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학살자라….
처음 듣는 별칭이다.
나름 쓰레기들만 청소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래도 사람을 수없이 죽인 것은 사실이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괜찮은 이미지를 유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뭐, 적들에게 단호하다는 의미로는 나쁘지 않으려나? 제 사람만 잘 대한다는 이미지면 충분하긴 하니까.'
대놓고 성군 이미지는 애초 노리지도 않았다. 이쪽 편으로 분류된 이들에게는 친절하고 동시에 잘 챙긴다는 이미지를, 상대 쪽에게는 단호하고 가차 없는, 하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이미지만 만들 수 있으면 충분하다.
만인에게 친절한 이미지는 오히려 이쪽이 사양이다. 호구라고 생각하며 찔러오는 이들은 무척 불쾌하니까.
하지만, 우리 일행들에게는 아닌가 보다.
"거기 아저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서윤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서윤을 제외하고도 하나같이 날 선 얼굴이다. 주하연은 나를 학살자라고 부른 남성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고, 남은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모로 꼰 상태로 저쪽 일행들을 주시했으며 하유진은 완전한 무표정으로 이미 단검을 손에든 채 은신까지 사용한 상태였다.
"아, 아니… 아닙니다. 그, 제가 말실수를…."
"학살자? 하악사알자아?"
…저런 애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빠가 그쪽 사람들 살리겠다고 올라가야 할 시간을 미루면서까지 쓰레기 청소를 해 줬는데, 그 대가가 학살자? 오빠가 당신들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장난감으로 아는 인간들을 막은 건데, 학살자? 고정 안전 구역 그냥 쓰게해 줘, 최소한의 안전 확보 해줘, 힘든 사람들 도와주라고 바다 언니한테 권리까지 내주기까지… 정말 아낌없이 베풀었는데, 학.살.자 라고요?"
나서윤이 비슷한 느낌의 말을 연속으로 내뱉는다. 얼핏 그냥 말장난 같았지만 서서히 차가워지는 목소리와 처음의 분노가 아닌 냉점함을 찾아가는 얼굴,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곧 저들을 죽일 것만 같은 살기가 가득 담긴 마력의 방사는 저들에게 점점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주변의 온도가 몇 도 정도 내려간 듯했다.
"그만하렴 서윤…."
"한바다 씨가 그렇게 가르쳤나요? 그쪽, 이름이 뭐죠?"
주하연이 끼어든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도 상관없었다. 솔직히 양기희 파티의 사제, 차산미가 강간마니 어쩌니 했을 때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오해이기도 했고.
그냥 개가 짖는 느낌? 현재는 내 휘하에 들어온 상태니 지금 그따위로 말하면서 여론을 악화시키면 가만 둘 생각은 없지만.
지금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준이 되지도 않는 이들, 그것도 다수도 아닌 소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는 아니었다. 나를 학살자라고 부른 시점에 관리자의 눈동자로 확인을 해 봤지만 그렇게 출중한 능력을 지닌 이도 아니었고, 1회차에서 이름을 크게 날린 이도 아니었다.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있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죽거나 좋지 못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목표를 이루기도 어려운 마당에 저런 놈들에게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게다가 전사가 학살자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주변의 반응이 좋지 못했다. 반은 그런 전사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고 일부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즉, 이건 모든 하층의 수련자들이 나를 학살자라 부르며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닐 거라는 반증이다.
그런 이가 내게 반감이 있다? 내 길드에서 제명하면 그만이다.
내 길드는 한국 쪽 최대의 길드가 될 거고, 하층을 지배하는 길드가 될 거다.
중층, 제국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나는 최고의 길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거고.
그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면 저들이 손해지 내가 손해는 아니다. 내게 반발한다? 그러라고 해라. 적어도 한바다는 저들이 아니라 내게 붙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약속을 지킬 거거든. 한바다를 아주 많이 밀어줄 생각이었다.
물론 내 휘하에 넣을 생각이고.
여기서 자기만족을 하며 보냈을 테지만, 성장한 나를 보면서 어떤 감정이 들지는 모르겠다.
