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타락한 정령의 동굴
재나 영지. 엘프&드워프 연합에 가장 가까운 영지였다. 영지에 도착한 이후 나는 필요한 물품만을 구입해 준비한 뒤 곧바로 접경지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내가 이전에 왔을 때 모았다는 정보라며 밑밥을 깔고는 자세한 이야기를 풀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래. 처음에는 단순한 소문이었어. 접경지에 이상한 동굴이 나타났다더라.”
“동굴?”
“응. 괴이한 악령들이 나온다고. 엘프들이 또 무슨 수를 쓰는 것은 아닌지, 최근 오크와의 전쟁도 격해지는 와중에 엘프들이 뭔 수를 쓰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었지.”
“악령과 엘프라… 연관이 잘 안 되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신경 끄고 수련에만 집중했죠. 개소리하지 말라고. 그런데 친해진 놈이 들어 보라며 자꾸 이야기하더군요. 악령이 아니라, 정령이라고.”
“정령…요?”
“응. 정령. 그런데 그 외향이 너무 기괴해서 다크 엘프들이 흑마법으로 정령을 타락시킨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들렸어. 뭐, 금새 헛소문이라는 말이 퍼졌지만.”
정령과 공생 관계인 엘프가 정령을 타락시킬 리가 없었다. 그러다 정령들과 관계가 나빠지면 엘프들의 힘은 반 토막,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 아래가 될 수도 있었다.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라도, 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사는 계속되었고,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은 그게 정령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진짜로, 타락한 정령이라고.”
“그럼 설마….”
진짜 엘프가 타락시킨 거냐는 듯한 의문. 하지만 아니다.
“아니, 근데 그것도 아니라더라. 엘프들도 인간들이 자신들의 접경지에서 뻘짓을 하니 그들 또한 조사를 나왔는데, 전원 사망했다고 하더라.”
“…….”
엘프들이 타락한 정령의 손에 죽었다.
일행이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연기로 보기도 웃긴 게, 엘프들은 어떻게든 정령들을 ‘설득’하려고 했나 봐. 그게 설득한다고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뭐, 정령의 전문가는 엘프들이니까.”
설득. 일행의 얼굴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게 설득한다고 타락한 정령이 원래대로 돌아오나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안 됐다고 해요.”
“…그런 자세한 정보를 용케 모으셨네요?”
“…운이 좋았죠. 나름 정보통인 놈이랑 친해졌는데, 뭐 쓸만한 이야기 없나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 무시하려고 했는데… 듣다 보니까 무시할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더군요.”
너무 자세히 풀었나?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이건 실제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1회차에서는 더 나중이지만 결국 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경로로 알려졌다고 한다. 던전을 찾기 위해 옛날의 특이한 소문이나 역사적 일들은 뒤지는 것은 수련자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짓이다. 정보만 정확하면 거의 대부분 성과가 나오기 때문. 복권 긁기 같은 거지만 확률이 높다 말할 수 있었다. 뒤탈은 없다.
“아무튼 덕분에 인간들도 엘프들이 만든 정령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자작극이라고 보기에는… 정령의 상태도 너무 좋지 않았고요.”
“음….”
“아무튼 인간들은 엘프들의 자작극만 아니라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죠. 그 뒤로는 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정찰만 했다고 합니다. 말했듯 당시 오크와의 싸움이 격해진 상황이라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정령을 강제로 타락시킬 수 있다면 좋은 무기가 생기는 거라며 탐험하길 주장했던 마법사나 연금술사도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엘프들이 그 동굴에 접근했죠.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타락한 정령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결국, 엘프들은 큰 결심을 한다.
“정화가 안 된다면, 안식이라도 주기로 한 거죠.”
“…설마….”
“응. 청소하려고 한 거지 뭐.”
나연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정령사인 만큼 더 감정 이입이 되는 모양.
“그럼 청소가… 됐으면 갈 일이 없겠네요.”
“네 맞습니다. 예상대로, 청소는 실패했어요. 수많은 엘프가 죽었고, 제국은 그 동굴에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동굴 외부로 거의 나오지 않던 타락한 정령들.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엘프 집단이 움직였고, 200에 가까운 정예들이 뭉쳤다고 한다.
