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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46화 (146/317)

# 146

“…틈이 생각보다 크지는 않네요.”

삭월 밤.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에는 달 대신 별들이 가득했다.

“엘프 장로가 그리 허술하지는 않으니까요.”

“끼아아아아….”

흠칫.

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온 귀곡성. 정령이라기보다는 유령의 울음에 가까웠다.

“…으스스하네요.”

우리는 동굴 입구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 되면 보통 타락한 정령이 저 틈으로 새어 나오기에 내심 한두 마리 나와서 상대해 보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올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들어가는 것이 낫겠군요.”

“…맞습니다.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한바다는 이런 계통이 별로 강하지 않은 듯했다.

겁먹었다기보다는,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

하기야 괴담으로나 들었던 유령이 실존하는 세상이니까.

“말씀드렸다시피, 타락했더라도 정령은 정령입니다. 하연 씨의 악마 심판이 제대로 먹힐지는 몰라요.”

“네. 일단 시도만 해 보고 안 통한다 싶으면 바로 물러설게요.”

“천국의 분노는 통할 겁니다. 하지만 좁은 동굴 내부인만큼 조심해주세요.”

“물론이에요.”

나는 나머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연이는… 아마 정령의 등급이 부족해서 큰 데미지가 들어가지는 않을 거다.”

“…응.”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왔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자괴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열등감을 크게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와 대화했던 것도 그렇고, 확실히 나아져 가는 모습이다. 반려동물 테라피나 한바다가 그녀에게 제대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나연의 등을 한바다가 가볍게 쓸어준다. 위로하는 듯했다.

나연의 표정이 풀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최소 검기. 그것이 없으면 데미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신후 오빠, 제가 방어할 수 있을까요?”

“스킬을 쓰면. 게다가 네 수호에는 도발도 붙어 있으니까.”

남은주의 수호에는 도발이 붙어 있었다. 그에 반해 한바다의 수호에는 도발이 없었다. 같은 등급에 같은 이름의 스킬인데도 불구하고 남은주의 스킬이 명백히 우위였다. 확실히 당대 최고의 성기사로부터 계승 받은 스킬은 조금 특별했다.

“사실상 현재 우리 일행 중 데미지를 주지 못하는 인원은 없습니다.”

끄덕.

하유진도 현재 검기를 쓸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미약하긴 하지만, B등급 용병 수준이라는 뜻이다.

특히 남은주는 신성력으로 검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공격적인 능력이 부족한 신성력. 그것으로 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마력으로 검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비해 난이도가 한 단계 높았다. 그런 주제에 공격력을 부족하고. 내가 마력을 신성력으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였다. 남은주는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바다는 이미 미궁에서 가능한 수준이었고-비효율적으로 만들어내기에 충고를 해줬고, 금새 익혔다-나서윤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검기, 마법, 오러를 통한 신체 증폭까지.

나는 검기의 중첩이나 압축까지 가능한 수준이고. 이 너머는 이제껏 내가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나는 1회차 시절,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담그다 만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게, 능력치가 너무 모자랐다. 그나마 발이라도 담갔으니 무족한 몸뚱이로 잠시나마 검기의 중첩이나 압축이 가능했지.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당시의 나는 상당히 좌절했었다.

최상급 엑스퍼트(expert). 그게 현재 내 수준이었다. 기회만 된다면 마스터를 노려볼 수 있는 상태였다.

일행 중 근접 계통의 경지를 따지자면 전원 엑스퍼트. 남은주와 하유진은 입문 수준, 한바다는 하급, 나서윤은 중급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나서윤의 레벨에 비해 경지가 상당했다. 어마어마한 재능과 나의 수많은 지원,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렇지만 마력은 무한하지 않죠. 잡다한 정령을 상대해야 하는데도 아낌없이 검기를 뽑아내야 하니까요.”

사실이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며, 천천히 진행할 생각입니다.”

“현명한 선택이에요.”

주하연 또한 동의했다.

안전주의. 목숨이 걸린 만큼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를 필두로 천천히 일행이 결계의 틈을 타고 동굴 내부로 이동했다.

[타락한 정령의 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본디 이 장소는 정령들이 무엇인가를 지키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천천히 정령들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령들은 저항했지만, 시간을 거스르지는 못했고 결국 이 동굴은 타락한 정령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목표 : 던전 내부의 타락 원인 제거 / 타락한 정령 전원 살해

-보상 : ???