나름 성장은 했겠지만… 글쎄. 중층까지 다녀온 내가 비교 대상이라면… 불쌍할 정도다.
어쩌면 오만한 생각에 가까울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회귀자고 현시점에 지금까지 성장한 저력을 생각한다면 솔직히 오만보다는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하층에서의 내 영향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수준.
그렇기에 저들의 나를 학살자라고 부른다고 한들 크게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저놈이지, 내가 아니다.
물론 개인감정과는 다르게 내게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은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똘똘 뭉쳐야 하니까.
그러나 내 일행들의 생각은 나와 전혀 다른 듯했다.
주하연은 한바다를 들먹이며 전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쪽 일행은 아예 무기를 집어넣은 채 이쪽의 날 선 어조에 어쩌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서윤과 주하연이 날카롭게 항의하고 남은주는 저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
저들은 부디 화를 풀어주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특히 직접 학살자라고 내뱉은 전사는 말을 하고도 실수한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감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그 행태에 주하연과 나서윤은 더욱 화가 난 상태인 듯하고.
하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으로 허락만 해주면 저새끼 목을 따서 가져오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냥 별거 아니라는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하유진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10분에 걸친 항의. 솔직히 한바다와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저들은 멀쩡하게 말로만 항의받지 않았을 터였다.
사실 10분인 것도, 내가 중간에 막고 그만하자는 이야기를 꺼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부디 용서를…."
"한바다 씨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두고 보죠. 어떻게 되는지."
주하연은 끝까지 저들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사자는 나지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기는 하다만, 앞서 말했듯 호구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실제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것과 실제로 참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저들을 무시한 채 곧바로 1-1구역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며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나서윤과 주하연이 가볍게 처리했다.
나서윤의 마법 한 번이면 공동이 청소된다. 주하연 또한 새로 얻은 스킬인 천국의 분노를 이용해 공격 마법을 사용하며 조금이나마 분기를 풀었다.
우리를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저쪽 파티로써는 저런 모습을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암울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심지어 미궁에서 마법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이쪽은 마법을 쓰는 사람이 둘이다. 그나마 본 마법이라고는 나연이 있을 당시의 정령 마법 정도일까.
그마저도 저 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고정 안전 구역으로 들어왔고, 곧바로 15층으로 이동했다.
저들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바다가 주로 쓰는 층은 15층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15층에 나타나자 우리를 발견한 사람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 어어? 유, 유신후 님?"
조금은 눈에 익은 얼굴. 순간적으로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관리자의 눈동자를 사용했다. 그러자 박건우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20층에서 11층으로 내려갔을 때 쓰레기들과 싸우고 있었던, 그나마 양심 있는 쪽이었던 놈이다.
한바다 밑에서 구르는 중인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박건우 씨."
"아, 아, 예, 기, 기억해 주셔서 영, 영광입니다. 위, 위로 올라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다시 미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였습니까?"
미묘하게 말 더듬는 버릇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긴장한 듯했다.
"아뇨 그런 방법은 모릅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되었네요. 운이 좋았다… 고 해 두죠. 한바다 씨는 어디 계십니까?"
"지, 지금은 고난의 신전에 계십니다. 곧 오실 시간이니…."
"그렇군요."
"편, 편하게 쉬십시오. 어차피 여기는…."
하기야. 본래 주인은 나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주하연과 나서윤은 한바다를 만나면 직접 이야기할 생각인지 우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리 뒤를 이어 내게 실례를 했던 파티가 올라왔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곧이어 박건우의 말대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지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조연은과 이윤형, 그리고 한바다. 과거 우리 파티와 함께했었던 이들. 오랜만에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상태 창]
-이름 : 한바다
-나이 : 28
-직업 : 파랑(波浪)의 기사(슈퍼 레어)
-LV. 22
-신체 능력
근력 : 60 민첩 : 46 체력 : 49 마력 : 50
[스킬]
고유 스킬 : 푸른 심장(슈퍼 레어)
스킬 목록
-수호(슈퍼 레어)
-파도 검술(슈퍼 레어)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나는 곧바로 한바다를 향해 관리자의 눈동자를 사용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능력치는 상승했지만 스킬 목록에 변화는 없었다. 아무래도 미궁에서는 스킬을 배우기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몬스터를 잡는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능력치는 분명 착실하게 올렸다.
