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54화 (154/317)

# 154

마력의 눈동자로 분석했던 모든 것들.

내 불완전한 검강과 카바락의 진짜배기 검강. 그 차이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목숨이 걸린 전투 중에 함부로 딴생각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나는 이게 전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카바락은 쉬지 않고 당장 끝장내겠다는 듯이 검을 휘둘러왔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막고 흘리고 있었으니까.

이전의 상위 검기마냥 내 불완전한 검강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 이전처럼 검에 피해를 누적시킬 수준은 아니었고, 덕분에 격렬한 공방 상황에서도 나는 치명적인 상처 없이 버텨나갈 수 있었다.

‘외부를 더 견고하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카바락의 검강은 이리 허술한 표면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을 더 격렬하게, 하지만 동시에 튀어서는 안 된다.’

마치 거대한 강의 내부처럼. 안은 여러 흐름이 서로 부딪치며 격렬한 흐름을 만들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언제나 도도하게 흐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아냐. 이렇게 엉망이 아니다. 조금 더 날카롭고….’

검강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그 어마어마한 절삭력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같은 검강이 아니라면 검강이 베지 못하는 것은 몇 없었다.

방어에 특화되지 않았다면 전설 등급의 방어구라도 베어버린다. 성룡급 드래곤의 비늘조차 아무런 조치가 없다면 검강 앞에서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다.

크기, 안정도, 복구 속도, 마력의 흐름….

수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교정해 나간다.

검강이 성장한다. 불안정하게 흔들렸던 검강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부딪치면 깨졌던 검강이 어느덧 카바락의 검강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검강 밖으로 새어나가던 마력이 천천히 회수되기 시작했고 압도적으로 성장한 육신은 폭력적인 마력의 흐름을 충분히 감당해내고 있었다.

감각이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 과거, 잠시나마 느꼈던 감각.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감각이 몸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카바락은, 내가 자신과 싸우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꺼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몰아붙여 왔다.

성장은 성장, 전투는 전투.

마치 그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봐주는 것 따위는 없었고 조금만 빈틈이 보이면 주저 없이 급소를 노려온다.

죽던가, 더 성장하던가.

흐릿한 시야에 기쁨에 일그러진 카바락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내 인식에서 사라져버렸다.

시야가 하얗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생각마저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

현실 속에서, 카바락은 웃고 있었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달려들기 무섭게 엉망진창인 블레이드를 꺼내 들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블레이드가 점점 진화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신후라는 전사는 자신과 싸우면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점점 더 상대할 맛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이 유신후라는 자가 성장한다면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특이한 전사의 성장이 너무나도 즐거웠고, 흥미로웠다.

손해를 감수하고 달려들었던 자신. 그 대가로 얼마 남지 않았던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블레이드는 이전처럼 미친 듯이 타오르지 않았고 부풀었던 근육은 어느덧 원상태로 돌아온 상태였다.

천천히 자신의 공격이 느려짐을 깨닫는다. 손해를 감수한 대가가 돌아오고 있었다. 억지로 찾아왔던 전투의 흐름이 상대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상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공격해 오지 않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공격하면 반응하고 버틸 뿐. 그나마 검에 매혹되어 시선이 돌아갔을 때나 조금이나마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공격 해왔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는 절대로, 먼저 공격해오지 않았다. 얕보는 것도, 이전처럼 승리를 위해 장기전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의 검을 바라보자 어느새 완전해진 모습의 블레이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전 자신을 향해 들이대었던 실루엣도,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블레이드도 아닌, 완전한 블레이드가.

카바락은 그런 상대를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고,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 들었다.

쿠아앙!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소리가 전장을 울린다.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여전히 자신이 아닌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바라보자 이제는 경지로써 상대를 밀어붙이는 시기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압도적으로 밀리지도, 이제처럼 크나큰 손해를 보지도 않았다. 동등한 블레이드끼리 부딪침으로써, 동등한 피해를 입었을 뿐.

