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한바다는 곧바로 황진훈을 불러들였고, 그 자리에서 반쯤 죽여버렸다. 그의 파티원들 또한 멀쩡하지는 못했다. 기절할 때까지 맞은 것은 아니지만, 처벌은 받을 예정인지 기절한 황진훈과 함께 이윤형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로 이송되었다.
그리고는 우리, 정확히는 나를 향해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해 왔고, 그 장면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확히는 황진훈을 패버린 것보다는 한바다가 내게 사죄하는 모습에 놀라는 것 같았다.
나 또한 놀랐다. 설마 이자리에서 패 버릴 줄은… 어딘가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연이 봤다면 기겁하지 않았을까?
하기야 이런 폐쇄된 곳에서 질서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겠지. 인망만으로는… 솔직히 한계가 있을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폭력을 쓸 줄은….
그런 모습에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조연은이 다가와 가볍게 귀띔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처벌은 필요하니까요…."
본래는 재판도 있는 듯했지만, 범죄가 잦아지자 스트레스를 받은 한바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벌해 버리는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 상대가 무법자였다고… 그런데 의외로 반응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있는 일이라나? 물론 반감을 가진 이들 또한 많지만.
"…그래도 괜찮습니까?"
"적도 있고, 여기는 지구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우리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기도 하고요. 2년 사이에 다들 익숙해졌어요."
최소한의 규칙은 있지만, 세세한 법률은 없었다. 재판을 하더라도 배심원제로 하는 데다, 거기에 한바다의 의견이 끼어들면 사실상 반대가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사실상의 독재.
법 관련 출신 수련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여기에 법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한계가 명확했다. 한바다는 이곳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여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정도 권력을 가진 이가 생각보다 덜 타락했다. 아니, 이건 그냥 필요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니 타락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엄청 고생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권력 유지를 위해 그러는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 조금 더 지켜보기는 할 생각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한바다를 일으켜 세웠고, 한바다는 일어나서도 내게 사죄를 해왔다.
한바다는 그런 우리를 데리고 20층으로 이동했다.
20층의 고정 안전 구역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본래는 당번제로 관리된다고. 여기는 미궁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만 오기에 평소에는 비어있는 편이라고 한다.
"…학살자 칭호는… 정확히는 무법자들이 만들어낸 칭호입니다. 유신후 님의 명성을 깎아내려는 의도였죠."
그 외에도 많다고 한다. 인간 도살자니, 미친놈이니, 싸이코니, 살인마니 하는 단순한 호칭부터 인육을 먹는다거나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거나 사실 마법사 집단은 노예로 만들기 위해 키운다는 소문까지 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은 믿지 않는다고. 그래도 학살자 같은 칭호는 나름 사실이 가미되어서인지 제법 유명하게 퍼졌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무법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낸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고 떠난 것이 사실이라 악인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터부시되는 말이기는 했다.
주하연이 한바다에게 물었다.
"그들이 이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저희 쪽에 사람이 심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일이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비정기적으로 정보를 전하거나 납치를 위해 수를 쓰는 짓을 한다고 한다.
"몇 번이나 토벌하려고 했지만… 미궁은 비상식적으로 넓더군요. 도대체 끝이 있기는 한 건지… 몇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무력의 부족이 아닌, 정보의 부족. 어쩔 수 없었다. 미궁은 넓고, 복잡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어떻습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관리하는 중입니다. 신후 님이 신경 쓰는 집단이라고 하니까 무법자들이 하나같이 노리고 있거든요."
마법사 집단의 수는 50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정확히는 483명.
마법사가 500이라… 한국에 그렇게 많았던가? 하기야 대부분은 여기서 죽고 못 올라가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은 스킬 슬롯 4개 수준이라 대단한 마법사가 되기는 글렀지만. 현재 16층에 있다고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얼마나 성가신지… 평균 도달 층수가 현재 18층입니다. 제일 아래가 16층이고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한바다는 정말 피곤해 보였다. 하기야 정의감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수천 단위의 인간을 2년간 관리한 거다.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황진훈 처럼 20층을 클리어했지만 하층으로 가지 않고 한바다를 돕는 인간들이 있었을 터다. 듣지는 못했지만, 반란도 있지 않았을까?