그리고… 다 죽었다.
“엘프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는지, 수많은 타락한 정령들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와 일대를 초토화 시켰다더군요. 그렇게 보인 정령의 수가 수천은 될 거라고.”
“…수천, 이요?”
“네. 수천요.”
“…저희 지금 거기 가는 거 아니었어요?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가지.
“네. 가능합니다. 왜냐면, 그 날뛰는 타락한 정령들을 막기 위해 장로가 나타났거든요.”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엘프 정령사. 타락한 정령들의 난동에 기겁한 장로가 나타나, 대부분의 정령을 처벌하고 동굴 입구를 봉해버렸다고 한다.
“그쪽도 기겁 한거죠. 접경 지역에 이딴 난동을 부리는 타락한 정령 부대. 딱 자기들이 의심받기 좋은 상황 아닙니까?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라, 이거죠.”
“…그렇군요.”
“덕분에 입구가 사실상 봉인되었지만… 완벽한 봉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제국에서 확인한 결과, 한 달에 한 번, 달이 없는 밤이면 봉인이 약해지는지 타락한 정령들이 때때로 흘러나온다더군요. 큰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라 방치했다고 들었습니다.”
“허… 그럼 설마….”
“네. 곧 있으면 삭월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틀 뒤죠.”
“…하기야 신후 씨가 어떤 사람인데….”
익숙하다는 모습.
“엘프들이 대량의 정령을 정화한 이후, 타락한 정령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기운이 팍 줄어들었다고. 저희들 수준이면 충분하다는 판단입니다.”
“신후 씨가 그렇다면 맞겠죠 뭐.”
주하연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정지.”
한 병사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다.
어느새 일행은 접경 지역에 도착했고, 병사들의 검문을 받았다.
B급 용병패와 적당히 꾸민 목적을 말하고 황제가 준 텔레포트 자유 이용권(…) 또한 제시하자 병사는 별다른 말 없이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엘프&드워프 연합과 충돌이 없는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그리 검문이 빡빡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통과가 쉽네요?”
“뭐, 최근에는 이쪽에서 전투가 일어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이 패 덕도 좀 봤고요.”
마탑의, 그것도 중앙 마탑의 인장이 떡하니 박힌 패다. 통과가 어려우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위조? 소식이 중앙 마탑으로 넘어갈 텐데, 평생 마법사들에게 쫓기고 싶으면 뭔 짓을 못 할까?
사실, 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몸수색 좀 하고 그냥 지나갔을 테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우리는 내가 이끄는대로 중립 지대 쪽으로 빠져버렸다.
지구의 유럽과는 다르게 선 하나 넘으면 국경이 바뀌는 방식이 아니라 이러한 중립 지대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동굴, 타락한 정령의 동굴은 이 중립 지대에 위치했다.
타락한 정령의 동굴은 숲속에 존재했다.
중립 지대에는 몬스터가 조금 있었지만,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줄 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경험치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가볍게 그들을 쓰러뜨리고는 이틀간 쉴 장소를 물색했다.
장소를 정해 베이스캠프를 만든 뒤, 동굴의 정학한 위치를 파악한다고 말한 후 동굴을 수색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행히 기억이 정확했고, 그 특유의 기운 덕분에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저게 신후 씨가 말한 타락한 정령의 동굴인가요?”
“맞습니다.”
“…확실히 엄청 꺼림칙하네요.”
“저도요, 신후 오빠. 이건 좀….”
신성력을 가진 주하연과 남은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상당히 변질된 것 같아요. 이거 언니가 가져도 괜찮을까요?”
나서윤은 조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괜찮을 것 같아.”
그와는 반대로 나연은 되려 침착해하는 기분이다.
“왜 엘프들이 설득을 시도했는지 알 것 같아. 저건 그냥… 정령력이 꼬인 것 같은 기분이야. 어떻게든 풀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정확히는 꼬이게 하는 원인만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그게 내가 이곳에 온 목표다.
‘고대 정령의 알.’
그것이 이 일대 정령을 타락시킨 원흉이다. 그것만 빼내어 나연이 소유하면, 이 장소는 제대로 정화된다.
