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27화 (127/317)

# 127

오래된 숙제

"정말 와줄 줄은 몰랐군."

"올 수 있다면 오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과연 우리의 영웅다워."

성주는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꼬아 듣는다면 비꼬는 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성주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린 모습이었다.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었다.

"2년 전, 고블린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말씀하셨었죠."

"그래. 그랬지."

"준비가 되셨습니까?"

"2년 동안, 용병을 모집하고 병력 양성에 최대한 힘을 썼지. 저 고블린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서서히 죽어갈 뿐이니 말이야. 제법 무리를 하긴 했지만, 오늘을 기준으로 용병 500과 계약을 맺었고, 병사 1500을 맞췄네. 병사 전원에게 괜찮은 품질의 갑옷과 무기까지 맞췄어. 기사도 둘을 더 뽑았고."

"……."

확실히 최대한 노력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았다. 2년 새 병사를 5배로 증원하고 장비 수준을 높인다. 거기에 더해 용병 500과 계약이라…. 내가 돈이란 돈은 다 훔친 걸로 아는데, 어디서 그런 돈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중층에서 맞췄던 것처럼 맞춤이나 최고 품질을 노리지는 않았겠지만, 괜찮은 품질의 갑옷이나 병사, 용병 계약 등을 생각하면 내가 훔친 돈 이상의 금전이 필요했을 텐데… 영지 소속 대장장이들이 무지하게 구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주의 표정을 밝지 않았다.

"고블린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그간의 피해를 복구하고도 2년 새 수가 더 늘어 거의 만에 육박하더군."

"……."

밝지 못할 만했다. 2천의 병사. 거기에 마법사는 0. 상대는 주술사도 존재하고 저격병도 존재한다.

저쪽이 아무리 장비가 부실해도 수 차이가 5배 가까이 난다. 성주가 생각하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튜토리얼 고블린.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용병들 수준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E등급이고 일부가 D등급일세. 고블린이라고 하니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이정도 수준의 용병들 밖에는 오지 않더군."

스페레스는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어차피 백업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될 이들.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스페레스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출정은 하실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 않으면 안 되지. 계약을 그리 맺었으니 말이야."

"출발은 언제입니까?"

"준비는 끝났기에 언제든지 나갈 수 있지. 자네가 왔으니 이틀 정도 뒤에 갈 생각이야. 솔직히 자네가 정확히 2년째에 맞춰 올 줄은 몰랐네."

시스템이 그렇게 보낸걸 어떡하겠는가.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선두는 저희 일행에게 주시죠."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그리 해 줘야지. 하지만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저의, 상당히 강해졌거든요. 아마 상상 이상의 장면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출발 예정 시간을 들은 뒤 우리는 성주가 제공한 방에서 잠시 쉰 후 과거 우리와 정찰을 했었던 기사들에게 초대되었다.

"아하하! 오랜만입니다!"

"이거 그 작았던 아이가 벌써 이리 컸나?"

"휘유. 2년 새 더 강해진 느낌이야. 그때도 쉽지 않아 보였지만, 지금은 엄두도 안 나는군."

기사단장 길라함을 비롯해 레보, 코리, 리타프, 툴라와 신입이라는 기사 둘까지. 오랜만에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정작 초대한 이들은 우리와 정찰을 같이 했던 기사들이지만, 베태랑 병사들을 비롯해 모든 기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불덩이 쏘는 아가씨가 안 보이는군?"

"아, 일이 있어서 이번에 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 아이가 왔죠."

"안녕하세요."

"…어린아이 아닌가. 나서윤이라고 했던가?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니더니 이제는 남자까지… 자네도 어지간하군."

"…전 이제 18살인데요? 아저씨?"

"하하, 2년 전 이야기지.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그래 보여도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아마 신입 기사분들보다도 셀걸요?"

"푸하하! 어이! 신입들! 너희 어지간히 얕보이는데?"

새로 입단했다는 기사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기사들이 우리를 대하는 가벼운 태도나 농담들이 이어짐에 따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강했었는데, 어린 애보다도 약하다는 말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정색하는 얼굴이 된 것.

어디까지나 가벼운 기 싸움. 결국 하유진과 신입 기사의 친선 대련이 술자리에서 벌어졌고, 하유진은 어렵지 않게 둘을 제압했다.