던전에 입장하자 메시지 창이 시야를 가렸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결국 던전 내부의 모든 정령을 치우면 완료가 되니까.

“…그냥 다 잡으라는 거네요.”

끄덕.

“끼아아아아!”

우리가 던전 내부에 입장한 것을 느꼈을까. 즉시 어디선가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저 멀리, 타락한 정령들이 이쪽을 향해 우르르 달려온다.

새까만 모습의 일그러진 정령. 마치 그림자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형태는 이지러졌고 얼굴로 추정되는 부위는 흔들리는 잔상처럼 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으로 분노나 증오를 표현하는 모양새였다.

“흉측하네….”

나연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혐오감보다 동정심이 더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하연은 즉시 악마 심판 스킬을 사용했다.

“끼아아악!”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닌지 달려오던 타락한 정령이 주춤한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달려들어 오는 모습이었다.

“…효과가 약해요.”

달려오는 타락한 정령은 하나가 아니었다. 맨 처음 달려오는 이를 필두로 뒤로 셋의 정령이 더 달려들었다.

“우선, 제가 처리합니다.”

나는 즉시 검을 뽑아내고는 검기를 둘렀다.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몬스터를 상대로 검기의 중첩 및 압축은 마력의 낭비에 불과햇다.

“흡!”

나는 빠르게 마력을 활성화 회로를 깨움과 동시에 내 몸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일행은 그사이 전투 대형을 맞추고 있었고, 나서윤은 천천히 만들어지는 자신의 스타일 대신 마법사마냥 후방의 위치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는 만큼 마법사의 역할을 할 셈인듯했다. 나설 일은 없겠지만.

내가 앞으로 달려나감과 동시에 타락한 정령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마치 화면을 당기는 듯 정령의 모습이 급격하게 커져갔다.

“끼아…!”

샥!

허공을 베는 감촉.

검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큰 저항력이 없이 내 검은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정령에게는 달랐다.

내가 급속도로 가까워져 오자, 그 속도에 놀라기는 커념 곧바로 몸에 팔 같은 것이 돋아나며 내 몸을 향해 휘둘러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었고, 정령의 몸이 두 개로 나뉘었다.

“키아아아아아악!”

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스러운 비명. 그것에 마력이 담겨 있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조금 마력이 흔들렸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몰랐던 디테일한 정보. 역시 직접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정보다.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내게 달려오는 세 마리의 정령을 향해 각각 검기를 두른 검을 한 번씩 휘둘러 주었다.

셋마저, 전혀 저항 없이 몸통이 갈려버렸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치명상이 되는지 갈라진 채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림자들은 천천히 허공에 녹아들었다.

생각보다 약하다. 나는 타락한 정령들의 적정 레벨을 50정도로 잡았다.

‘경험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반적인 물리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인지 검기나 마법에 상당히 취약한 모양이었다.

현재 일행들의 레벨은 평균 35. 객관적인 레벨은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일행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애초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데려온 것이 맞기는 하지만.

“…약하네요? 아니, 아니에요. 신후 씨가 너무 강하네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레벨은 60중반이고 능력치는 어지간한 70~80레벨 수준에 다다랐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성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속도도 빠르고 공중을 날기 때문인지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더군요. 게다가 비명에는 내부의 마력을 흔드는 기능이 있습니다.”

나는 적당한 양의 정보만 제공했다.

“…역시 신후 씨가 강했던 것뿐이네요. 말로만 들어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데….”

주하연의 중얼거림.

나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경험치도 제법 주고 순간적인 대응도 필요한 만큼 싸워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솔직히 경험치만 줘도 싸워야 한다. 성장을 하려면 레벨이 필요하니까.

일행은 내가 전해주는 정보를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키퍼는 제가 봅니다. 각자 나서서 싸워 보시는 것이 좋겠군요.”

“신후 씨가 키퍼를요?”

주하연이 놀랍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네. 서윤아. 너도 전열로 이동해.”

“네. 오빠.”

“…뒤를 걱정할 일은 없겠는데….”

나연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린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저는 백업이라 생각하고 움직이세요. 음? 또 오는군요. 다들 전투 준비.”

내가 넷을 쓰러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굴 저편에서부터 괴성이 들려온다.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지만, 아직 초반 구역이라 피할 곳도 없었다. 별수 없이 당분간은 모조리 상대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끼아아아!”

