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전투는 어렵지 않게 일행의 승리로 돌아갔다.
새로운 환경이 불편한지 최대한 방어적인 전투를 했기에 시간이 제법 걸리기는 했지만 예상대로 리자드맨들은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혹시 몰라 일행에게 하층의 플로어 마스터, 리베리드가 말했던대로 리사르의 둥지와 리버그의 은신처 위치를 알려주고는 접근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았다.
리베리드가 그러지 말아 달라 부탁하기도 했고, 저들이 만만히 볼 상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리사르야 정령사인 나연 마검사 나서윤 천국의 분노를 익힌 주하연이 있어서 데미지를 줄 수 있고 리버그의 독이야 주하연이 정화의 대지를 통해 회복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굳이 가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 뒤로 일행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관찰했다.
한바다는 실드를 받는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미궁에서의 사제 수준은 뻔하고, 그렇다고 정예 길드원들이 싸우는 곳에서 주하연이 일일이 실드를 걸어주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역할이었으니까.
한바다는 실드 덕분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싸움에 끼어들었고, 더 빨리 파티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나서윤은 대지 계통과 바람 계통의 마법을 근거리에서 주로 사용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해 나가고 있었고, 하유진은 틈을 보더니 한바다를 보조하기 위해 전열로 뛰어들었다. 나야 지금 수준의 하유진은 방해될 뿐이지만, 한바다는 자신과 보조를 맞추며 리자드맨을 베어내는 한바다가 기꺼운 모양이었다.
전열이 사실상 리자드맨의 대부분을 봉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남은주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며 주하연과 나연 또한 전열을 꾸준히 지원했다. 그녀 또한 늪지라는 특성 때문에 주로 실프를 이용하고 있었다.
몇 번의 전투는 모두 일행의 승리로 돌아갔고, 점점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하연은 새로 얻은 천국의 분노를 이용해 전열을 지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되도록이면 자제하는 중이었다.
전설급 스킬 답게 이펙트나 소음이 상당히 강했다. 범위기로도, 대인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덕분에 사용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사용 이후 적의 이목을 쓸데없는 수준으로 끌게 된다.
"좋은 스킬인데… 까다롭네."
"너무 상심하지 마요, 언니. 힐만 해 줘도 충분해요."
남은주는 그런 주하연을 가볍게 위로했다.
사실이기도 했고.
그렇게 충분히 사냥이 가능함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베이스캠프를 지정해 그곳에서 미궁 조각을 사용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난의 신전으로 갈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내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리베리드가 나를 찾아왔다. 이전, 갑옷을 입었던 차림새와는 다른, 평복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리베리드 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식사에 초대하고자 왔습니다."
이전의 약속.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어 마스터와는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니까.
"물론입니다. 영광이죠."
리베리드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나는 특유의 부유감과 함께 리베리드의 영역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
리베리드가 초대한 장소는 깔끔한 실내였다.
실내라고는 해도, 아마 거대한 저택인 듯싶었다. 소환된 장소가 식당인데,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나긴 테이블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기괴하게도, 사람은 나와 리베리드 단둘 뿐이었지만.
"…음식이 많군요."
왜 부른 걸까.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하.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귀한 분을 모시는 자리니까요."
귀한 분. 뭐, 희귀성으로 따지면 현 탑 수련자들 중 단 하나 존재하는 회귀자니, 귀하다고 할 수는 있었다.
"일단 드시죠. 음식이 식겠습니다."
그는 이야기는 다음이라는 듯, 먼저 식기를 들어 올렸다.
나 또한 그의 권유에 따라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맛있었다. 과거 1회차에서 봤던 귀한 요리들이 한가득이다. 제국 특유의 음식들. 거의 서양식에 가까운 것들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리베리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다 가끔 눈이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냥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기괴할 정도의 친절. 과거 아지렉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나에게는 친절하니 상관이야 없다만… 이유를 모르니까. 역시 회귀자라 그런 걸까?
적당히 배가 불러오자 식기를 놓았다. 그러자 남은 음식들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진다.
포만감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환상은 아니었다. 뭔 수를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 수준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플로어 마스터는 단순히 지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처음 보였던 그는 전사와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마법사와 같았다.
"아, 딱히 마법은 아닙니다."
내 의문을 눈치챈 리베리드가 입을 열었다.
"시스템의 지원 덕분이죠. 각자의 공간에서는, 이런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가능하죠."
그가 손짓함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차가 나타났다.
"제 공간에서만 가능하지만요."
리베리드는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친절한 모습.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음, 그냥 교류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회귀자, 이미 실패했는데도 끝까지 세상을 구하겠다고 시간까지 되돌리고, 탑을 겪어서 얼마나 힘겨울지 알면서도 다시 도전하는 사람아닙니까. 유신후 님이라면 이미 아실 테죠? 그냥 살고자 한다면, 고향을 버리면 된다는 것 정도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돌려 고향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 저희 플로어 마스터는 그런 사람에게는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키밀리도 딱히 예외는 아니라고, 리베리드는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신 이후 또다시 튜토리얼까지 다녀오셨더군요. 게다가 아키밀리에게 더 뽑아먹기도 하셨고."
"…운이 좋았습니다."
뽑아먹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에는 확장까지 하시고… 아무래도 하층을 유신후 님의 손에 넣으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꿀꺽.