아마 엘프들이 엄청 좋아할 걸?
‘…그래도 그년은 만나기 싫은데….’
어쩌면 엘프들에게 초대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받을 거다. 솔직히 사양하고 싶기는 하다. 조금 짜증나는 여자가 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당장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봉인이라고 했던가요? 제대로네요.”
주하연은 그사이 봉인을 살펴본 듯 이건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삭월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정보대로라면 일단 그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또 휴식인가요?”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해 두죠.”
내 말에 주하연이 가볍게 웃었다.
던전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들어가야 하는데, 훈련을 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강한 몬스터가 안 보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정찰과 경계는 합니다. 유진이와 서윤이가 조금 고생할 테니, 나머지 일행들도 잘 도와주세요.”
“그건 당연한 거죠, 신후 오빠.”
남은주가 물론이라는 듯이 말한다.
나는 잠시 남은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베이스캠프로….”
“저기, 신후야.”
“응?”
“조금만, 조금만 더 보다 가면 안 될까?”
나연이 뭔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래라. 저와 나연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일단 베이스캠프로 복귀하고 주변 경계를 해 주세요. 유진아, 미안한데 고생 좀 해라.”
“에이, 형, 고생이라뇨. 걱정 말고 천천히 오세요.”
하유진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새삼 하유진이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나연을 제외한 인원이 베이스캠프로 복귀했고, 나연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동굴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묵한 채로 그런 나연을 기다려 주었다.
“…고마워.”
“뭐가?”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
“미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엄청 배려를 해 줬잖아. 기희 언니 파티라던가. 나 때문에 일찍 영입한 거 아니야?”
맞다.
“그녀 쪽 파티가 실력이 나쁘지 않아서….”
“이번 던전도 기껏 수련 나가서 알아올 정도였으니, 아마 떠나기 전부터 제법 티가 났나 봐. 역시 넌… 되게 사람들을 잘 보는 것 같아. 네가 왔을 때, 내가 다른 파티에 있어서… 기분 나빴을 텐데 되려 그 사람들을 영입해주고, 산미가 폭언을 했는데도 너그럽게 넘어가주고… 그 뒤로 따로 불이익도 안 줬잖아.”
개가 짖는다고 일일이 신경 쓰면 어떻게 하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네 덕분에 정말 안정이 되었어. 게다가 이렇게 강해질 기회도 주고…. 그게, 너무 고마워서.”
나연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 싶었어. 정말, 고마워. 신후야.”
뭐라 또 습관적으로 핑계를 대려던 나는 이게 뭐라고 또 핑계를 대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솔직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을 했는데 핑계를 대는 것도 웃겼다.
“…넌 내 팀원이고, 친구니까.”
그렇기에 나는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서윤이 때문이 아니라?”
움찔.
정곡이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속이 찔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나서윤이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나연을 신경 썼을까? 의문이 들었다.
“없다고는 못 하겠네.”
“기다리기로 했다며?”
“뭔….”
나연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8살차인데… 키잡… 아니 이건 역키잡인가?”
…저런 말은 또 어떻게 안 거지?
“하기야 네가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서윤이가 그러는 건데… 내가 뭐라 하기도 그렇네. 네가 하연 언니랑 그렇게 되고 고민 많아 보였는데… 역시 자기가 너무 어려서 그렇다고… 근데 최근에는 많이 안정되었어. …뭐 솔직히 내 동생이 세컨드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흠도 아니니까.”
나연이 말을 이었다.
“어린애 고민이라고 대충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용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너?”
“서윤이를 마냥 어린애라고 하기에는 힘든 애니까.”
행동은 내게 매달리고 순종적인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결코 그런 애는 아니다.
나한테만 그럴 뿐.
“역시 넌 관찰을 잘해.”
“…….”
“서윤이 잘 부탁해. …기다려주겠다는 말도 고마워. 이것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그건 가 봐야 알지 20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내게….”
나연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 알고 있었다. 나서윤은 절대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 알았다.”
“응.”
그 뒤로 한참 동안 나연은 동굴을 바라보더니,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노을을 바라보며,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나연의 얼굴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