 만들고 따르게 해야죠. 그렇다고 너무 규칙 같은것에 얽매여 이도저도 못 하면 안 되는 곳이긴 합니다만….”

“정말 많이 변했네요, 바다 씨.”

사샤는 나연을 보고 잘 배우라며 닦달했다.

“그래, 딱 저 정도만 되어도 내가 너한테 답답이라고 안 한다. 진짜 좀 보고 배워라. 부뚜막 고양이만큼 하라고는 안 하겠는데, 그래도 선생님만큼은 돼야 하지 않겠냐?”

“…바다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래 선생님이 말하잖아. 현장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라고. 너처럼 머리만 꽃밭인 사람이 아니라니까? 현실을 겪고 타협하잖아. 네 생각을 세상에 강요해 봐야 헛짓이라고. 심지어 저렇게 타협했는데도 독재자 소리 들었다잖아.”

사샤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나연의 꽃밭인 머리를 지적했다.

현실. 그 무게에 나연이 깊은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신후 오빠가 나연 언니한테 바다 언니를 붙인 이유가 있었네.”

“그러게요. 게다가 사샤까지 붙으니 생각보다 영향이 크네요.”

“뭐, 이제는 나연 언니 생각처럼 여러 사람들 이끌고 올라가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하기는 하니까.”

“형 목적을 생각하면 그렇기는 해요. 길드도 만들었으니 최소한은 챙겨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우리여야만 해.”

“…서윤아?”

어느새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서윤이 남은주와 하유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맞는 말이죠. 형 옆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짜증 나요.”

“뭐, 그건 그렇지. 우리가 뒤쳐지고, 그 때문에 후에 나온다는 타 국가의 수련자들이 가능성을 보인다면서 신후 오빠 옆에서 지구 구하겠다고 설치면… 우리가 안전이야 하겠지만 화날 거 같아. 자괴감도 좀 들 거 같고.”

“그건 안 돼.”

어느새 주하연도 한바다와의 이야기를 멈추고는 이쪽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절대 안 돼. 그리고 우리는 신후 씨가 그렇게 도와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아직까지 중층에 도달하지도 못한 이들이 우리를 앞지른다는 것은….”

“신후 님 같은 예외도 있으니 가능성이 없다고는 하기 힘들겠군요. 당장 내일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우리 리더 같은 괴물이 또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사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상대하기 적당한 대상은 전사 오크나 정예 전사 오크 정도가 좋아. 우리 실력을 생각하면 정예가 베스트지만, 숫자가 숫자니까. 신후 씨 덕분에 우리가 레벨보다 강하니 전사만 상대해도 충분한 경험치를 받으니까 당분간은 전사 위주, 정예가 조금 섞인 지역에서 활동할 예정이야. 여기도 괜찮기는 한데, 얼마 전 그 오크도 있었으니 변수가 많아서 다른 지역으로 갈 생각이야.”

갑작스러운 주하연의 말. 남은주는 그런 주하연을 향해 물었다.

“…황실 쪽 정보 단체에 문의하면 바로 알려주나요? 하연 언니, 패 받았다고 했죠?”

“벌써 알아 왔어. 이러고 있을 틈이 없네. 빨리 가자.”

“…네 누나. 빨리, 빨리 가죠.”

베더 요새보다 조금 더 변방에 가까운 지역.

그곳을 향해 일행이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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