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나연아?”
주하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묻는다.
너무나도 확신을 가진 말에 어째서 그게 정령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혹시 내가 물어온 정보라 그리 말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다. 그녀의 눈에는 정체불명의 알이라고 보이고 있을 테니까.
“언니가 뭘 걱정하시는지 알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거 정령 맞아요. 특이한 기척이지만, 확실해요.”
나연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엘프들이지? 여기 고대 정령이 있다고 한 거.”
“…맞아. 정확히는 원시 정령이 잠들어 있다고 하더군.”
정확히는 1회차에서의 일이다.
“역시… 엘프, 만나보고 싶다.”
나연이 중얼거렸다.
정령사들 끼리는 뭔가 보이는 세계가 다른 모양이다. 이런 것에 한해서겠지만.
“근데, 이거 어떻게 깨우죠? 나연이 말로는 정령이라고 했지만… 봉인되어 있다잖아요?”
깨우려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한다.
뭐, 방법 정도야 대강 알고 있었다. 4층으로 가면 된다고 했었지. 거기에 봉인을 풀 방법이 있다고.
나연은 조심스럽게 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여러분?”
흠칫.
어떤 남성의 목소리.
일행은 즉시 전투태세를 취한다.
“아, 잠시만요 여러분. 잠시만.”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젊은 남성 한 명이 서 있었다.
거대한 짐이 들어있는 짐마차. 그리고 그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
거기에 남자는 마치 흔한 행상인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방랑 상인.”
“오! 저희를 아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저는 방랑 상인, 네비오스라고 합니다.”
내 말에 방랑 상인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방랑 상인이라고 하는 내 말에 잠시 의이한 표정을 짓던 일행. 주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방랑 상인요? 그, 신후 씨의 정보 레벨을 개방시켜줬다는?”
“맞습니다. 그 방랑 상인입니다.”
“이야, 벌써 정보 레벨을 개방시키셨다구요? 이런, 제가 수련자들을 뵙는 첫 번째 방랑 상인인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맞다. 2회차에서는.
‘지금 수준으로도 등장을 알아채지 못하는군.’
신출귀몰한 존재, 방랑 상인. 솔직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짐작도 안 간다. 단지 일정 수준 이상의 던전을 클리어하면 정말 우연히 만나볼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알 뿐. 수준이 정말 높으면 거의 확정적으로 나타난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타락한 정령의 동굴은 확정적으로 방랑 상인이 나타날 수준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연일 확률이 높았다.
1회차에서도 방랑 상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그나저나 수련자분들이 벌써부터 이런 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운이 좋군요.”
젊은 방랑 상인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러분께도 좋은 일이랍니다. 그나저나, 필요한 물품이 있으신 것 같은데….”
방랑 상인은 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알, 고대 정령을 깨우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맞아요.”
방랑 상인은 원래 알았던 건지, 아니며 나연의 말을 통해 알아챈 건지 자연스럽게 정체불명의 알을 고대 정령이라고 불렀다.
“귀하는 아직까지 정보 레벨이 개방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잘 아시네요.”
나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좋은 기회군요. 이 기회에 정보 레벨을 올리시는 것이 어떠신지? 정보 레벨은 방랑 상인을 통해서만 올릴 수 있답니다. 그리고 제게 이용권을 구매하시면, 시스템 상점도 이용하실 수 있구요!”
헤실헤실.
네비오스는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물론 저는 여러 물품들 또한 소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저와 만나신 여러분께는 가장 먼저 정보 레벨을 개방하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나와 의견이 일치했다. 아니, 정확히는 본래 저렇게 먼저 권하는 방랑 상인들 또한 존재한다. 정보 레벨의 유용성을 아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밖에.
나 또한 아키밀리의 권유에 따라 정보 레벨을 올려야 하는 처지기이고 하고.
‘90… 미치겠군.’
정보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시스템 상점에서 쓸 수 있는 포인트를 방랑 상인에게 지불해야 한다. 정보 레벨이 높을수록 지불해야 하는 포인트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특히 일정 구간이 되면 필요 포인트가 급상승한다. 각각 30, 60, 90구간으로, 1부터 30까지는 수월한 편이고, 60까지는 어렵더라도 어떻게 가능한 수준이다. 반대로, 90까지는 정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90이후로는 나도 정보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60에서 61을 가기 위해서는 포인트로만 1천이 필요하다.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100포인트면 시스템 상점에서 최상급 포션을 하나 살 수 있는 포인트다. 1레벨 올리는 데 최상급 포션 10개 가격을 지불하라는 뜻. 물론 방법이 포인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랑 상인의 의뢰를 통해서도 올릴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퀘스트 난이도가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만.
일행들은 여전히 방랑 상인을 조금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일행들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방랑 상인에게 접근했다.
“제 포인트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야, 역시 경험자 다우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정보 레벨을 개방하셨다면, 제가 가진 물품들도 한 번 보시는 것이….”
그것도 좋지만 일단 포인트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튜토리얼 이후 시스템 메시지가 대놓고 알려주는 업적을 얻은 적은 없었다. 물론 포인트는 그런 업적을 쌓으면 크게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층 이상에서 활동을 통해서도 소량씩이나마 쌓이는 것이 포인트다. 거기에 아이템을 팔아도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고. 그거라도 없었다면 내 정보 레벨이 60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미약한 중력의 대검을 비롯해 팔 수 있는 아이템은 모조리 팔아버렸다.
그러자 내가 소지한 포인트를 볼 수 있었다.
