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나는 황제를 향해 지구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내 질문에 황제는 자신이 아는 한 성실한 답변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렇네. 확실히 지구는 침공을 받았고 지구의 시간은 멈춰진 상태라고 하더군. 첫 번째 수련자가 입장하는 즉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고 하네.”
“지구가 침공당했다고 하셨는데, 침공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거인이라고 하더군. 그것도 완벽한 무장을 한 거인.”
황제의 정보는 정확했다. 게다가 내가 회귀함으로써 갱신된 정보까지 알고 있었다. 1회차 시절에는 시간이 멈춰 있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1회차 시절 지구와 탑의 시간이 1:10이라는 정보가 여기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방랑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정보가 아니었군?’
누군가가, 방랑 상인을 통해 알아낸 정보라 여겼던 것이,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정보라는 것은 무척이나 신선한 기분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 안다는 듯이 지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물어대었다. 황제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내 일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인이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혹시 아십니까?”
“일반 거인이라면 모를까 갑옷까지 입었다는 것은 제대로 된 거인이라는 뜻이지. 어지간한 드래곤, 그것도 성룡급 강자라고 보면 된다네. 흠… 드래곤의 강함이라….”
지구의 위기. 내 일행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멈춰 있다는 말에 한결 안도한 기색이었지만, 거인의 강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창백해져 간다.
황제의 드래곤에 대한 설명이 나올수록 일행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드래곤. 최상위 종족에 속하는 괴물. 그와 비견되는 존재라고 해 봐야 최상위 마족이나 천사, 악마, 거인, 최상급 이상의 정령 등 하나같이 규격 외의 힘을 가진 존재들은 되어야 비교라도 할 수 있는 괴물이다.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 흔히 나오듯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고, 피부는 검강쯤 되지 않으면 뚫리지도 않으며 하늘을 날고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마법이 바로 용언 마법.
게다가 거인은….
‘어지간한 마법과 물리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 괴물이지.’
그 튼튼함 하나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황제는 상상 이상으로 정확한 정보들을 꿰고 있었다. 1회차를 경험한 나만큼이나, 정확한 정보였다.
출처가 어딘지는 뻔하다.
황제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나연의 울음 섞인 말이 흘러나온다.
“어, 어떻게… 엄마… 엄마 어떻게 해….”
나연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으로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그녀의 가족에 대한 걱정이었다.
“…당장은 시간이 멈춰 있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해야지.”
한바다는 그런 나연을 위로하며 굳센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도 가족은 있었고, 그녀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주하연은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움켜쥐었고 남은주는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특이한 것은 하유진과 나서윤이었다.
하유진은 멍한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걱정이나 불안을 보이지 않았으며 나서윤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분명한 ‘짜증’이었다.
나연의 반응과 무척 다르다.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황제가 입을 열었기에 계속 나서윤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흠… 놀랍군. 그대들에게는 강해지기 위한 수많은 시련을 겪는다고 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이미 많은 시련을 겪었겠지. 나는 그대들이 이처럼 빠른 시간에 이곳에 도달한 이유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그렇다면 다른 거점의 이들 또한 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
일행의 반응을 보며 우리가 정말로 지구의 위기를 몰랐다는 것을 확신한 표정이었다.
그런 황제의 얼굴에는 얼핏 안타까움이 보였지만 동시에 미소 또한 존재했다.
아무래도 그의 머리 속에서 우리의 가치가 상승한 듯했다.
동시에 나는 황제의 말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거점… 말씀이십니까?”
“거점은 티드린드 영지 한 곳이 아닐세. 아주 많지. 열 곳이 넘는다네. 단지, 연결되지 않았을 뿐.”
“…수련자가 저희뿐만인 것은 아니군요.”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했던 정보를 황제를 통해 뱉어낸다.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들은 바대로라면.”
옅게 미소지은 황제는 나를 향해 물었다.
“나도 묻고 싶군.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이야.”
나는 그가 내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을 해 줬던 것처럼, 그에게 우리의 행적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회귀자라던가, 다른 플로어 마스터와의 이야기 일부 등 숨겨야 할 이야기 일부는 숨겼지만, 유리하다고 생각한 정보는 아낌없이 풀어버렸다.
이건 일종의 기회였다. 잘만 한다면 과거 영국 왕실 길드처럼 황제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 과거 내가 속했던 천양(天陽)길드도 황제파였지만, 그래도 영국 왕실 길드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차에서는 오히려 내가 황제의 최고 파트너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물론 나는 영국 왕실 길드처럼 정치에 깊숙이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천양이 황제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왕실 길드를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제 1파트너는 왕실 길드였지만. 조금 꼬인 관계였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 일행의 이야기를 들었다.
튜토리얼은 그가 보기에 정말 난이도가 높지 않았던 듯했다. 하기야 평화 속에 살아온 우리와 그들의 태도는 분명 다르겠지. 요한을 믿었던 우리 태도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어렵기는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튜토리얼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듯했다.
반대로 무법자들을 쓸어버리고 미궁을 장악한 것이나 하층을 장악하고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내 업적에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영웅의 성장기를 듣는 기분이군! 하하하.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황제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우리의 고난이, 그에게는 한낱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나는 그 반응에 딱히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와 나는 입장이 다르니까. 나도 챙길 것만 챙기면 여기가 오크 손에 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만족스럽군, 아주 만족스러워! 그래. 그대들은 현재 그대들의 세계가 위험에 빠진 것을 몰랐다고 했었지. 어떠한가? 지금은?”
