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오크의 왕자 카바락. 미래의 대전사이자 오크들의 왕자 중 하나다.
그 특유의 수려한 외모 덕분에 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오크였다.
훗날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무력은 다음 대의 왕에게도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유명한 사건으로는 미국 출신의 랭커, 복수자(Avenger)와 1:1로 겨뤄 그를 패퇴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때 복수자는 휘하의 수련자들 상당수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던 사건이었었다.
당시에 이미 복수자는 랭커였고, 카바락 또한 대전사 신분이었기에 한동안 제국의 사기가 상당히 하락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 시점에 카바락이 대전사인 것은 아니었다.
느껴지는 기세는 분명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대적이 불가능한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는 힘들다. 나 또한, 모든 패를 꺼내야만 한다.
나는 즉시 바리치의 문신을 활성화했고, 주변 시체로부터 피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추가 피해를 노린 조치.
그리고는 곧바로 앨거차의 문신을 극한 활성화 시켜버렸다.
얼마 전에 쓰고는 설마 이렇게 빨리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것을 쓰지 않으면 당장 내가 죽는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일행 또한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가까이 접근하는 와중, 내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카바락은 워 크라이를 재차 시전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기술. 나는 어쩐지, 이번 워 크라이에는 환희의 감정이 담긴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나는 전혀 다른 감성을 느꼈지만.
“하, 거지 같네.”
저놈처럼 지금 상황이 달갑지가 않았다.
내가 느끼는 현재 카바락의 수준은 영웅 오크 수준. 즉, 네임드 오크로 판단되었다.
용병으로 따지면 S급. 수련자로 따진다면 거대 길드의 1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딱, 나와 비슷한 경지다. 아니, 정확히는 나보다 경지 자체는 뛰어나 보인다.
나는 카바락의 검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검을 완전히 둘러싼 그것은 분명 완성된 검강(劍罡)이었다. 나는, 아직 갖지 못한 것이다.
내가 뽑아낼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검강이고, 그마저도 효율이 극악이라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 나의 최선인 검기를 중첩시키고 압축해 상위 검기를 뽑아내며 카바락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바락의 눈에 어딘가 아쉬움이 스친다. 아마도 경지의 차이를 깨달았겠지. 그러면서도 어딘가 의아한 기색이 보인다. 저 수준의 기운을 가진 자가 아직 검강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문일 터였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경우 내 상위 검기는 검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아마도 순식간에 잘려나가 버리겠지.
하지만 탑의 보정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나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높디높은 신체 능력치, 90을 넘기는 마력, 직업 보정, 전설급 스킬의 보정, 마력의 눈동자, 몇 배나 증가한 마력 순환 속도와 피를 먹인 레어급 흡혈검.
한두 개로 끝나지 않는 무수한 보정이, 나를 지지할 터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강자를 향해 달려든 것은 아니었다. 내 감각은 저 미래의 괴물과도 현재는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고 외쳤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방심했다간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겠지.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겁먹고 위축될 상대는 아니었다.
1회차에서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괴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등한 상대였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쳐 나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폭음이 울린다.
나서윤이 4가지 부가 효과를 욱여넣은 파이어 볼 보다도 되려 더 큰 굉음.
그리고, 부딪친 검 너머로 보이는 카바락 두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
그럴 만 했다. 상위 검기와 검강이 부딪쳤는데, 상위 검기가 잘리기는커녕 검강을 상대로 마주한 채 버티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부딪친 결과 힘은 내 우위였다. 오크라는 종족과 인간이라는 종족의 기본 신체 능력 차이를 고려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결과. 아무리 미형인 얼굴을 가진 카바락이고, 오크치고는 호리호리 한 체형일지라도 분명 인간보다는 강력한 육체를 소지한 오크다. 그런데 힘에서 내게 밀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결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밀리는군.’
수많은 보정을 받고 있는 내 상위 검기가 검강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마력 순환을 이용해 갉아 먹힌 부분을 어떻게든 복구하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된다면 마력의 소모가 상당하다.