"좋은 선택이십니다. 이곳은 당신의 확고한 기반이 되어 줄 테니까요."
이어지는 칭찬들. 나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정말로 고작 칭찬을 하려고 나를 부른 건가?
그는 정말로 그것이 목적이라는 듯이 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었고, 나는 겸양을 떨거나 웃으며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한참 동안 이어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소강상태에 젖어들었다. 어느새 차는 완전히 식어버린 상태였다.
"…음. 이 시간이 끝나는 것이 참 아쉽지만, 이제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군요."
그는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기습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지지할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유신후 님이 1회차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존재였는지, 알 방법이 없죠."
리베리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아마 당신이시라면, 중층에 가서 계획한 일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혹시, 1회차 당시에 유신후 님은 중층에 첫 번째로 올라가셨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오히려 현저히 늦었다.
"그렇다면 모르실 가능성이 높군요."
리베리드는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마, 그 계획이 조금쯤 변경될 겁니다. 처음으로 중층과 연결된 하층은, 이점이 존재하거든요."
나는, 이것이 리베리드가 나를 부른 용건임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말씀해 주셔도 됩니까?"
"본래라면 안 되지만… 이건 중층 쪽의 실수라서요. 이 정도는 말씀드려도 됩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는 드리지 못하지만… 유신후 님께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정보를 얻었다. 자세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게 도움이 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뭘까. 나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고민에 빠지자 리베리드는 웃으며 그런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부유감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시간이 되었군요."
리베리드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늦었지만 중층에 진출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제 와서?
"첫 번째로 저의 하층을 통과하신 대가, 분명히 드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 시야가 다시금 반전되었다.
***
[극상의 만찬을 대접받았습니다.]
[앞으로 10일간 수련 효과가 폭증합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 있었다.
"…이런 것도 있었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보상을 핑계로 진짜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듯했다.
내가 눈을 뜬 장소는 베이스캠프 앞이었다.
내 파티원들은 여전히 사냥을 나간 상태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리베리드와 시간을 보낸 것 치고는 보상이 괜찮았다. 타이밍도 마치 노린 것 같았다.
하층에 나간 즉시 이 버프를 받았다면, 사냥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간이 끝났을 터다.
그러나 지금 받았으니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수련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 수련 효과가 증가한다면….
시스템 메시지가 대놓고 폭증이라고 했다. 열흘, 제대로 보내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리베리드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입 모양이 신경 쓰였다.
그는 분명, 병사, 라고 말했다. 그 병사가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닐 터. 거주민을 뜻하는 거겠지.
그렇다고 티드린드의 병사는 아닐 거다. 그럼… 제국인가?
이점? 병사라도 생긴다는 건가?
동시에 머리 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병사. 나는 중층에서 처음 만났던 병사의 반응과 내가 떠나기 직전 나를 불렀던 병사를 기억해냈다.
나는 뒤늦게, 내게 주어질 이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
한 달. 나는 그 한 달을 상당히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높아진 레벨에 비해 내 순수 능력치가 조금 부족했는데, 그 능력치를 보충했다. 높았던 근력을 타 능력치들이 거의 따라잡은 상황.
문신들의 힘까지 보태져 내 능력치들은 평균 80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제는 확실히 과거 거대 길드의 1군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시점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수준. 만찬의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다.
미궁의 수련자들을 하층으로 올리는 기간 동안 수련한 것보다, 버프를 받은 10일간 오른 능력치가 더 많을 지경. 하루에 능력치가 최소 3 이상 오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무슨 1회차 튜토리얼인 줄 알았다.
버프를 받은 시점에 내 능력치가 평균 60 수준이었는데도 하루에 3 이상 오른다. 훈련하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정도였다. 이 기간에는 아예 베이스캠프로 복귀조차 하지 않았고, 잠마저 거의 자지 않았을 정도였다.
버프가 끝날 무렵에는 더이상 훈련으로는 능력치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 와 버려서 결국 남은 시간은 고난의 신전을 이용해야만 했다.
내가 베이스캠프로 복귀하자 마침 일행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이제는 익숙한 나서윤의 접근. 나는 관리자의 눈동자로 한바다를 확인했다. 레벨 35. 오늘을 끝으로 한바다마저 35레벨을 달성해 목표를 이뤘다.
"청소는 어떻게 됐습니까?"
"길로 사용될 지역 내의 리자드맨 무리는 모두 치웠어요. 일부 인원들이 반격을 해오긴 했지만… 이제는 거의 저희 영역이라고 보는지 어느 순간부터 쉽게 접근하지 않더군요."
물론 임시적인 일이다.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금 조금씩 자리를 잡겠지. 앞으로 꾸준히 청소를 해 저들이 완전히 이곳을 인간의 영역이라 인지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한 번은 돌아와야 하니 그때 한 번 다시 치우고, 이후에는 성장한 내 길드의 정예들이 다시 작업을 할 거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한 달. 짧다면 짧은 시간에 일을 마쳤다. 나 또한 만전의 상태를 만들었고, 일행들 또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쳤다.
나는 인벤토리 내의 영주가 건네준 증표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은 마탑이군요."
내 말에 일행의 얼굴에 긴장된 표정이 어린다. 마탑. 중층으로 넘어가겠다는 선언.
일행들은 내 경험담 덕분에 중층이 하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가죠."
어차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아지렉의 대지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