별의별 꼴을 다 봤을 테니, 질릴 만도 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더 낫지만.
"나쁘지 않네요."
"…네?"
"아마 대부분의 진행이 느린 이유는… 자력으로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겠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층수 올리세요."
"…무슨?"
"그냥,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자는 말입니다. 하층에서 성장해도 됩니다. 충분히 준비해 놓았거든요."
나는 한바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한바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한바다의 고생을 듣고, 우리 파티가 중층에 해 놓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직히 지칠 만 하다 싶었다. 역시 중간에 반란도 있었고 대대적으로 무법자들이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내부에서 집단을 이뤄 자기들 이익을 찾겠다고 데모하는 놈들도 있었고, 은밀하게 안전 구역을 차지해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려는 놈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바다 파티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모두 막아 냈다고. 괜히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무력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상태는 유지되지 못했을 터였다.
덕분에 한바다에게 반감을 가진 이들은 암암리에 한바다를 독재자 내지는 폭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말투가 딱딱해진 것은 덤이고.
우리가 하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한바다는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라는 듯한 표정.
되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미궁에서 보여주신 힘만 봐도 뻔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위에서 도태된다? 누구라도 올라간다면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자신은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과거 이곳을 떠날 당시의 유신후를 쉽게 이길 자신이 없다고 한다. 능력치는 자신이 나을지 몰라도, 당시 내가 보여준 기술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진지한 표정의 한바다. 웃긴 것은 내 일행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제안에 따라 한바다는 남은주와 겨뤄보았고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리했다. 남은주는 놀란 표정이었고, 역으로 한바다 또한 놀란 표정이었다.
그 재능이 부족했던 남은주가, 이 정도 수준에 오른 것 자체가 놀랍다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되려 한바다의 무력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와… 미궁에서 저 수준의 능력치를… 은주는 신후 씨한테 온갖 것을 다 받았는데…."
곧이어 한바다는 나와의 대련을 시작했고, 나는 어린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한바다를 제압해버렸다.
한바다는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강렬한 열망을 가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눈. 힘을 갈망하는 수련자의 눈동자였다.
'정말 많이 변했네.'
이렇게까지 변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연을 여기 두고 갔으면 편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하기야 별의별 꼴을 다 봤으니까. 질릴 만도 하지. 나연이나 한바다가 가질 수 있었던 도덕적 관념은 사실 현대 지구니까 가능한 수준이다. 이런 야생이나 다름없는 곳에 떨어지면… 지키기 힘들기는 하지.
그래도 이야기함으로써 알게 된 사실은, 한바다가 권력에 취했다거나 아예 도덕 관념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거다.
여전히 이곳의 질서, 최소한의 규칙은 유지되고 있었고 묻지마 살인이나 강간, 인간의 노예화, 강도 등의 행동은 여전히 제한되고 있었다.
미성년자 같은 정신이 아직 덜 성숙한 이들이나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이들 또한 관리하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단지, 한바다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힘에 대한 열망 또한 커졌다. 아마 자신을 돕는 대신 위로 올라간 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가진 듯했다.
최근에는 바쁜 와중에도 되려 고난의 신전으로 향하는 횟수를 늘렸다고.
"…그런데 정말 저들 모두가 하층으로 올라가도 상관없겠습니까? 그나마 폐쇄된 미궁이라 통제가 가능했지만…."
"그곳에는 거주민이라는 이들도 있고, 자체적으로 자경단 또한 존재합니다. 용병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런 곳에 풀어 두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제가 흡수할 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단체를 만드셨다고 했었죠…."
"네."
"거기 들어가면 신후 님 파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네?"
"리더 자리는 지쳤습니다. 가능하다면… 신후 님 파티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이전처럼 임시가 아니라, 완전한 합류 형태로."
가능하면 은연이와 조윤형도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제가 만들 단체, 길드라고 부를 예정입니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가능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파티에 끼어들 수는 있죠. 하지만 고정 파티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고정 파티로는 조금…."
"언제까지 고정 파티를 현재 인원으로 유지하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그럼 휘하에 있다 보면 기회가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실이었다.