인간이 오크에 비해 우수한 점 중 하나가 마력을 다루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되려 마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쪽이 되어버렸다. 경지의 차이가 원인이었다.
서로의 장점이 뒤바뀐 기묘한 장면.
결국 서로의 장점으로 일격에 끝내지 못하자 서로 동시에 검을 떨치며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서로의 힘을 충분히 가늠했다. 상대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며 싸우면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상대였다.
“강하군. 신기할 정도로 강해.”
굵직한 목소리. 목소리마저 듣기 좋은 수준이었다. 하기야 네임드 오크 정도 되면 그 아래 오크들과는 다르게 말을 멀쩡히 하는 편이었으니까 이상한 점은 아니었다. 단지 이 카바락은 얼굴만 가리면 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되려 불쾌할 지경이었다.
“경지가 부족한 이가 어찌 나와 대등하단 말인가?”
“…너는 오크 주제에 상당히 약해 빠졌군.”
“크하하! 과연 놀라운 패기로다. 흥미로운 힘의 유동에 찾아와 보기를 잘했어! 설마 이런 전사와 만나게 될 줄이야!”
환희에 가득 찬 표정. 전투를 즐기고 투쟁을 삶으로 삼는 것은 역시 그의 근본이 오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흥미로운 힘의 유동이라… 역시 이쪽 전투가 저놈을 끌어들인 건가? 아니 도대체 왜 오크의 왕자가 이런 변방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등장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하기야 내가 미래 강자의 과거 궤적을 다 아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1회차 시절 이 시기에는 아예 중층에 수련자라고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며 카바락이 날뛰었다는 기록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애초에 예측도 불가능하고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확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조우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실루엣(silhouette)으로 블레이드(blade)를 막는 거지? 인간의 새로운 기술인가?”
오크들은 검기를 실루엣으로, 검강을 블레이드라고 불렀다. 실제로 탑이 오크들의 말을 그렇게 번역해 주는 이상 다르게 알아들을 방법은 없었다.
“그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니지. 그래. 적대 종족의 전사를 만났는데 말이 무슨 소용인가? 전장의 신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 오직 결투만이 있을 뿐.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어!”
빌어먹을 전투 종족이다. 솔직히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싸워버리면 일대의 오크들이 이쪽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한 정찰대가 제법 넓은 범위를 커버하긴 하지만 우리가 본격적으로 싸워댔다간 당연하게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까놓고 말해서 카바락과 싸운다고 한들 일방적인 전투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승리한다고 해도 몸이 멀쩡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이라고 해야 하나. 저놈이 나를 그냥 놔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그런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나는 전투를 오래 끌면 끌수록 이길 가능성이 올라간다. 단기전은, 저쪽이 유리한 전투 방법이다.
“싸우자, 싸우자 인간의 전사여! 내 이름은 카바락! 위대한 오크의 서른 세 번째 왕자다!”
많기도 하다.
“…가이아의 유신후다.”
“으하하하! 유신후! 좋아, 제대로 붙어보자!”
카바락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
광폭화. 오크들의 고유 기술 중 하나다. 워 크라이가 야성을 올려주고 전투 의지를 고양시키며 상대의 사기를 깎아 먹는다면 광폭화는 그냥 짐승이 돼버리는 기술이다. 솔직히 어지간히 흥분하거나 위기 상황이 아니면 오크들은 쉽게 광폭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상이 네임드 쯤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광폭화의 장점만을 취해버린다.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하고 자신들이 전장을 헤쳐나오며 몸에 익힌 움직임을 그대로 쓰면서도 광폭화로 인한 본능적인 움직임과 신체 능력은 그대로 가져온다.
야성과 이성, 본능적인 기술과 전투를 통해 익힌 기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괴물 같은 전투력을 자랑한다. 형식 따위는 없었고 그런 주제에 대응은 너무나도 노련하다.
나는 그런 카바락에게 시종일관 수비적인 태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힘 자체는 내가 좋았지만 서로 검을 맞대고 겨루면 내 상위 검기가 깎여나가며 되려 내가 손해를 본다.
