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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28화 (128/317)

# 128

고블린의 숲에 가까이 온 시점에서 하루 야영을 한 뒤 우리는 곧바로 숲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많은 수의 병사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이미 훈련이 잘 된 듯 제법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애초에 숲이라고는 해도 빽빽한 삼림이라기보다는 나무 사이의 공간이 충분히 넓고 공터도 많은 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고블린들 다수가 지내는 넓은 장소인 만큼 평범한 숲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평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진형이나 전투 방법이 상당히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훈련은 되어 있기는 할 테지만, 솔직히 숙련도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백인대별로 서로 신호하며 일정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방식을 취해 서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움직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취하는 만큼 우리 움직임은 순식간에 고블린에게 들켜버렸다.

작은 부락들이 급하게 피난을 가고 숲이 서서히 소란스러워진다.

아마 오래지 않아 대 부족에게 연락이 갈 거고 그들도 부랴부랴 준비를 하겠지.

그래 봤자긴 하다만…….

결국 첫 전투는 우리의 진격을 늦추기로 결정한 고블린들이 천에 가까운 병력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제법 많은데?"

"그래도 보수는 괜찮으니까. 동수 정도까지는 확실하게 우리가 이긴다고."

"확실히 고용주 말대로 많기는 많아. 괜히 우리를 500이나 고용한 게 아니야."

용병들은 서로 가볍운 잡담을 하며 각자 무기를 손에 들었다.

용병들은 백인대별로 움직이는 이들처럼 백 단위로 나뉘어 적당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사불란하지는 않더라도 나름 지시대로는 움직이던 이들이다.

'아무래도 제대로 정보를 받지 못한 모양인데?'

보이는 고블린의 수는 천 마리 남짓에 불과했다. 듣기로는 최대 이놈들의 열 배에 가까운 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하기야 하급 용병들에게 정보를 제대로 줘봤자 도망이나 칠 거다. 힘이 부족하면 당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일면이기도 했다.

뭐, 영주가 친정하는 마당에 위험한 전투라고 생각할 용병이 얼마나 있겠냐만.

괜히 귀족이나 후계자, 영주의 자식들이 친정하면 사기가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다들 갈까."

"네 언니."

"키퍼는 우리 쪽 병사분들이 해 주실 테니까, 그냥 셋이서 날뛰면 돼. 최대한 조심하고. 특히 유진이 너는 방어력이 많이 떨어지니까, 가호 풀리면 바로 돌아오고."

"네 누나."

"끼에에에!"

오랜만에 들려오는 고블린의 괴성.

고블린들은 자신들의 수가 더 적음을 깨닫고는 먼저 달려드는 대신 조심스럽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약간 높은 고지대 정도지만, 숲에서 저런 얕은 고지대라고 하더라도 그 이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돌격!"

길라함의 짧은 외침. 영주는 전투에 끼어들지 않는다. 마치 토템처럼 말 위에서 전투를 지켜볼 뿐.

길라함은 그런 영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흐아아압!"

"우와아아아아!"

지시를 받은 병사들 일부와 용병 전원이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속도로 달려가는 세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파이어 볼! 리피트(repeat)! 폭(爆)!"

나서윤이 달려가는 와중에 마법을 사용한다.

'호오….'

무빙 캐스팅. 거기에 더해 부가 효과를 두 개나 덧붙였다.

고속 영창과 병행해서 무빙 캐스팅이라…. 스킬로 익힌 것도 아닌데 사용한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보였다.

나서윤은 점점 마검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직업 보정이 더해지면서, 연관된 스킬 숙련도 상승이나 습득에 도움을 받은 것이 지난 7개월간의 수련 끝에 점점 꽃피워가고 있었다.

물론 재능이 없었다면 저런 결과를 얻을 수 없었겠지만.

쾅! 콰콰쾅!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

1회차에서 보았던 마법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7개월 전에도 충분한 위력을 보였던 기술들이, 한층 더 발전되어 있었다. 중급 마법을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 기대가 된다.

폭발이 지나간 자리에는 백 단위 고블린들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끄에에에에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이 숲을 울린다. 엄청난 위력과 그에 따른 고블린들의 위력에 일순, 달려들던 용병과 병사들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곧이어 남은주가 익어버린 전장 가운데로 파고들며 외쳤다.

"수호!"

마법의 위력에 겁먹었던 고블린들.

일대 고블린 일부가 남은주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곧바로.

"끼에에에엑!"

벌겋게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남은주에게 달려들었다. 수호 스킬에는 확실히 도발 기능이 붙어있기는 했다. 아무래도 그걸 목표로 스킬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직 살아있는 고블린도 존재했다. 고통이 너무 커, 스킬의 효과를 비교적 덜 받은 이들이,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고블린들이 전장 한가운데로 달려든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고블린이 당황하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키엑! 키에…!"

서걱.

어떻게든 지시를 내리려던 고블린 우두머리.

그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다.

"키에?"

주변 고블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우두머리를 바라보았을 때, 작은 몸집의 인간이 어느새 우두머리의 어깨를 박차고 나무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핑-.

급하게 저격병이 소년을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소년은 단검으로 화살을 쳐버리고는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고, 이어서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순식간에 진형이 와해되고 지휘관을 잃은 고블린이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발이 벌겋게 익어가면서 남은주에게도 달려들었던 고블린 대부분이 죽어가고 있었다.

바닥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고블린들은 남은주에게 달려들던 고블린들에게 밟혀 그 형체를 잃어버렸다.

달려드는 고블린에게 단 한 번의 칼질 혹은 방패 후려치기로 단숨에 목숨을 빼앗는 남은주의 모습은 흡사 기계를 연상시켰다.