일정 수준까지 올린 이후 고난의 신전을 통해서 올렸으리라 짐작된다. 내 조언을 충실하게 따른 것으로 보였다.
이후부터는 몬스터들이 더더욱 강해지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한 10년쯤 있었으면 2대 권왕마냥 모든 능력치를 90이상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저 정도 능력이면 그냥 위로 올라가는 것이 낫겠지만. 재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저 수준이면….
'남은주랑 비슷하거나 조금 세려나?'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남은주가 압도할 거다. 스킬 숙련도가 남은주가 훨씬 높은 데다 레벨이 오른 이후 능력치 성장 정도가 남은주가 더 높을 테니까.
그래도, 미궁에 머물면서 하층에서 버텨온 남은주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고난의 신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키밀리와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크게 기대가 되었다.
한바다를 제외한 조연은과 이윤형 또한 그녀보다는 부족할지라도 평균 40을 넘은 높은 수치의 능력치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한바다 파티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한바다를 비롯한 조연은과 이윤형은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어떻게 여기에…."
"뭐, 어쩌다 보니?"
에파토스에게 했던 말처럼 가볍게 대답한다.
"…여기 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었습니까?"
"아뇨. 우연이었어요. 저희도 올 줄은 몰랐죠."
가벼운 해후. 설마 여기서 우리를 볼 줄 몰랐는지 한바다는 반가우면서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위로 올라간 이들은 어떻습니까? 잘 적응하고 있나요?"
"그럭저럭이요. 아, 일부는 제 휘하에 있습니다."
"…결국 파티원을 늘리셨군요. 근데 나연 씨는…."
"하층, 아 참. 위는 하층이라고 부릅니다. 하층에 제가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요. 그것 때문에 남아 있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기도 했고. 그리고 파티원을 늘렸다기보다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다는 말이 맞겠죠."
우리 일행은 곧바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하며 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를 벌써부터 할 수는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화제가 될 만한, 그간 떨어져 있음으로써 생긴 어색함을 풀어줄 정도의 이야기만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신후 님. 외향이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한바다는 내 손과 쇄골, 그리고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킬 영향이죠. 우리 파티 중 저만 유일하게 중층에 진출했거든요."
"…너무했어요. 기왕이면 같이 갔으면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 섭섭해하는 주하연과 그걸 달래는 내 모습을 한바다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피부도 더 좋아지신 것 같은데…."
"직업 때문이래요. 새로 전직했다던데…."
"……."
한바다가 말하고 주하연이 설명한다. 처음에는 문신 때문에 별다른 변화를 눈치 못 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광택이 흐르는 내 피부에 주하연이 물어보았고, 나는 아마 직업 때문인 것 같다고 얼버무린 적이 있었다.
능력치 상승과 꾸준한 마력 훈련으로 신체의 노폐물을 제거한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하지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기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직업 보정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만큼, 아마 레벨이 더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외적으로 도움이 될 테지만, 기왕이면 전투력에 영향을 줬으면 싶었다.
그래도 길드의 대표가 외적으로 괜찮다면 길드 이미지에 도움이 되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벼운 환영과 화제가 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던 와중 불편한 표정의 나서윤이 한바다를 향해 말했다.
"바다 언니. 우리 오빠 별명이 왜 그래요?"
갑작스러운 말. 한바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맞아요 바다 씨. 길드원 교육이 잘못된 것 같더군요."
곧바로 주하연마저 입은 웃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11층에 도착하자마자 11층을 청소하던 사람을 만났어요. 무법자들이라고 했던가요? 그들은 아닌 것 같더군요. 바다 씨 휘하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신후 씨를 알아보고는 학살자라고 하더군요."
"…누굽니까? 그거."
저 멀리, 안절부절못하는 파티의 모습이 보인다. 부디 그러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이들. 하지만 가차 없었다. 주하연은 여전히 입만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황진훈 씨라던데… 아시는 분인지 모르겠네요."
한바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