“솔직히… 초조합니다. 믿기도 힘들구요.”
“그래, 그렇겠지. 그대들은 뭣도 모르고 끌려왔다고 했으니 말이야.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놀라기도 했을 게야.”
“…하지만 믿습니다. 폐하께서… 거짓을 말씀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아니, 아니지. 이런 것은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아.”
황제는 웃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신성 계약서나 저주의 계약서에 대해 아는가?”
…설마?
“알고는… 있습니다. 저주의 계약서는 한 번 사용해 보았구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지! 하하하!”
그는 즉시 준비했다는 듯 저주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황제에게, 저런 계약서들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저것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다. 황제가 저런 것을 사용해서까지 증명을 해 주겠다고? 황제인데?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황제는 저주의 계약서를 사용해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동시에 그는 내게 물었다.
“자, 이제 자네들의 고향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은 사실이 되었네. 어찌할 텐가?”
황제는 우리를 향해, 정확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거인은 아주 강대한 존재지. 솔직히 말하겠네. 나는 자네들이 포기한다고 해도 뭐라 하지는 않아.”
그래 뭐라 하지는 않겠지. 단지 그와 가까워질 기회를 잃을 뿐. 제국에 해가 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플로어 마스터 때문이라도 황제는 우리를 두고 볼 거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본 일행은 내가 왜 쳐다보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힘겨운 얼굴의 나연, 굳은 표정의 한바다, 피로하고, 당황스러운 가운데도 굳센 눈빛을 보이는 주하연과 남은주. 그들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하유진과 나서윤은 그냥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모습이었다.
반응이 갈리기는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고, 당당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론, 돌아갈 겁니다. 고향으로.”
“크하하하하!”
황제는 정말 마음에 든다는 듯, 크게 웃었다.
***
그런 내게 황제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당장 그 손을 맞잡았다. 정식 동맹이 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선권을 확보했을 뿐. 당장은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아직 우리는 약하니까. 자격이 부족했다. 그래도 줄은 잡았다고 봐야 했다.
내 무력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S급에 해당한다. 황제 입장에서 아주 대단하다고 볼 수준은 아니었다.
S급 용병은 제국에 100명 가까이 되고, S급 용병에 준하는 힘을 가진 기사는 더 많았다.
실제로 제국에는 랭커 못지않은 괴물이 셋이나 있었다. 제국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황제는 툭 까놓고 말했다.
“수련자에 대해 아는 자는 나 말고는 딱히 없다네. 그대들이 제국에서 활동하면 자연스레 알려지겠지만, 이만큼 자세한 정보를 가진 것은 현재로써는 나뿐이지.”
황제만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들이 황제에게만 접근했던 것.
“타 귀족에게 가 봤자 이용만 당할 뿐이네. 그들은 자네들이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거든.”
쉽게 믿지도 않겠지. 하지만 황제 휘하의 귀족들 중 수련자들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영원히 없지는 않았다. 내가 고민했던 아르테인 공작가나 애슐란 변경백, 다이딘 대공은 수련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랭커나 거대 길드를 끌어들여 파벌을 형성했었다.
황제가 어째서 거래에 개방적이고 능했는지 간단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잘 드는 칼을 원했고, 우리는 강해지기를 원했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 물론 수련자들 중에서도 권력을 원하거나 지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여기 눌러앉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반란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고. 하지만 거주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든 반란은 실패했고, 중층에 눌러앉으려고 했던 이들은 플로어 마스터들이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목적만 혼동하지 않는다면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관계였다.
특히 나는 권력도, 영지도 필요 없었다.
나는 그런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티드린드 영지를 좀 도와주시죠.”
“하하. 벌써부터 요구인가?”
“황실에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황제는, 거래를 할 줄 아는 이다. 내가 지금은 약하지만 벌써부터 뒤통수를 칠 인간은 아닌 셈. 그는 시간을 길게 봤고, 그렇기에 처음 올라온 나를 급하게 이쪽으로 불러냈다.
“황실 소속 마탑이 있는 걸로 압니다.”
“그렇지. 마법사는 중요하니 말이야.”
“마정석을 싸게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마정석? 설마….”
“티드린드 영지에 마정석 광산이 있습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우리 이야기를 하면서 인벤토리 이야기도 했기에 황제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흠… 상등품… 아니 최상등품일지도 모르겠군. 허….”
황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이건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거래로군.”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좋다. 티드린드 영지의 안전을 약속하고 지원을 해 주지.”
황실의 약속. 티드린드 영지를 인정한다는 발언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중앙 마탑 소개좀 해 주십시오.”
“그 마검사 아이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내 길드의 마법 병단을 훈련 시킬 때도 유용한 인맥이 되어 줄 거다.
“마정석 거래도 트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제국 중앙 마탑, 그것도 황실 쪽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호구나 다름없었다.
시작이 좋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정석에 관한 일이나 연줄에 관한 일이 상당부분 해결 되자 무척이나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연줄은 나중을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최고의 기회를 얻었고, 마정석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유신후, 자네에게 줄 것이 남았지.”
“…줄 것 말입니까?”
그런 게 있나?
황제는 입을 열었다.
“최초로 제국에 도착한 수련자에게는, 특전이 있다. 플로어 마스터 바사론 님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지. 수련자들의 정보를 얻는 대신 하나 주기로 한 것이 있었지.”
황제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실 창고를 개방하지. 원하는 것 하나를 꺼내 가도록.”
황실 창고 개방.
나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