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하층 장악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익숙한 길 한복판에 도착했다.
모너스 마을로 향하는 길. 한바다는 오랜만에 보는 햇빛과 맑은 공기에 신선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정말 좋…."
"유신후 님이 오셨다! 유신후 님 만세!"
"…응?"
뭔 개소리지?
한바다의 감상이 순식간에 잘렸다. 그것도 내 이름을 부르며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에.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때마침 등장한 한 남자가 헉헉거리며 다시 '유신후 님이 오셨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영입된 한바다 측 최정예 파티 일부와 마법 병단이 될 마법사들 일부,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파티 하나가 우리를 맞이했다.
한바다 측 정예 파티도, 나의 마법 병단 일부도 얼떨떨한 얼굴로 유신후 님 만세를 외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일행은 내 이름을 외치며 크게 환호성 떠는 파티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 팬클럽 그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황진훈 파티. 미궁 돌입과 동시에 11층에서 나를 향해 학살자 유신후라고 불렀던 이들이었다.
"…저게 뭐 하는…."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저쪽 파티를 바라보았고, 저들은 쪽팔리는 것은 아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크게 소리높여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아, 저들이군요. 저럴 만 하죠."
한바다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한바다에게 끌려간 이후 저들에게 관심을 끊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사히 풀려난 모양이었다.
"학살자라고 불렀던 주제에 무법자는 아니라니… 학살자는 무법자들이 쓰는 말이잖아."
나서윤이 얼굴을 찌푸렸고, 하유진 또한 저들을 노려보았다.
나서윤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황진훈 파티가 움찔거린다.
내가 일행의 반응에 의아한 얼굴을 하자 한바다가 조심스럽게 귀띔해 주었다.
"신후 님은 관심을 끊으셨지만, 일행분들은 아니셨습니다. 특히 저 둘은 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도 참여했을 정도죠. 광진을 통해서 여러 스파이들을 찾고 무법자 우두머리들을 통해서 스파이들을 많이 색출해 냈지만, 황진훈은 아니라고 밝혀졌습니다. 스파이들 중 일부가 회유하는 과정에 있었더군요."
한바다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진훈 일행을 슬쩍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결국 넘어간 상태는 아니었기에 수면 없이 미궁 청소 3일, 식량 섭취 금지 1주일 정도로 형벌을 끝냈습니다. 심문 과정 중에서 폭력도 상당히 당한 터라…."
그 폭력을 가한 사람들 중에 내 일행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요."
대충 이해가 간다. 무법자들이 어떤 꼴로 죽어가는지 확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살려고 저러는 거고. 나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저쪽은 그걸 모른다. 내가 한국 쪽 최대 길드의 길드장이 될 것이 사실상 확정된 지금, 내가 거슬려 한다면 저들은 그날로 끝장이다. 전적도 있으니 평판이 크게 깎이지도 않을 테고. 수치심보다 공포가, 죽음보다는 생존을 원하니 저러고 있겠지.
"게다가 그 사건 이후로 수련자들에게 조금 기피되고 있습니다. 유신후 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올라가는데, 저쪽은 한참 명성 오르는 사람을 학살자라고 매도했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실수였고 처벌도 받았으니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내가 길드 가입 권유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행이 반대했고, 저 정도 파티 하나 없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으니까. 그럭저럭 최상위기는 하지만 많이 영입이 된 만큼 급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괜히 더 저러는 걸지도.
나는 잠시 황진훈 파티를 바라보았다. 저쪽 파티는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무시했다. 더러운 소문을 낼 간담도 없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영입을 해줄 것은 아니지만.
황진훈은 내 끄덕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만세 삼창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내 일행들도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저 정도로 노골적이니 일행들도 적대감보다는 어이없는 감정이 더 커지는 모양.
"오셨습니까, 한바다 님, 유신후 님."
한바다의 최정예들은 깍듯하게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치 훈련된 듯한 모습에 마법사 쪽 인원들이 당황했고, 따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고, 그들을 향해 물었다.