그것이 너무나도 기꺼워 카바락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릿해졌던 상대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

하얗게 변했던 시야가 돌아오자 처음 보인 장면은 카바락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오래전 한 번 닿았던 영역에 이제는 완전히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고, 그 틈을 카바락은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카바락의 모습은 아까처럼 위협적이지 못했다.

쾅!

“크아아아!”

검이 부딪치기 무섭게 잠시 버티는 듯하던 카바락은 내가 힘을 조금 더 주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리던 카바락은 끝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 버린다.

나는 내 손에 든 흡혈검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검을 감싸고 있는 붉은 빛의 검강을 바라보았다.

작은 감탄사가 새어나온다.

그리고 동시에 충만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검강(劍罡). 그것도 완전한 형태의 검강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째서 과거의 내가 나름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담갔는데도 불구하고 검강이 완전하지 못했는지 깨닫는다. 아니, 정확히는 추측하고 있었고 그게 맞아떨어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그 몸 상태로 이 경지에 도달했다면… 도달한 즉시 죽었겠군.’

설령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회로가 버티지 못하고 병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 과거의 검강이 어째서 불완전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경지로 진입하다가 중간에 몸이 견디지 못해 중간에 멈춰버린 것이었다.

보통의 수련자라면 경지에 접어듬과 동시에 육체가 맞게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미 망가져 후유증이 가득했던 육체는 그러한 과정마저도 견디지 못함을 깨닫고 다음 경지로의 진입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나마 내가 응당 가졌어야 할 무기를 아쉬운 마음에 그 몸뚱이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열화시켜 망가뜨린 것이 내가 가졌던 불완전한 검강이었다.

상념에 젖은 사이, 내 검에 밀려 넘어졌던 카바락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은 다시 줄어들었고 전신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친다.

그리고 그 피는 내가 손을 뻗기 무섭게 바리치의 문신으로 빨려 들어 오고 있었다.

“…길을 개척했군.”

“덕분에.”

나는 카바락의 말을 긍정했다.

그의 검강을, 마력의 눈동자로 샅샅이 살핀 결과 얻어낸 쾌거다.

과거와 다르게 강력해진 몸뚱이는 능히 검강을 다룰 수준이 되었고 그를 통해 제대로 된 검강을 관찰, 다시금 과거 닿는 것이 전부였던 곳에 제대로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거창하게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이미 가졌던 것을 찬찬히 돌아봐 진화시켯다는 표현이 맞을 터였다.

“너에게는 감사하지.”

“웃기는구나. 내가 한 것은 없다. 그저 그대가 벽을 넘어섰을 뿐. 내가 한 거라고는 그대를 죽이려 한 것이 다다.”

카바락은 검을 꼬나쥐며 말했다.

“그리고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쎄, 꼭 싸워야 할까? 결과는 뻔한데?”

내 말대로였다. 방금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명백한 힘의 우열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카바락이 내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모욕하는가?”

카바락의 얼굴에 남아있던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 그냥, 아쉬울 뿐이야. 나를 이 경지로 올려준 너를 허무하게 죽여버린다는 게 말이지.”

개소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 말에 카바락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자신의 패배를 확신하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말했을 텐데?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한다면, 죽여줄게. 하지만 나는 물러날 것을 권고하지.”

나는 검을 들어 카바락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이런 젠장….”

슬슬 올 때가 되기는 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온 지 약간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저 멀리서, 이 주변에 침입하는 인간들을 막는 역할을 부여받은 오크들이 하나둘 이쪽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뒤를 지켜야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잖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서로 피차일반이야. 왕자씩이나 되는 이가,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는 이들의 목숨을 헛되이 버릴 셈은 아니겠지?”

“…….”

카바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사가, 자신의 역할을 하며 그 과정에서 죽는 것은 오크들에게 무척이나 명예로운 일이다. 허나 사실상 승부가 난 상황에서 물러가겠다는 나를 자신의 욕심만으로 붙잡아 추후 저들의 목숨까지 허무하게 잃게 만든다면, 그게 과연 명예로운 죽음일까?

