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황실 창고.
수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는 장소.
제국에 큰 공을 세운 경우, 보통은 꾸준히 오크를 섬멸해 공적을 쌓거나 한 번에 커다란 공적을 세운 이들이 때때로 기회를 얻어 출입한 장소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설급 아이템을 들고나왔으며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 그대로 제국의 보물창고라고 말했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정말 흔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 창고가 완전히 개방된다면 랭커가 두 배는 늘어날 거라고 장담했었다.
“1등급을 제외한 어떤 것이라도 한 가지를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허가하지.”
황제는 웃으며 말했다.
1등급을 제외한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1등급이란 황제를 제외한, 황태자도 허락 없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물품들인 만큼 아무리 플로어 마스터와의 계약이라도 함부로 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곳에 등록된 물품은 물품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역사적 가치 또한 보통이 아니라서 받아도 곤란할 뿐이었다.
황실 창고 1등급에 등록된 대표적인 물품으로는 제국 선포 당시 사용되었던 황제의 검이라던가 현재 황제가 쓰고 있는 황제의 관, 지금 그가 몸에 두르고 있는 초대 황제의 망토 등이 있었다.
준신화급 이하 정신 공격을 완전 무효화하는 황제의 관, 준신화 급 스킬도 한 번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막아내고, 전설급 미만의 어떤 공격도 무효화하는데다 체온 유지, 체력 회복 등의 여러 부가 효과를 가진 초대 황제의 망토. 검은 아예 외형 말고는 효과조차 모른다.
각자가 최소 준신화 등급은 충분히 받고 역사조차 깊어 내가 달라고 하기도 뭐한 것들이다. 솔직히, 필요도 없었고.
황제의 관 같은 것을 달라고 했다간 아마 수련자고 뭐고 역모로 목이 날아갈 거다.
즉, 사실상 절대 줄 수 없는 물품을 제외하면 알아서 하나 챙기라는 말이었다.
그런 기회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시작이, 너무 좋았다. 솔직히 조금 불안할 정도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차후 신전에서 그대들에게 연락이 갈 수도 있다.”
성녀와 성기사.
주하연과 남은주 때문이었다.
성녀와 당대 최고의 성기사의 힘을 이은 이들이다. 그런 좋은 카드를 숨길 필요가 없었고, 나는 그녀들이 가진 힘의 원천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나서윤의 용사 또한 밝히긴 했지만, 황제는 별거 아니라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직업이 용사였던 것도 아니고 당대 최고 수준의 강자였기에 용사로 선택되었을 뿐이니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을 수밖에.
놀들이 과거처럼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명심해 두겠습니다.”
“뭐, 바로 가지는 않을 터다. 아마 역사를 확인하고 그 놀의 성지인가를 답사한 이후가 되겠지.”
그 말대로다. 우리가 아무리 성녀의 힘을 계승했다고 외쳐도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당장 한 대에 성녀가 둘인 경우도 처음인 마당이니.
성흔이 있기는 하지만 성흔은 강대한 성직자라면 몇몇 가진 이가 있었고, 스킬로 증명을 하자니 실제 성녀에 비하면 위력이 엄청나게 부족하다. 아마 성녀로 인정받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럴 바에야 저쪽에서 마음 편하게 조사나 하라고 내버려 두고 이쪽은 성장을 하는 것이 나았다.
레벨이 오르고 능력치가 올라 성녀 뺨치는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면 인정받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
애초에 성직자의 최고봉인 성녀보다 강대한 성직자는 없으니까.
교황도, 솔직히 성녀보다는 조금 떨어진다. 힘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여신의 사랑을 받는 증거니 뭐니 하면서 해결될 테니까.
“그럼 방을 내어 주지. 3일을 주마. 마음껏 고르라.”
“…감사합니다.”
솔직히 성은이 망극하다고 할 뻔했다.
우리는 어전에서 물러났고, 시종에게 우리가 머물 장소로 안내받았다.
“…방을 내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와…. 황제는… 기준이 우리랑 다르구나….”
일행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내어준 방은 하나의 궁이었다.
바람의 궁. 손님들이 머무는 궁 중 하나라고 한다.
이 궁을 우리 파티가 쓰라고 통째로 내주었다.
“시녀와 시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부르시면 됩니다.”
우리를 안내한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이라 하면 적어도 명문 축에 드는 귀족일 텐데도 그는 우리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왔다.