“유진아, 나 보조 좀.”

“네, 바다 누나.”

“은주 언니, 제가 뒤 받쳐드릴게요. 일단 쟤들 능력치 파악부터….”

내 일행은 자연스럽게 둘씩 짝을 지어 날아오는 타락한 정령들을 상대했다.

나연은 중간중간 원거리에서 도움을 주었고 주하연은 틈틈히 전투를 보조하며 힐과 보호막을 넣어 주었다.

‘정화의 대지를 쓰면 어떻게 되려나?’

나는 일행의 능력이 정령들에게 어떤 효과를 줄지 생각하며 전투를 냉정하게 살폈다.

당장 나연이 일행을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타락한 정령들의 어그로는 일행에게 쏠려 있었다.

이번에 날아온 이들은 다섯.

한바다 쪽에 둘, 남은주 쪽에 셋이 붙었다.

남은주는 자연스럽게 수호 스킬을 사용했고, 한바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의 효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한바다 쪽은 평소와 비슷한 반면, 남은주 쪽은 버서커라도 되었는지 아주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통해요!”

“데미지도 거의 안 들어와!”

남은주와 나서윤은 급한 와중에도 제법 괜찮은 호흡을 보여주며 천천히 정보를 파악하는 것에 우선을 두었고.

“유진아 잘 잘려?”

“아뇨, 생각보다 질겨요. 형은 가볍게 잘랐는데….”

“스킬 보정은 정확히 먹혀. 어그로 튄다 싶으면 바로 빠져. 나는 도발이 안 돼.”

“네. 누나.”

한바다 쪽은 정보를 파악하면서도 조금 더 빨리 쓰러뜨리는 것에 우선을 두었다.

둘의 스타일 차이였기에 나는 방관은 택했다.

“끼아아아아!”

잠시 시간이 지나자 한바타 파티가 먼저 정령을 처리했고, 곧바로 남은주 파티를 돕기 시작했다.

“주하연 씨.”

“네.”

“정화의 대지를 한 번 써보시겠습니까?”

“…정화의 대지… 아. 알겠어요.”

곧바로 주하연은 정화의 대지를 사용했고, 바닥으로부터 신성력이 올라오자 일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다 처리한 마당에 갑자기 스킬을 쓰다니 의아해하는 것.

정화의 대지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악마 심판은 조금이라도 영향을 줬지만, 이건 그냥 없다시피 했다.

나는 손짓으로 계속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방어만 하던 일행은 곧바로 마지막 남은 타락한 정령을 처리했다.

전투가 끝난 후 주변을 살피며 한동안 긴장을 놓지 않던 파티원들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더 습격해 오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아요.”

“하긴, 끝없이 계속 왔으면 이쪽 체력이 먼저 무너졌겠지? 아무래도 입구 쪽에 있던 이들만 우리 기척을 느낀 모양이야.”

“어땠어? 직접 상대해본 타락한 정령들은?”

“그게 언니, 생각보다 세. 오빠가 그냥 센 거야. 내가 최선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잘리기는 하지만….”

“맞아요. 생각보다 저항이….”

“스킬은 먹히는 것 같아요. 도발도 확실히 걸리고….”

“방어 보정도 제대로 되는 것 같았다. 저들 속도가 가까이 있을 때는 생각보다 빨라. 특히 방향 전환이….”

전투가 끝나고 위협이 적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자 일행은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좋은 현상이다. 그 와중에도 하유진은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궁수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 파티에는 궁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도적인 하유진이 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성장 잘했네.’

이전에는 그 상승한 능력을 보았다면, 지금은 새로운 유형의 몬스터를 상대함에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마음가짐이나 태도도 이제는 명백하게 수련자라고 쳐줄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더 성장하면 내가 했던 것처럼 미리 정보도 알아 올 테고, 미리 분석도 하고 오겠지. 내가 알아 오긴 하지만, 각자 스스로 준비하는 과정도 필요하니까.

나는 내가 기억하는 타락한 정령의 동굴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동굴 내부 깊숙이 들어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지하로 갈수록 정령들의 수와 질이 높아진다. 지금 당장은 수월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이도는 높아질 터다.

그리고 나연이 필요한 알은 3층에서 얻겠지만, 히든 층에도 반드시 들러야만 했다.

전체 층수 3층. 히든 층수 1층. 총 4층에 달하는 타락한 정령의 동굴.

그 공략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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