콰앙! 쿵! 휙!
그렇기에 나는 충돌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상대의 공격은 흘리거나 되도록이면 회피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검기를 찢고 검강이 내 검에 닿기라도 했다간 레어 무기라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국 전투는 내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리한 면이 있음에도 카바락은 쉽게 전투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지 못했다.
“크하하하! 신기한 기술을 쓰는구나!”
매혹. 내 스킬의 힘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일정 확률로 발동하는 매혹은 카바락의 시선을 잠시나마 빼앗곤 했으며, 나는 그 틈을 놓칠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순간 시야가 돌아감과 동시에 유리했던 고지를 잃으며 몸에 상처를 늘리는 카바락.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피로 인해 내 체력이 회복되고 미리 흡수해 놓았던 피 덕분에 추가 피해까지 더해진다.
“크아아아!”
쾅! 콰앙!
치명상을 주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고 카바락은 시야를 빼앗기면서도 피해를 최소화 시켰다. 마치 눈과 몸이 완전히 따로 노는 것 같았다. 그러나 큰 상처는 되지 못했고 나는 즉시 반격해오는 카바락의 검을 막아내야만 했다.
‘빌어먹을 야성.’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전투를 최대한 지루하게 끌고 가고 있었다.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이 방법이 그나마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훗날의 위기를 자초하는 방법이 그나마 승률이 높다니, 아이러니가 판치는 상황이었다.
카바락의 상처가 늘어난 만큼 내 몸에도 상처가 늘어만 갔다. 여러 보정과 스킬 효과로 대등한 상황을 만들어 냈지만, 그럼에도 가장 근본적인 경지는 내가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독기를 머금은 내 피 덕분에 카바락의 체력을 갉아먹는 수단이 되어주고 있었다.
“독인가.”
광기에 찬 눈동자와 흥분에 찬 기합성과 다른 냉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마치 이중인격 같았다.
카바락은 조금 짜증나하는 얼굴이면서도 결코 치사하다거나 비겁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것은 비난할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지들은 정면 대결을 조금 더 명예롭게 여기는 기색이 있는 이상한 놈들이었지만.
“여전히 미친놈들 같군.”
“그게 우리 영웅들의 최고 강점이지.”
나는 불타는 눈빛으로 카바락의 검을 흘낏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검을 둘러싼 검강을. 솔직히 미치도록 부러웠다. 내가 갖지 못한 힘이다. 발을 담갔다 생각했는데 아직 닿지 못한 장소였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도 도달할 거라 생각한다. 나름 발은 담궜었으니까.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갖고 싶었고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검강만 쓸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카바락 정도는 여유롭게 이길 수 있었을 거다. 단기전은 내가 승리할 좋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 주었겠지.
일행은 저 멀리서 우리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S급에 해당하는 이들의 전투다. 일행의 눈에는 아마 제대로 보이지도 않겠지. 그렇기 때문인지 일행들의 눈에는 불안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얼핏얼핏 보이는 내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불안한 기색은 점점 커져만 갔고 내가 밀리는 보습이 보일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주하연이 실드나 회복 스킬이라도 걸어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사샤와 나서윤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카바락이 나 대신 일행을 노렸다면, 분명 난처한 것은 나였다.
상대의 검강에 시선을 뺏기는 사이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지?’
카바락의 검강. 그곳에서 흐르는 마력의 구성, 흐름, 형태 등이 세밀하게 눈에 보였다.
예전에 검강을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자세한 정보를 안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내 불완전한 검강을 내 눈으로 몇 번이나 보았지만 감각으로 느낄지언정 눈에 저리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의아한 것도 잠시. 나는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마력의 눈동자!’
마력의 눈동자. 마력의 흐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마법마저 벨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극도로 강력한 스킬이, 검강의 베일을 낱낱이 벗겨내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마력의 눈동자를 통해 카바락의 검강을 끊임없이 관찰했다. 목숨을 건 전투 중임에도, 나는 필사적로 강해질 방법을 찾고 있었다.