명백히 용병에 불과함을 알 텐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하인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게다가 궁에 배치된 이들도 전부 시종 시녀란다. 황제가 우리를 상당히 대우하고 있었다. 아직, 가계약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확실히 황실의 교육은 남달랐다. 우리에게 배치된 시종과 시녀들은 앞서 만난 시종처럼 하나같이 공손했고, 익숙지 못한 일행이 어쩔 줄 몰라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양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은 완벽한 프로들의 모습이었다.
“…어색하네요.”
“앞으로 며칠만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꼼꼼히 살펴보고 싶어서요.”
“황실 창고… 라고 했던가요? 이름만 들어도 엄청나네요.”
“하하… 저도 이런 특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에 같이 가는 것이….”
“아뇨, 괜찮아요. 이제껏 받은 게 얼마인데… 오히려 축하드리고 싶어요.”
뭐, 알았다고 하더라도 같이 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숫자가 이렇게 많으면 보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고.
“오빠, 거기 보고 오시면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 주시면 안 되요?”
“얼마든지. 딱히 비밀인 것 같지는 않으니까.”
“형! 형! 나는 못 따라가요? 안 들킬 자신 있는데.”
큰일 날 소리를.
“절대 안 돼.”
농담이 아니다. 이제껏 하유진의 은신을 제대로 알아챈 사람이 없다고 조금 자신이 붙은 모양인데, 황실은 그 수준이 다르다.
하유진이 랭커 정도로 성장해도 침입조차 장담하기 힘든 장소가 황실 창고다.
저기를 몰래 들어갈 바에야 그냥 대놓고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게 쉬울 지경. 소문으로는 드래곤이 보안을 위해 마법을 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회차에서 그리 소문이 났는데 도둑질을 시도한 사람이 없을 턱이 없었고, 전원 실패, 목이 날아갔다.
나는 하유진에게 함부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해 주었다. 중층에서는 슬슬 하유진을 알아채는 몬스터들이 확 늘어난다.
특히 오크들. 어느 시점부터 부딪치기 시작할 오크들은 그 수준이 인간 마냥 천차만별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하유진 또한 손쉽게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10살 남짓이 된 아이인 만큼 슬슬 치기가 머리를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말은 잘 듣지만. 내가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하유진은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여왔다.
내가 하유진에게 엄한 경고를 끝내자 일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황실 창고를 거론하며 잔뜩 기대된다는 말을 나누었다. 황실 창고. 확실히 로망을 느낄만한 단어다.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할 것 같은 인상이니까. 실제로 그런 장소도 있긴 하고.
그러나 그런 와중, 한바다의 한 마디가 일행을 분위기를 깨뜨렸다.
“…지구가 그 꼴일 줄은 몰랐습니다.”
“……….”
애써 미뤄 놓았던 이야기다. 다들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았던 이야기. 어차피 누군가는, 꺼낼 말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멈췄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거인에 대해 설명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멀쩡히 지구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솔직히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대로 성장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렇죠.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주하연과 한바다. 둘은 이야기를 하면서 힐끗, 나를 보았다.
수련자들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가.
그녀들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나조차, 아직도 성장하고 있었다.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닌 셈.
“그래도, 멀쩡히 구할 수는… 없겠…죠?”
나연의 조용한 중얼거림. 딱히 누구에게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한바다의 대답.
직접 보지는 못했고 상대도 해 보지 못했다. 설명만을 들었을 뿐. 그 설명이 정말 전설 속의 괴물들을 묘사하는 수준이라 그렇지.
솔직히 개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터였다.
우리가 만나본 몬스터라고 해도 제일 거대하고 강했던 몬스터는 20층의 미노타우로스뿐이었다.
숫자로 따지면 단연 놀이고.
그렇기에 거인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도 먼 미래였다.
“…집에 가는 것도 힘든데 집게 가서도 문제라니….”
남은주는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빠를 보면 어떻게든 할 것 같은데.”
나서윤이 말했다.
“…확실히 거인이고 뭐고 신후 씨를 보면 어떻게든 할 것 같기는 해요. 음… 너무 부담 주는 거려나요?”
“뭐… 솔직히 부담이 안 되는 건 아니군요. 하지만 제 목적은 귀환이고, 지구에 그런 것이 있다면… 없애야죠.”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습니다.”
한바다는 내 말에 동의했다.
“…정말 열심히 해야겠네… 신후야, 정령 안 잊었지?”
