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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41화 (141/317)

# 141

황제

중층에 입장했다는 메시지가 눈에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 나와는 다르게 일행들은 처음 보는 모습일 터였다.

“여기가 중층…….”

주하연은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베리드가 내게 슬쩍 귀띔했던 내용. 병사. 나는 그것을 힌트로 중층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었고, 대충 중층 첫 번째로 가면 어떤 특전이 있는지 대강 예상한 상태였다.

리베리드는 내게 수련 효과를 올려주는 버프를 주며 말했다. 자신의 하층을 첫 번째로 나간 보상을 분명히 주었다고. 그리고 이런 뉘앙스의 말도 했었다.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첫 번째로 중층으로 올라간 보상이 있을 거라고. 이미 중층에서 실수했기에 미리 언급해 주는 거라고도 말했었다.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지 어느새 주변에 수많은 기척이 다가옴을 알 수 있었다.

“신, 신후 씨? 이게 어떻게 된….”

“신후 님, 주변이 이상합니다.”

갑작스러운 수많은 기척. 이제껏 층을 올라오자마자 이런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일행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리베리드가 준 힌트를 일행과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상이야 했다지만,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는 까 봐야 한다. 이건 1회차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조금 조심스러웠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꺼내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수많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일행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상대가 인간이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법자를 제외하면 사실상 인간과 특히 거주민들과 싸울 일은 없었기 때문에 긴장한 듯했다.

병사들은 일행이 무기를 꺼낸 채 긴장된 자세로 있자 자신들도 서서히 무기를 뽑아 들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모두 무기 내려!”

누군가의 명령. 병사들은 흠칫하며 즉시 무기를 내렸다.

명령을 내린 자는 다른 병사들과는 차별화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황실 기사 예복.’

1회차 기억을 떠올리자 나는 쉽게 상대의 소속을 알 수 있었다. 황실 소속의, 직속 기사단. 실력도, 충성심도 검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단인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나는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병사. 그것도 내가 이상하게 생각된 반응을 보인 병사들은 황실 직속 병사들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층과 연결된 검문소는 하나같이 황실이 직접 운영하는 것들투성이었으며, 무법자가 아닌 이상에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무법자가 날뛴 역사도 없는 2회차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이 보일 이유가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까지는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리베리드의 언급과 합쳐지자 조금이나마 짐작할 구석이 생겼다.

첫 번째로 하층을 나온 이들은 무언가 특전 같은 것을 받을 수 있고, 그 특전은 황실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설마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나 또한 일행에게 무기를 내릴 것은 명령했다.

“하, 하지만 신후 씨….”

“내려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행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은 풀지 않았다. 마력도 한껏 끌어올린 상태고. 상대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황실 소속의 기사. 만만한 이들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일행들보다 강했다. 그나마 나서윤이 조금이나마 저항이 가능할 수준. 그래 봐야 내게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황실 소속의 기사분이, 어째서 저희를 막으십니까?”

내 말에 기사는 눈이 이채를 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신후 님,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저는 황실 기사단 소속 평기사, 아일딩이라고 합니다.”

“…유신후 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 많이 당황하셨을 것을 압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기사 아일딩은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실 소속 기사가 허리를 숙여 사과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놀라기는 했습니다. 전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제국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국에 무슨 일이 있어서 여러분의 길을 막은 것은 아닙니다. 실은, 이쪽으로 오시는 분을 모시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이쪽에 관문소를 설치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폐하의 명이요?”

나는 짐짓 의뭉을 떨었다.

“이유를 모르겠군요.”

“저 또한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지요. 그저 폐하께서는 여러분을, 특히 유신후 님.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일딩은 제국식 예법에 맞춰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부디, 초대에 응해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죠.”

애초에 거절할 방법도, 명분도 없었다. 우리 신분은 용병이고, 우릴 초대한 자는 황제다.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일행들은 갑작스러운 초대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불러온다. 그것도 상대가 황제란다. 호기심이나 긍정적인 감상보다는 불안한 것이 정상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정중한 모습.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곧 우리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평범한 호위대형. 하지만 지구에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내 일행이 이런 경험을 해 봤을 리가 없었다. 일행은 이 대형이 호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포위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 하지만 내가 워낙 담담한 모습을 보이니 그래도 조금은 안정된 듯했다.

황실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으니까.

아일딩이 우리를 안내한 장소에는 대놓고 화려한 황금 마차가 서 있었다.

“와… 무슨 동화에서 나올 것 같은….”

“…엄청 비싸 보이네요.”

일행은 잠시 긴장도 잊고 마차의 화려한 외형에 감탄한 표정이었다.

마차의 문에 새겨진 거대한 문양은 확실히 황실의 인장이었다. 일행이야 알아보지 못했지만.

거대한 마차는 우리 일행이 모두 타고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폐하께서 제법 급하게 부르신 터라 마차 운행이 조금 거칠 수도 있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일딩은 정중한 어조로 양해를 구했다.