"환영이 고맙기는 한데… 지금 수련자들 상황이 어떻습니까?"
"…대부분은 구역에 막혀서 모너스 마을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연 님과 양기희 님 파티가 최대한 도와주고 있기는 한데, 수가 모자랍니다. 그나마 일부가 의뢰를 받아 구역을 넘나들고 있기는 한데…."
한바다 쪽 인원의 대표라 볼 수 있는 정진현. 그가 나서서 현 상황을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사냥터인 고블린의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만만치 않다고 한다. 현재 대부분은 노숙자 신세라고. 단순히 숙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1회차에서도 겪었던 일이고, 무작정 마을을 키우기에는 당장 광산 관리에 자원이 투입되어 어쩔 수 없었다. 대안은 있으니 해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 토펜을 빨리 만나야 한다.
그나마 층을 올리는데 협조한 최정예들이 그런 이들을 보살펴 적응하는 것을 돕고 있다고. 수련자들이 사냥을 통해서 부산물이 늘어나고 중층을 개척해 상단들이 주기적으로 다닐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모너스 마을로 향했고, 정신없이 바쁜 나연을 만날 수 있었다.
"신후야!"
"…고생이 많다."
나연은 구세주를 만난 얼굴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사냥터의 정보를 알려주고, 하층의 기본 지식들을 수련자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일대의 지리나 사냥터 위치, 조심해야 되는 장소 등을 간략히 표시한 지도를 수련자들에게 전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린다. 그것만으로도 나연은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수련자들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수가 너무 많다. 자신들 마을 전체 인원보다도 많은 실정. 경계할 만했다.
질서를 잡아야 한다.
나는 나연에게 일단 조금만 버티라고 말한 뒤 용병 길드로 자리를 옮겼다.
우선 영입한 이들을 용병 길드를 통해서 내 휘하에 넣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광산 보호 의뢰를 수락하게 만들어 이들을 티드린드 성으로 끌고 나갔다.
토펜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나게도 데리고 왔군."
토펜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는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들 모두를 자네 휘하에 둔 건가?"
"정확히는 700명 정도가 제 용병 단원입니다. 방금 등록하고 오는 길입니다."
한바다 휘하에서 최정예 200 근처, 마법사들 500 근처.
그것만 해도 가장 큰 세력이다.
"…듣기로는 수천이 되는 인원인데… 생각보다 적군?"
"일단은 잠재력과 현재 능력만 보고 선발한 상태라서요. 일단은 자리를 잡고 차차 덩치를 불릴 생각입니다."
길드원들에게 지원을 할 예정인 만큼 차츰차츰 늘려야지 한 번에 하려고 했다간 머리가 터진다.
토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인구 유입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 전원 싸울 줄 아는 용병이기도 하니… 지금 당장은 혼란스럽더라도 도움은 될 터. 그런데 모두 모너스 마을에서 나가려고 하지를 않아. 모너스 쪽에서 병력 파견을 요청하고 있네."
구역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마을 방위와 정찰 의뢰를 각 마을별로 모조리 발주하시면 됩니다. 대가는… 식량 조금과 병영을 통해 잠자리 정도만 제공해 주고 부산물을 모두 용병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면 해결될 겁니다."
어떤 의미로는 수련자들을 거의 무보수로 부려먹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의뢰와는 달랐다.
"마을 습격 시 방어 의무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주변 정찰을 의무화시키고 나머지는 자유로 풀어버리십시오. 알아서 사냥하고 알아서 경제 활동을 시작할 겁니다."
제대로 된 의뢰가 아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셈이지만 의뢰금이 없었다. 이정도는 각 마을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식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거의 빈 병영을 수련자들이 쓰도록 만들 뿐이니까. 그런데도 마을에 보험이 되기도 한다. 수련자들이 나가서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 초기에 잠깐 힘들 뿐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 게다가 초기에는 영주를 통해 지원하면 그만이다. 미궁에서 가져온 식량도 있으니 한동안은 괜찮았다.