나연은 분위기를 조금 바꾸려는 듯이 내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확실히 파티를 할당받고 한바다와 가까워진 뒤로 조금 밝아진 모습이었다.
“물론. 이번에 장비를 얻으면 바로 정령부터 얻으러 가자. 텔레포트 게이트도 있으니까.”
“응.”
제법 위험한 구역이기는 하다만, 던전 자체의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다. 장소가 좋지 못해서 그렇지. 나연이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안 그래도 형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이제 더 힘들어지겠는데요? 지구로 돌아가려고 열심히 하는 형도 엄청났는데… 거인까지 잡으려는 형이라니….”
하유진이 상상만으로 무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행들 또한 동의하는 분위기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앞으로는 더 빡빡하게 일정을 잡으려고 합니다. 단순히 귀향만 생각해서는 안 되게 되었습니다.”
내 말에 일행은 묵묵히 나를 쳐다보았다.
“들은 바대로라면 거인이라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게다가 이미 침입을 했다고… 정보가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당장은 얻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한바다가 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네?”
“미궁에 있을 무렵에 한 무법자가 지구로 가면 죽는다고, 절대 탑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어요. 지구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정말입니까?”
“네. 어차피 처형되긴 했고, 그 말고는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없어서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정보 출처가 외국 SNS란다. 자기가 올라온 영상을 보는 와중에 소환되었다고. 웃긴 것은 그 무법자의 말을 같은 무법자들도 안 믿었다고 한다.
“그것만 안 봤으면 안 끌려왔을 거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끌려 들어왔다고.”
개소리다. 탑에 불려오는 조건은 마력에 대한 최소한의 재능이니까.
나는 곰곰히 과거를 떠올렸다. 1회차에서 그런 소문이 있었던가? 적어도 나는 듣지 못했었다. 하기야 하층에서의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놈이었으니까.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지워버린 이후 한바다에게 물었다.
“자세한 정보는 더 없었습니까?”
“네, 아쉽게도… 어차피 영상 조금 본 게 다라고 들었어요.”
“…아쉽군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나야 다 아니까.
“일단 타 수련자들이 올라오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쪽 인원만 소환된 게 아니라면, 그리고 그 SNS가 사실이라면 직접 목격한 이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일행은 동의했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강해지는 것에 집중합니다. 비록 지구가 그 꼴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로써는 지구로의 귀환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솔직히 여기서 성장을 멈춘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일행들은 하나둘 내 의견에 동조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집에 가족이 있어.”
“저도 지구로 돌아갈 겁니다.”
“혼자만 살아남는 건 싫어요. 가능성이 있는 이상 끝까지 가겠어요.”
“저는 형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갈 거예요.”
“…나도.”
나서윤은 나연의 눈치를 보며 하유진의 말에 동의했다.
역시 저 둘의 동기는 가족보다는 나였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앞으로… 바빠지겠군요.”
“어차피 쉬실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건 그렇다.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남은주가 가볍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달라지는 것이 왜 없을까. 일행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지금도 조금 이르다 싶었지만, 다행히 거인에게 겁을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저들이 직접 상대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나름 상황이 잘 풀려가는 현재 상황에도, 거인을 몰아내는 것이 실패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아직, 부족하다.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행들은 포기하지 말자는 말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넸다.
“이러고 보면, 신후 씨가 길드를 창설한 것이 되게 좋은 선택이 되었네요.”
“맞습니다. 세력을 키우고 사람을 모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뭐, 오빠가 하는 일 중에서 잘못된 거나, 필요 없는 일이 있었나요? 잘만 따라가면….”
일행들의 이야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헤어짐의 시간을 늦추려는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늦출 수는 없었고,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나서윤과 하유진만이 잠을 제대로 잔 듯 나머지 네 여성은 퀭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영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잠을 잘 못 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저 말고 딱히 일정이 없으니 푹 쉬십시오. 저는, 창고에 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지친 표정의 일행들. 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시종을 찾았다.
내가 용건을 말하자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는 나를 한 건물로 안내했다.
“…유신후 님이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 게이트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내부에도 게이트가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나오실 수 있습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3일간 마음대로 창고를 왕복하실 수 있습니다. 내부에서는 어떤 마법 물품도 사용 불가능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황실 창고 내부에서는 인벤토리도 사용 불가능하다고 한다. 경험자들의 말이니, 사실일 터였다.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엄청난 장소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나의 작은 금패를 받은 뒤 부푼 가슴을 안은 채 게이트를 이용, 창고 내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