무감정한 표정. 그렇지만 자세히 본다면 그녀의 눈에는 어딘가 희열이 언뜻 보이고 있었다.

나서윤은 재차 파이어 볼을 사용하고는 자신 또한 진영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두 개의 검이 너무나도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목 없는 고블린들만이 즐비했고 수십의 고블린이 단숨에 썰려버리자 겁먹은 고블린들이 허겁지겁 물러나며 저들끼리 뒤엉켜 넘어지기 시작했다.

도발이 있었다면 남은주에게 달려드는, 마치 부나방을 연상시키는 고블린들과 같은 모습을 보였겠지만, 나서윤에게는 도발 효과를 일으키는 기술이 없었다.

"검기!"

한 용병의 외침.

나서윤의 두 검에는 확실히 검기가 보이고 있었다.

'동시 운용?'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고 검에는 검기를 두른다. 게다가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자신이 얻은 용사 스킬 중 이중나선구조를 상당히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신체 스텟이나 레벨의 성장은 부족했지만, 숙련도 면에서는 압도적인 성장을 보였다.

저 정도 숙련도라면 레벨이 올랐을 때 나서윤은 정말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간, 애지중지 키워온 보람이 느껴졌다.

그사이 하유진은 습격과 은신을 반복하며 고블린 저격병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귀찮은 원거리 공격을 차단하고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진형을 휘젓는다.

달려든 병사와 용병들이 전투 현장에 도착했지만, 셋의 무위에 넋 놓고 구경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고블린들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남은주의 주변만큼은 끝없이 전투가 일어났지만, 그쪽을 제외한 고블린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유리한 고지? 지형적 이점? 숫자?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전투 시간은 단 10분. 그 시간 만에 절반 이상의 고블린이 쓸려나갔고, 살아 돌아간 고블린은 300이 채 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전투.

전투를 치룬 남은주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고, 하유진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으며 나서윤은 담담한 모습을 유지했다.

감회가 남다를 만 하기는 했다. 여긴 이들이 제일 약했던 시절을 보낸 장소였고, 가장 목숨을 위협받았으며 가장 위험했던 장소였으니까.

아니, 그것도 잠시였다. 내 쪽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를 해 주었고, 나서윤은 해냈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며 작게 '나이스!'를 외쳤다.

고블린들을 학살한 것보다, 내 손짓 한 번을 더 기뻐한다.

나는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허, 허허허…."

와, 와아아아아아….

어정쩡한 함성.

전투의 결과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연한 결과다. 예상했던 일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영주, 스페레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

"미쳤군, 미쳤어. 우리 성을 나간 뒤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스페레스는, 허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저 멀리 병사들이 급하게 물을 퍼 숲에 난 불을 끄고 있었다.

저 불을 낸 범인은, 나서윤이었다.

주변에는 고블린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첫 번째 전투가 끝난 이후, 우리를 막기 위해 소량의 전투 부대를 여러 차례 보내기는 했지만. 오는 족족 나의 파티원들에 의해 모조리 작살났다.

병사나 용병들은 이전처럼 구경만 하지는 않았고, 전투에 참여하고는 했지만 전공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결국 고블린들은 엄청난 속도로 진군해오는 우리를 향해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으로 응수했고, 무참하게 찢겨 나갔다.

만에 가까운, 수천에 이르르는 군세에 아군 용병 몇몇이 이건 사기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울며 겨자먹기로 싸움을 시작했지만 싱겁게도 전선을 휘젓는 셋에 의해서 고전은커녕 압도적인 학살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나서윤은 순수 마법사로써의 기량을 뽐냈고, 학살에 학살을 거듭했으며 숲에 불을 지르고 함정을 파 길목을 실시간으로 차단하며 제대로 고블린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하유진은 주술사, 저격병, 지휘관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목을 잘라버리는 것에 성공했으며, 세 번의 시도 끝에 우두머리의 목을 잘라버리는, 멋진 공훈을 세웠다. 사실상 세 번의 실패 과정에서 주하연의 가호 덕분에 무사히 몸을 빼냈고, 다시 주하연에게 가호를 받은 뒤에야 성공했지만, 성공 자체는 하유진의 실력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터였다.

지금 일행들의 수준에 비해 약해 빠진 고블린들이라고는 해도, 그 수많은 방어 병력을 뚫고 고블린 우두머리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남은주는 전장 한복판에서 수호를 이용, 전장 한복판에 미친 듯이 움직이는 고블린 무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오로지, 남은주만 바라보며 달려드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고블린 무리. 남은주가 싸운 전장에는 고블린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언덕이 생기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서 가장 공훈을 크게 세운 것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스페레스는 주하연의 손을 들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분… 설마 성녀가 된 건가?"

주하연은 마지막 전투에서 단 한 가지 스킬, 성역 선포만으로 최고의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그녀가 사용한 스킬, 성역 선포는 주하연 신성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일대에 도트힐을 선사했다.

스킬 덕분에 효율이 오르고 성흔과 직업 보정, 신성력으로 신성 마법을 사용해 효율이 한 번 더 오른 덕분에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성역 선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성역 선포의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엄청 넓은 범위를 커버하지는 못했지만, 남은주가 커버한 범위 내에서는 이쪽 병력의 사망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부상자 대부분은 거의 치료가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친 부상자들은 급하게 주하연의 성역 선포 범위 안으로 몸을 옮겼고, 아주 심각한 상태만 아니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니, 심각한 이들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사이 주하연이 치료를 해준다면 어떻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병사들과 용병들은 주하연을 바라보며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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