나는 일행을 대표해 알겠다는 대답을 했고, 아일딩의 말대로 마차는 제법 빠른 속도로 길을 주파했다. 가까운 성인 에울프 성까지 이동하는 데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일행은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에울프 성에 도착한 뒤 우리는 마차째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호사를 누렸다. 무게가 나갈수록 많은 마력을 잡아먹다 보니, 이렇게 화려하고 무거운 마차를 통재로 옮기려면 마법사 한둘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황실답다고 해야 하나?

일행은 처음 타보는 텔레포트 게이트 때문에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제국 수도는 거대했다. 높디높은 4중 성벽. 넓은 도시의 크기는 현대의 도시보다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마법의 영향 덕분인지 생각보다 높은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일행은 이제껏 보아왔던 중세의 도시를 생각했을 터였지만, 제국의 수도는 중세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발전된 모습이었다.

“와….”

마치 처음 상경한 촌사람들 같은 반응.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경의를 표하고 있었지만, 정작 마차 내부의 인원들은 주변의 모습을 관찰하기 바빴다.

제국의 황궁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를 막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어떤 문지기도 감히 마차를 검문하지는 못했다. 황궁. 제1성벽 내부는 사실상 전부가 황궁 내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는 제1성벽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폐하께서 직접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외였지만.

나는 1회차 시절에도 몇 번 들어오지 못했던 황궁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황제가 급하게 우리를 찾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우리는 고작 하루의 휴식을 가졌을 뿐 다음 날 즉시 황제를 알현해야만 했다.

“…예법도 모르는 채 그냥 가라는 말입니까?”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당장 접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여독을 핑계로 대지 않았다면 당일 만나고자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기사, 아일딩마저 황제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 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우리는 곧바로 황제를 접견하게 되었고, 우리를 처음 본 황제의 첫마디는, 파티 전원을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반갑네 수련자들이여.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지.”

***

수련자. 황제는 분명, 우리를 수련자라고 불렀다. 뭐, 제국에서 수련자라고 불리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1회차 시절, 우리는 그렇게 불렸으니까. 문제는 지금 시점은 제국에 처음으로 수련자가 등장한 시기라는 거다. 우리끼리 부른 것이 제국에 퍼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한다.

“흠? 놀랐는가?”

황제. 오즈월. 그는 급발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중년 남성이었다. 본디 제국의 황제쯤 되면 몸이 저렇게 좋기도 힘든데, 그는 평소 몸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듯 예복 위로 보이는 그의 체격은 무척이나 건장해 보였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작은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우리가 초대된 대전. 그곳에는 황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사실상의, 독대. 설마 독대를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상식적으로, 용병에 불과한 우리를 황제가 독대할 이유가 있을까?

“흠흠. 장난이 과했나 보군. 음… 솔직히 말해서 놀란 것은 나이지만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흠. 바, 아 아니군. 플로어 마스터라고 했던가? 그 분 들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께 이미 언질을 받았지. 수련자들이 제국에 곧 나타나리라고.”

황제는 중층의 플로어 마스터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했다.

“제국을 크게 부흥시킬 수도,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 수도 있는 이들이라고 하더군. 동시에 그대들이 언젠가 떠나야 할 이들이라는 것도 들었네. 차원의 고행자들. 가엾고 딱하더군. 그대들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타 세계에서 수련을 한다지?”

뭐…?

“저희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니요?”

그걸 안다고?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이번에는 실제로 당황했다.

“…모르는 건가? 흠? 이상하군… 바사론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게다가 그대들은 무척 빨리도 나왔더군. 솔직히 몇 개월 전 티드린드 영지에서 유신후라는 자가 홀로 나왔다는 말에 무척 당황했었지. 막 감시를 명령했었는데, 설마 바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거든. 덕분에 자네를 놓쳐버렸어.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지만, 사정이 있었기에 자네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지.”

바사론이 아무래도 중층의 플로어 마스터의 이름인 듯했다. 아니, 중층의 플로어 마스터는 내가 아는 한 하나가 아니니 그 말고도 다른 플로어 마스터가 있을 터다. 내가 아는 플로어 마스터도 하나 있었고. 적어도 그 플로어 마스터의 이름이 바사론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저희 세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조금 무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확신을 위해 황제에게 되물었다.

애초에 예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한 것이 그다. 1회차의 그를 생각한다면, 이런 거로 꼬투리를 잡을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가 보군. 그대들의 세계… 지구라고 했던가? 그곳은 현재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네.”

정확하다. 지구. 멸망의 위기. 거주민인 그가 우리 세계의 정확한 이름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가 이런 정보까지 제공한다고? 그것도 거주민에게?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하나같이 한참 수면 중에 이 세계로 불려 왔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강해지다 보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본래라면 타 국가의 수련자들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풀렸어야 할 이야기가, 황제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어차피 알려질 것, 이쪽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렇군. 그랬어. 좋네. 자네들이 첫 번째라는 것은, 그래도 가장 우수하다는 반증이겠지. 좋네. 어차피 오늘 하루는 그대들을 위해 시간을 비웠으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지.”

황제는 기껍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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