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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48화 (148/317)

# 148

“흐아아아-.”

문을 열기 무섭게 이제껏 보았던 타락한 정령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깊게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막 방으로 들어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보스의 외형은 이제껏 사냥한 타락한 정령과 대체적으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커진 크기와 늘어난 팔과 같은 그림자와 일그러지지 않은 얼굴, 거기에 더해 이제껏 상대했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기운 정도였다.

“저게 뭔….”

한바다의 얼굴이 질렸다는 표정을 만들어 낸다.

내 말에 따라 이제껏 죽인 놈들의 기운이 저쪽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했기에 강할 것은 예상했지만,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빠가 질 것 같지가 않다는 게 더 신기해요.”

끄덕.

일행들은 저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대화를 무시한 채 보스를 바라보았다.

“끼아아아아….”

보스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져간다.

공포스럽고 괴기스럽게 느껴져야 마땅한 얼굴이지만 도리어 앞서 만났던 정령들 때문에 저 표정이 더 익숙하다. 덕분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일행을 향해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행은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끼아아아악!”

우리를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강렬한 살기와 함께 이쪽을 향해 날아든다.

사악!

형체가 흐려지는 듯한 잔상과 함께 정령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마 내 일행의 눈에는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스의 움직임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끌어올린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고 검에는 검기를 끌어 올렸다.

쉭!

나는 내게 달려드는 보스를 향해 검을 마주 휘둘러갔다.

그러자 보스는 내 검에서 느껴지는 위협을 느꼈는지 즉시 하늘로 솟구쳤다.

기괴한 움직임. 관성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한 모습이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보스는 곤충마냥 6개나 돋아난 팔을 휘둘러왔다.

“끼하하하하하!”

미친듯한 광소.

휘둘러지는 팔에서는 묵빛의 칼날이 마구잡이로 발사되었다.

콰콰쾅!

보스방의 벽에 부딪친 칼날들이 커다란 소음을 내뱉었다.

나는 내게 날아오는 칼날들을 피하고 막고 잘라내며 어렵지 않게 공격을 버텨냈다. 슬쩍 시선을 돌려 일행을 바라보자 구석에 뭉쳐 보스의 공격에 겨우겨우 대응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홀로 보스방에 들어오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전투에 참여해 버텨보는 것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특히 이런 상황이면 버티기만 해도 레벨이 오를 거다. 게다가 내가 있는한 목숨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고. 위험하면 조금 도와주면 그만이니까.

사방팔방에 묵빛 칼날을 날려 일방적인 공격을 펼치던 보스가 잠시 공격을 멈춘다.

공격 덕분에 일어난 짙은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지만, 보스나 나나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만한 놈은 아니었다. 나는 보스가 공격을 멈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즉시 하늘 걸음을 이용, 허공을 밟고 보스를 향해 접근했다.

“끼아악!”

설마 하늘로 솟구칠 줄은 몰랐는지 보스가 경악한 것이 느껴진다.

보스는 빠른 편이지만, 그렇다고 내 속도가 부족할 리가 없었다.

현재 하늘 걸음은 여전히 슈퍼 레어 수준이다. 그래도 열 걸음 이상 날아다닐 수 있었고 그럭저럭 검을 휘두룰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힘을 제대로 싣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나는 검에 검기를 집중, 중첩시킴으로써 검기의 파괴력 자체를 올려버렸다.

힘의 전달이 부족하면, 검기의 성능을 올린다. 나는 순식간에 보스에게 접근했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쉬익!

“끼아아아아!”

팔 두 개.

내 공격에 대응한 보스는 즉시 가속하며 몸을 피했지만, 완벽하게 피해내지는 못했다. 그 대가로 보스는 팔 두 개를 잃었다. 그러나 다음 상황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빠! 팔!”

나서윤의 외침. 그 말과 함께 잘려진 팔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팔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는 3층의 타락한 정령들이 보여주었던 기술을 떠올림과 동시에 하늘 걸음을 이용, 즉시 이동하며 지상으로 빠르게 낙하했다.

쿠쿵! 쾅!

부글부글 끓던 팔이 폭발하고 사방을 향해 다시금 묵빛 칼날을 난사한다.

지상에 도착함과 즉시 목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나는 즉시 몸을 회전함과 동시에 날아오는 칼날들을 재빠른 검놀림으로 쳐내고 다시금 자리를 벗어났다.

콰앙!

“끼아아아!”

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있던 자리를 짓뭉갠다.

‘만만하진 않네.’