-소지 포인트 : 18742
‘제대로군. 만이 넘어?’
소유한 몇몇 아이템을 팔아서 얻은 포인트는 고작 200 남짓이다. 그도 그럴 게, 하층의 아이템이나 튜토리얼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팔 수 없는 것들도 있었고.
애초에 7천을 넘게 소유해 본 것도 튜토리얼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포인트가 일만이 넘는다. 대충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설 스킬과 아이템을 얻으러 돌아다닌 덕분이군.’
아무래도 1회차에서 들었던, 전설 스킬이나 전설급 아이템을 얻으면 포인트를 엄청나게 준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탑의 축복 같은 스킬을 만약 중층에서 얻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그러한 과정이,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나는 정보 레벨을 올리는 데 필요한 포인트를 확인했다.
-정보 LV. 61 - 1000P
이후 90까지는 1레벨당 100포인트가 상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정보 레벨을 최대한 올리겠습니다.”
“…엄청난 양의 포인트로군요. 알겠습니다.”
네비오스에게 18600이라는 포인트를 지불하고 정보 레벨을 72까지 끌어올렸다. 네비오스는 내 정보 레벨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스템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은 많았지만, 당장은 정보 레벨이 우선이라는 판단 덕분이었다. 어차피 정보 레벨이 부족하면 전설급 아이템을 보지도 못하고, 이정도 포인트로는 구입할 수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2만 이상의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일행들은 그리 많은 포인트가 없었지만, 처음 정보 레벨을 올리는 데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지 않다. 1레벨 1부터 시작해서 10까지는 1포인트씩밖에 오르니까. 11부터는 5P씩 상승하고, 30까지 유지된다.
어떻게 따지면 여기도 급상승이라고 할 수 있지만… 30부터는 20씩 상승한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퀘스트 등을 통해서 할인이나 상승이 가능한 만큼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일행들의 동의를 얻어 하유진에게 세계 동화 스킬을 주고는 익히게 만들었고, 하유진은 다량의 포인트를 얻어 정보 레벨을 최대한 올리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나연을 비롯한 일행은 정보 레벨은 10까지 만들었고, 하유진은 정보 레벨 40을 만들 수 있었다.
“…보통 일행은 아니시군요? 역시 선두 그룹이라고 해야 하나….”
네비오스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오늘은 만족스러운 거래를 하고 가는군요. 그런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네비오스는 웃는 얼굴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정보 레벨을 얻으셨지만 아마 저 정령사 님이 바로 정령을 깨우기는 힘드실 겁니다. 레벨이 부족하시니까요.”
그렇다고 방법 뻔히 하는데 하유진에게 갈 스킬을 나연에게 줄 수는 없었다.
“제가 도와드리겠다고 하면서 소개해 드렸는데 그러면 아쉽죠. 그러니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원래라면 정보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알려드린다고 말하며 바닥을 가리켰다.
“아래, 숨겨진 층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세요. 그러면 정보 레벨 10이라도, 알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실 겁니다.”
***
네비오스는 정보를 주고는 자리를 떴다. 다 알고 있는 만큼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일행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잘 되었다며 아래층으로 갈 방법을 찾던 일행은 구석에서 숨겨진 층으로 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아래층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을 뿐 텅 빈 공간이었다.
“…퀘스트, 떴어.”
나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일행은 자세한 내용을 물었고, 나연은 퀘스트 정보를 읊었다.
“오염된 알을 정화하래. 저 샘에 담그면 된다고….”
‘과연 그런 식이었나?’
저런 퀘스트가 없었다면 적당히 엘프를 팔아가며 했을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야 편한 편이었다.
즉시 나연은 퀘스트를 이행했고, 검은빛이었던 알은 샘에 담기자마자 천천히 검은 빛이 빠지기 시작했다.
은은한 흰빛의 알이 되어버렸고, 샘은 꺼멓게 물들었다.
이후 알을 꺼낸 나연은 다음에는 알에 천천히 정령력을 주입했다.
나와 일행은 그런 나연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천천히 정령력이 주입된 알은 빛나기 시작했다.
나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정령력을 알에 주입했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 알에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어… 어어…!”
“부화! 부화한다! 형! 알 부화…!”
“유진아, 조용히 하렴. 나연이 누나가 중요한 시점이잖아.”
한바다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연을 바라보며 호들갑 떠는 하유진을 진정시켰다.
천천히 금이 가던 알이 마침내 부화하고, 안에서 정령이 튀어나왔다.
흰빛의, 어린아이. 성별은 알 수 없었다. 중성적인 외향의 어린아이였다. 여아 쪽에 가까운 느낌이긴 했지만, 남아 같은 느낌도 있었으니까.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손바닥 크기 정도?
페어리. 마치 페어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정령? 저게?”
나서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껏 보았던 카사나 실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실프도 나름 인간 어린아이 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상이 흐릿한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제대로 인간 같은 모습이었다.
꿀꺽.
일행의 얼굴에 긴장감이 깃든다.
정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연이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안….”
“뭐야 이 암 덩어리는.”
정령이 맑은 목소리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내뱉었다.
“씨바 좆같네. 하필 계약자가 이딴 거라고? 야! 때려 쳐! 너랑 계약할 바에 다시 알이 되고 만다!”
정령이 방방 뛰며 욕설을 내뱉었다. 때려 치자느니, 해약하자느니, 날 다시 알로 돌려보내라느니 미친 듯이 지랄 발광을 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라고 묻는 표정.
나 또한 어이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령이… 태어나자마자 말을 해?’
이건, 1회차에 없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