확실히 파티 인원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우리 후열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마법사와 궁수를 충원할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키퍼도 늘릴 예정이었다.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 한바다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하층에서 길드원으로 받아들일 의향이… 아니, 사실은 제 쪽에서 영입하고 싶을 정도니까요."
"감사합니다."
무난한 영입. 오히려 뭔가 당했다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쁜 결과는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향후 미궁을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갈 방안이나 현재 한바다 휘하의 믿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들 중 흡수할 만한 사람이나 한바다가 봐 둔 재능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천천히 그간의 이야기나 풀어가며 천천히 끌어들이려는 내 계획과는 다르게 어째 한바다가 더 급해 보였다.
어지간히 지친 듯했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 조연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입버릇처럼 지겹고 짜증 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 파티와 함께했던 시절이 되레 그립다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우리가 했던 사냥을 떠올리며 미노타우로스 몰이 사냥을 혼자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해.'
처음 보자마자 고정 안전 구역 제한 풀라고 소리치던 사람이, 이제는 현실과 타협하고 있었다.
나는 내심 한바다를 나연 곁에 붙여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는 양기희 파티에게 관리하게 하고, 현실은 한바다로부터 배운다면 나연은 내가 원했던, 중립적인 성향을 갖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있을 계획을 한바다와 나눈 뒤 우리는 간만에 미궁의 불빛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부터 한바다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사람들을 풀어 우리에 대해 설명한 이후, 수련자들을 강제로 하층으로 올리겠다는 뜻을 선포했다.
상상 이상의 반발이 이어졌지만, 나는 한바다가 왜 독재자, 폭군이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반대 의견을 지쳤다는 말과 함께 묵살해버렸고, 그러면 나는 갈 테니 당신이 관리하라는 말을 외쳤다.
관리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말에 그녀의 협력자들이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사이에 내가 요청했던, 마법사들의 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신이 유신후 님… 맞으신가요?"
"네. 제가 유신후입니다."
"저, 저는 마법사 집단의 대표인 이연솔이라고 합니다. …한바다 님께 저희를 키우라고… 그… 지시, 하셨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곧바로 관리자의 눈동자를 사용했다.
그녀의 잠재력은 상급. 마법사 집단의 대표가 될만했다.
"…어째서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한바다가 말했던, 무법자들이 낸 소문에 대해 기억해냈다.
"…노예로 부리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흠칫.
이연솔은 내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어딘가 겁먹은 듯한 몸짓.
"마법사는 그 잠재력이 높다는 판단이 들었고, 약한 시절을 견디지 못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기에 따로 부탁했을 뿐입니다."
하급 마법사일지라도 마법사들이 뭉친 화력은 어마어마하다. 그 힘이 필요했기에 미리부터 작업을 했을 뿐.
하지만 이연솔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모습.
나는 곧바로 나서윤을 찾았다. 이연솔, 나서윤, 나까지. 나는 셋이서 함께 사냥을 나섰고, 나서윤에게 마법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파이어 볼, 리피트, 폭."
익숙한 조합. 그리고 곧이어 엄청난 굉음이 공동에 퍼진다.
당연히 남은 몬스터 따위는 없었다. 순식간에 달궈진 미궁 바닥 위에서 드랍된 식량이 익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의 위력을 확인한 이연솔의 눈이 커졌다.
"저, 저게 마법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이연솔 씨도, 언젠가 사용하실 수 있겠죠. 게다가 서윤이는 순수 마법사가 아닌, 마검사입니다. 마법사라면 더한 위력의 마법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쓰지 않더라도 중급 마법 쯤 되면 마법 하나로 저만한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이연솔은 가능할 거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이연솔은 내 말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간, 상당히 무시를 받았던 듯, 설움이 북받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봉두난발의 남성. 상당히 지저분한 꼴을 한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신후 님."
조금 갈라지는 듯한 탁한 음성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누구시죠?"
심상치 않은 분위기.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광진이라고 합니다."
"광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상대가 말을 이었다.
"무법자, 라고 하는 편이, 알아듣기 쉬우실 것 같군요."
무법자.
피식.
나는 실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