검강을 유지하는 방법, 부딪칠 때의 모습, 평시의 마력 흐름, 소모된 검강의 복구….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검강에 대한 관찰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검강에 대한 관찰을 포기하고 전투에 집중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유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약간의 유리함을 포기하는 대신 미래를 선택했다.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카바락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나는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 제국과 협력하는 것일 뿐.
나는 승리보다는 적당히 상대한 후 빠져나가기를 원했다. 지금 카바락과 싸워 봤자 딱히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내가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상대의 검강을 관찰하고 그러면서 나의 불완전한 검강과 끊임없이 비교했다.
‘출력 차이가 심해.’
‘마력의 배열이 규칙적이고.’
‘마력의 흐름이 생각보다 빠른데?’
진짜배기 검강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불완전한 검강의 차이를 제대로 확인한다.
마력의 눈동자가 없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바락의 공격을 피하고 흘리며 빈틈은 꾸준히 노린다. 어느 순간이 되자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반쯤 본능적으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크흐흐, 아름답구나! 인간 또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1회차 시절의 다양한 전투경험. 그리고 검강과 강함에 대한 집착이 미묘한 균형을 만들어냈다.
본능적인 움직임과 경험에 의한 움직임의 균형. 어떤 의미로 내 전투는 카바락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카바락은 그런 내 움직임이 네임드 급 이상의 오크가 광폭화를 썼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스악!
카바락의 검강을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피하는 동시에 작은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면… 모르는 게 당연하군.’
수련자들 또한 오크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싸우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전투 경험이 쌓여가고 살아남을수록 강해지는 것은 오크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 그들 중 우리 수련자들만큼 죽음의 위기를 겪을수록 강해지는 존재는 없었다.
설령 오크라 할지라도, 수련자들의 성장 속도를 완전히 따라오지 못한다.
내 움직임은 네임드 오크의 광폭화와는 조금 다른 영역이다. 오히려 시스템의 보정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무기술 스킬들과 전투 경험. 수련에 의한 것이 아닌 시스템의 보정에 의해 새겨지는 여러 기술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전투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애초에 이 탑은 수련자들을 용사라는 이름의, 수준 높은 병기로 만드는 장소. 1회차까지 겪은 내가 이런 전투를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카바락이 내 스킬의 부가 효과에 홀려 시선이 돌아가고, 나는 검강의 신비로움에 매혹되어 시선이 돌아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바락과 내 몸은 서로의 목숨을 탐하며 검을 휘둘러가고, 서로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스킬들의 보정으로 인해 꾸준히 회복되는 반면에 카바락은 중독과 체력의 고갈이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러나 나 또한 아주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마력. 마력이 천천히 말라가고 있음을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내 상황을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을 더 뿜어내며 검기의 위력을 높여버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나는 검강에 대한 상념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나 또한 저 검강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크아아아아!”
그러는 와중 야성이 이성을 넘어섰는지 카바락이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간다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지금 타이밍이 자신이 유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앞서 생각했듯, 단기 결전은 나보다는 카바락에게 더 유리한 것이었으니까.
이미 내가 가진 패가 나올 대로 나온 상황. 카바락은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러왔다.
쾅! 쾅 콰아아앙!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 강제로 팽창한 근육 사이로 강한 압력에 밀려 나온 혈액이 사방에 흩뿌려진다. 그리고 그 혈액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흡수되어 나를 회복시키고 문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검강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수많은 보정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밀린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이제는 상위 검기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갖가지 보정을 뚫고 내 흡혈검에 잔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나는 카바락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현재를 버티기 위해서 불완전한 검강을 강제로 뽑아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이 더 빠르게 고갈된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너져가던 공격을 잠시나마 대등하게 버틸 수 있었다.
카바락은 전투에 미쳐 흥분한 얼굴이었다. 내가 검기가 아닌 검강을 뽑아낸 것이 기꺼운 표정이다. 설령 그게 불완전할지라도.
나는, 카바락의 검강을 보며 느꼈던 것들을 하나둘씩 내 검강에 적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