모든 정령을 처리해 정령을 최대로 강화해 놨더니 그냥 처바르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나는 일행을 다시 살폈다.

주하연이 남은주를 치료하고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 두 팔의 폭발로 인해 일어난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보였다.

이대로 천천히 압박해도 이기긴 할 거다. 하지만 이놈도 숨겨 놓은 것이 그게 다는 아닐 터.

1회차에서는 아무래도 모든 정령을 처리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내 현재 수준이 거대 길드의 1군 파티원 수준인데, 이놈은 그런 나와도 수월하게 싸우고 있었다. 물론 능력치 평균 80수준이라 극한 활성화를 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1군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보스 놈이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 파티원들 수준이 내심 회귀 전 이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놈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내 파티원들로는 이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새 내가 접근하고 정령이 물러나며 묵빛의 칼날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뒤바꼈다.

내가 압박하고 보스가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

보스는 때때로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나를 따돌리려고 하거나, 어긋난 타이밍에 하늘로 도주, 때때로 몸 파편을 스스로 떨궈 예의 폭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공격을 무난하게 막아내고 즉시 반격해 들어갔다.

전투가 지속되자 정령이 조금씩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 이성이 있군.’

보스답게 다른 놈들처럼 아예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랬다면 더 쉽게 죽일 수 있었을 터. 이번에도 보스를 향해 접근하려는 찰나.

스르륵-.

“…어?”

나는 나도 모르게 얼빠진 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사, 사라졌어!”

일행들 또한 놀란 듯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뱉었다.

‘은신!’

갑자기 허공에 녹아들듯 보스가 사라졌다.

시선을 떼지도 않았는데, 그 존재감이 흐려진다.

마치 전설급 은신 스킬인 세계 동화(同化)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저건 그냥 세계 동화가 맞았다. 시스템 상점에서밖에 볼 수 없는 특별한 스킬.

설마 저런 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짜증 나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솔직히 위협적이지만 대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행을 조금 신경 쓰면서 싸워야 하는 내 입장 상 성가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보스가 은신을 씀과 동시에 앨거차의 문신을 극한 활성화 시켜버렸다.

이번 전투에서 바리치의 문신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까놓고 말해 저들은 피가 없으니까. 물론 바리치의 문신 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증가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고 생각한다. 이건 결국 상대의 에너지를 내것으로 만드는 스킬이니까.

하지만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

[앨거차의 문신이 극한 활성화 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p증가합니다.

-마력을 보는 눈이 개방됩니다.

-제6감이 개방됩니다.

-마력 순환 속도 추가로 2배 증가합니다.

몸에 활력이 넘친다. 내 능력치가 평균 80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평균 90을 조금 넘는 수준에 이르른다.

근력은 90을 돌파했고 마력 또한 90을 돌파한다.

꽈드득.

주먹을 쥐는 손에 느껴지는 근력의 차원이 다르다.

최상위권 수련자들이나 체감해 봤을 느낌.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6감이 신호를 보낸다. 나는 대각선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지 않아야 할 보스의 모습이 보였다.

‘마력의 눈동자.’

스킬의 힘이다.

앨거차의 문신을 극한 활성화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보스는, 나를 무시한 채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나와 보스의 눈이 마주친다.

보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눈이 마주칠 리가 없다는 듯한 반응. 하지만 본능이 앞서기 때문인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즉시 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서걱.

“끼, 아아아아아악!”

내 급격한 접근에 보스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비명이 공동을 울린다. 이제까지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 마력이 미친 듯이 체내를 돌고 있었다.

내심 후유증이 걱정될 정도였지만 지금 당장 느껴지는 충만한 느낌에 그런 걱정은 단숨에 사라질 지경이었다.

나는 단숨에 한쪽 팔 3개를 동시에 끊어버렸고, 이내 팔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마력의 눈동자로 보이는, 오염된 정령력의 흐름이 보였다.

슥-

3개의 팔을 가볍게 긋자 부글부글 끓던 팔이 천천히 분해되며 허공에 녹아든다.

그런 내 모습에 정령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세계 동화를 사용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인식이 불가능한 속도로 접근한 뒤 나는 상대의 팔, 몸통, 머리를 연속으로 베어버렸다.

그러나 우습게도, 보스는 죽지 않았다. 머리만 남은 채 공중으로 솟구친다. 나는 남아있는 신체 파편을 베어 폭발을 막아내고는 하늘 밟기 스킬을 이용해 보스의 머리를 쫓았다.