어떤 의미로는 장기적으로 영지에 더 도움이 되는 의뢰였다.
초기에는 상당수의 파티가 뭉쳐서 고블린의 숲을 들락날락 거릴 거다. 쉽지는 않겠지만 쉽게 당하지도 않는다. 저들은 2년 이상 전투를 해온 수련자들. 고작 사냥터에서 쉽게 죽을 이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만 버티면 여기서 장비도 더 좋은 것으로 구할 수 있었다. 장비만 갖추면 지금 수준만 되어도 고블린의 숲은 수월한 사냥터로 전락할 터였다.
"…그것만으로 괜찮나? 용병들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사실상 보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의뢰. 보통의 용병은 그딴 의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지간히 사정 급한 F급 용병도 기피할 의뢰다.
"주변 지도를 제작해서 그들에게 분배하고 타 마을로 가는 이들에게 지원금을 줄 생각입니다. 어차피 마을로 환수될 돈이니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보태겠습니다."
"단발성 지원이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지."
말을 하면서도 토펜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용병이 보수도 제대로 받지 않고 활동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중에 놀 토벌 등의 의뢰에 의뢰금을 붙이기 시작하면 됩니다. 당장은 괜찮을 겁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토펜은 어렵사리 납득했다.
수련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저런 방식이 아니면 당장 타 구역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보수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인원이 늘어나면 용병들의 가격은 싸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용병들이 싫어하겠지만… 글쎄. 경쟁자가 늘어나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거다.
이것만으로도 감지 덕지인 셈. 나중에 더 성장하고 세상 물정을 알아 가면서 하층과 중층에 적응해 가면 된다.
이들 때문에라도 마을은 커질 수밖에 없고, 영지가 발전하면 상단들이 더 찾아온다.
나는 상단을 더 이쪽으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토펜에게 전했다.
"확실히 저들이 꾸준히 활동해 준다면 상단을 더 유치할 필요가 생기지. 마침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제 길드에게 맡기시죠. 상단이 다니는 길을 제대로 청소해 놓겠습니다."
"의뢰를 달라는 말인가?"
"예."
이를 통하면 내 길드원들을 키울 수가 있었다. 이들은 최정예. 사냥터에서 굴리기에는 효율이 나빴다.
갈색 놀들, 그리고 늪지를 통해서 키우는 것이 나았다. 마법사들이야 슬슬 스킬을 배우게 만들어야 했고.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지겠지만, 마정석이 발견되고 난 이후라면 별로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다. 사실 지금 철광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현재는 거의 어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당장 현금이 부족했다.
천천히 중층과도 길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고.
내심 마정석 광산이 발견되지는 않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먼저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음… 솔직히 자네가 돌아오기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네."
갑자기 토펜이 말을 돌렸다. 그러더니 약간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근데 그거 아나? 자네가 없는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마침 상단을 더 유치해야 하겠다고 한 말, 기억하는가?"
확실히 마침 필요한 일이라고 하긴 했었다.
'설마 발견되었나?'
"그렇습니다."
"실은 말일세. 나랑 자네, 둘 다 엄청나게 대박이 나 버렸네."
'발견됐네. 하긴 슬슬 발견될 때가 되긴 했으니까.'
만약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으면 직접 싸돌아다니며 찾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짐짓 의뭉을 떨었다.
"자네는 우리 영지의 광산 전체에 일부 지분을 갖고 있었지."
말을 너무 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에서 말일세, 무려, 마정석이 발견되었네."
나는 억지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렇지. 확실히, 상단을 유치할 필요가 생겼어. 동시에 위험해졌지."
그렇다. 약자가 보물을 갖고 있으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순도도 높고, 질도 좋아. 그래서 알려지면 정말 위험하겠다 싶더군. 그래서 일단 최대한 비밀에 부쳐 놓은 상태일세."
잘한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설마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영지의 증표를 주겠네. 제국의 중앙 마탑에 다녀와 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