카바락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뭐, 네 체면도 있을 테니, 저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내가 도망친 거로 하자고.”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저기 다가오는 이들 중에서 제일 뛰어난 이라고 해 봐야 정예 오크 전사 수준이다. 우리의 싸움에 영향을 줄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카바락은 울분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껏, 최고의 상대를 만났다. 전쟁의 신께서 인도해준 상대를 이대로 보내라는 말인가? 고작 이런 꼴로?”

발판이 되어 준 상대다. 그가 비참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어떻든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럼 덤벼. 네 욕망이라는 저울 반대편에 네 목숨과 저들의 목숨까지 모조리 얹어도 여전히 욕망이 더 무겁다면, 얼마든지.”

모조리 죽여주겠다는 선언. 까놓고 말해 왕자 하나의 자존심이 저들의 목숨보다 무거울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카바락의 몫. 그러나 그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1회차 시절 그는 부하 하나하나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던 제대로 된 지휘관이자 전사였으니까.

괜히, 그를 따르고 싶어 하는 인간마저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카바락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히죽.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고, 곧바로 일행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카바락은 그런 나를 막지 않았다.

“오빠! 괜, 괜찮아요?”

“신후 씨! 어떻게 해, 상, 상처가….”

내가 물러나는 기색에 일행이 조심스럽게 접근해 온다.

나는 여전히 카바락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혹시 모른다. 꼭지 돌아서 달려들면 정말 위험하다.

솔직히 말해서, 내 몸 상태로는 현재 카바락을 상대하는 것도 벅차다.

우위? 반쯤 허세였다. 아무리 이번에 제대로 경지에 올랐다고 한들, 이미 마를대로 마른 내 마력은 오랜 전투를 지속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갑각스런 경지의 상승으로 몸에도 무리가 간 상태였다.

카바락은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반쯤 짐작하고 있을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것은 내 상태에 대해 짐작하고 있을 뿐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테고, 내가 내 말대로 모조리 죽이고 빠져나갈 가능성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칙 격으로 슬슬 앨거차의 문신이 한계라며 외치고 있었다.

나보다 상위였던 오크와 싸웠고, 몸에 꾸준한 데미지를 받았다. 바리치의 문신으로 조금 회복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고작 한 명. 질이 좋다고 한들 한계는 명확했다.

바리치의 문신은 애초부터 다수와의 싸움에 효율을 내는 양민 학살용 문신이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내 이익을 위해, 성장을 위해 싸운다고 한들 눈앞에서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네임드급 오크를 그냥 보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보인 태도는 남은 기력을 쥐어짜 낸 허세. 즉 블러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행을 향해 속삭였다.

“…최대한 빨리 여기를 벗어납니다.”

“…알겠습니다.”

한바다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나서윤도 내 말에 상황을 짐작한 얼굴이었다. 하나둘, 일행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일행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손짓했다.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장기간의 휴식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그 휴식이 끝난다면 나는 완전한 S급 용병으로서, 그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인물이 되어있을 터였다.

여기는, 그때 다시 들르면 된다. 그때 다시 카바락을 만난다면, 지금 같은 타협은 없을 거다.

우리는 즉시 베더 요새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쿨럭.”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하자 멈춰있던 부작용이 내 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크게 티를 내면 안 된다.

나는 일부러 일행의 제일 끝을 자처해 최대한 내 상태를 숨겼다.

시끄럽게 소란이 인다면, 내 상태에 확신을 갖게 된 카바락이 마음을 바꿔먹을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피를 닦고는 슬쩍, 카바락이 서 있는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바락은 불타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념, 광기, 울분, 분노…. 수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동자다.

나는, 그와의 인연이 악연으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솔직히,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크는 경험치. 싸워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지금은 이렇듯 패배해 도망치는 모습이지만, 다음번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정작 카바락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패했고 내가 승자의 아량을 베풀었다고 생각할 테지.

그렇게, 미래의 대전사인 카바락과 나는 서로를 의식 하며 서서히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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