숙련도가 부족하지만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아 제법 튼튼해진 덕분에 공중에서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끼, 끼에! 끼에에엑!”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발버둥 치는 보스를 끝까지 추격한다. 보스는 방의 구석까지 도망쳤고, 마침내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다시금 세계 동화를 사용한다. 쓸 수 있는 수단이 바닥난 모양. 나는 그런 보스의 머리를 세로로 쪼개버렸고.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곧바로 던전 클리어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이게… 보상?”

보스를 쓰러뜨리자 방 중앙에 아이템 3개가 튀어나왔다.

하나는 정체불명의 알. 하나는 스킬 카드. 다른 하나는 아이템이었다.

1회차 보상 중 저 정체불명의 알 때문에 다른 보상은 조금 묻힌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분명 저 보상은 아니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고대 정령의 알이 대단한 보상이라고 해도 전설 등급의 스킬 카드를 묻어버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정체불명의 알]

-알 수 없는 존재가 잠든 알입니다. 봉인되어 있습니다. 봉인 해제를 위해서는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세계 동화(전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용 시 은신 상태에 접어든다.

-특별한 스킬이 없는 한 감지되지 않는다.

[오염된 그림자 단검]

-등급 : 슈퍼 레어

-명인이 만든 단검에 오랜 시간 뒤틀린 정령력이 부여되어 특별한 힘을 지니게 된 단검이다.

-공격력 : 55

-옵션 : 스킬 그림자 칼날 사용 가능

보상이 하나같이 좋은 편이었다.

아니, 엄청 좋았다.

정채 불명의 알이야 기다렸던 고대의 정령이고, 세계 동화 스킬은 1회차에서도 시스템 상점 덕분에 알려진 스킬이며, 오염된 그림자 단검은 단검 주제에 내 흡혈검 보다도 높은 공격력에 추가 스킬까지 붙어 있었다.

물론 흡혈검은 적을 베면 벨수록 강해지는 특성 덕분에 차후 공격력이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염된 그림자 단검의 공격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림자 칼날은 확인 결과 오염된 정령들이 사용하던 그 묵빛의 칼날이었다.

마력을 제법 잡아먹긴 하지만, 좋은 스킬이다.

사거리도 제법 되고.

그러나, 나는 그런 보상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크으….”

더럽게 아프다. 되도록이면 극한 활성화 없이 이기고 싶었다.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이전에도 느꼈던, 혈관이 저리고 몸을 쥐어짜고 부수는 듯한 고통. 물론 던전에서 느꼈던 고통보다는 덜 했기에 참을 만하기는 했다.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진다.

“오빠!”

“신후 씨!”

나는 호들갑 떠는 일행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는 편이었다.

“기다…려요. 금방 괜찮아지니까.”

나는 2분 정도 고통에 떨어야만 했다.

그사이 주하연이 수없이 내게 회복 스킬을 퍼부어준 덕분에 조금 시간이 줄어든 듯했다.

일행은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다.

다행히 최대한 짧게 사용한 덕분에 후유증이 크지는 않았다. 영구적인 손상도 거의 없는 편이었고. 불사의 육체 스킬이 몸을 복구하는 것이 느껴진다.

팔을 확인하자 앨거차의 문신이 비활성화 상태였다.

“후우….”

“괜, 괜찮아요?”

“아, 스킬 부작용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괜찮을 리가… 오빠가 그렇게 아파하는 것 처음 봤단 말이에요!”

“아니, 괜찮으니까. 그것보다 지금은….”

나는 일행들의 말을 틀어막으며 손짓으로 알을 가리켰다.

“저걸 확인해 보자고.”

내 말에 일행들이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비췄지만,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아직 마을로 복귀한 것도 아닌 상황인 데다 나연을 생각했기 때문인지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알 쪽으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주하연이 내게 회복 스킬을 몇차례 더 퍼붓긴 했지만.

나연은 그딴 거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내 몸 상태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내 재촉에 강제로 알 앞으로 이동당했다.

그리고, 알에 시선이 가는 순간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이거 진짜 정령 맞아요? 정체를 알 수 없다는데….”

일행은 다른 것은 제쳐두고 알부터 확인하고 있었다.

다른 두 개는 정령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그랬으니까.

주하연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봉인? 조건 만족?”

하유진도 의아한 기색이다.

“혹시 이 스킬 카드가 정령 소환 스킬이라거나 그런 거 아닌 겁니까?”

한바다는 스킬 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사이 주하연이 내게 묻는다.

“저기 신후 씨, 이거….”

“정령 맞아요.”

나연의 단호한 말에 일행의 시선이 돌아간다.

“이거, 정령이에요.”

나연은 확실하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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