직업이 도적인 하유진이 기사를 정면 대결로 제압한다.

신체 스펙 차이가 압도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거이거, 역시 영웅의 동료라고 해야 하나? 어리다고 얕보다간 큰일 나겠군. 하유진이라고 했던가? 기사가 될 생각 없냐?"

"전 형이랑 같이 다닐 거예요. 어차피, 형이 없었다면 저를 발견하지도 못하실걸요?"

"그래. 그런 것 같다. 역시 그쪽 계통인가?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자꾸 고개가 돌아가기는 해."

신입 기사라는 놈들이 사술이니 뭐니 떠들어 댔지만, 그것도 실력이라는 길라함의 단호한 말과 뒤지고 나서 그딴 소리 할 거냐는 리타프의 말에 둘의 입은 조용히 다물어졌다.

막내였던 리타프가 신입들에게 훈계하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잘 하고 있는 듯했다. 유쾌한 성격인데도 할 때는 하는 모습을 보인다. 괜히 기사가 아니었다.

가벼운 대련으로 인해 분위기가 흐트러지기는커녕 되려 더 고조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부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때때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하유진의 실력이 저 정도인데, 나머지의 실력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물론, 그런 의문으로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즐기는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이 되어 나는 요한이 갇혀 있다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재밌는 것은 이 감옥은 과거 내가 갇혔던 곳이라는 것.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유신후 님."

"아닙니다. 집사님.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용케 지금까지 살아 있군요?"

"…유신후 님이 떠나고 나신 후 배웅하는 와중에 둘이 탈옥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유신후 님을 배신했던…."

"아, 김인실과 박남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 몸으로는 제대로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텐데…."

"탈옥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까지 풀어 샅샅이 뒤졌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갔으니 못 찾을 수밖에.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보는 찾으셨습니까?"

"찾았습니다. 오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요한이 결국 사실을 내뱉었죠. 가보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재물을 축적했더군요. 몰래 연계했던 귀족 가문도 찾았고요."

용병 고용 비용이나 병사 육성, 장비 마련 비용 등을 어떻게 충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한의 재물과 연계했던 귀족 가문을 통해 마련한 듯했다.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었겠지. 요한과 연계한 귀족 가문과 협상을 한 듯했다. 과정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하지만 그것 말고는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쪽 가문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요한은 살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만 살아 있다면 훗날 저주의 계약서를 이용해서 진실 규명이 가능하니까요."

당장은 저주의 계약서가 없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런 용도라면 살려둘 만했다.

그나저나 그쪽 귀족 가문도 어지간하다. 그걸 들키냐.

"뭐, 어디까지나 목숨이 붙어 있고 말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기에 멀쩡하지는 않지만요."

곧이어 노집사는 요한이 갇힌 독방을 열었다.

한때 내가 갇혔던 장소.

문이 열리고 요한의 모습이 보인다. 요한은 여전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 많은 식량이 제공되는 것은 아닌지, 제법 야윈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개처럼 목줄이 걸린 채 벽에 반쯤 고정되어 있었다.

다리는 한쪽이 발목 아래로 없어진 상태였고 다른 한쪽도 아킬레스 건이 끊어진 상태였다.

팔은 외팔이었는데, 붙어있는 팔에는 손가락이 세 개나 없었고 피부 이곳저곳에는 화상 흔적과 흉터가 가득했다. 고문의 흔적으로 보였다.

요한은 독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내 모습을 바라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열린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이 성치 않았다. 몇 개가 뽑히거나 부러진 모양이다.

무척이나 추레한 몰골이었다.

"오랜만이네."

"개, 개새기 이, 여겨운 새기가….'

발음이 샌다.

"역겨운 것은 너고. 좋은 모습이네."

나는 그런 요한의 꼴을 보며 만족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을 느꼈다. 저열하다는 것은 안다. 싫기는 했지만 2회차에서는 그냥 서로 소 닭 보듯 헤어지려고 했었던 대상이었다. 하지만 튜토리얼 후반부에서 나를 귀찮게 한 덕분에 이런 꼴이 되었다.

먼저 이쪽을 노린 것은 저놈이니, 자업자득이지만.

"왜, 왜 온 거냐…."

나는 노집사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노집사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간수들마저 감옥 주변에서 물러나게 해 주었다.

"궁금하게 있어서."

별거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 조금 있었고 동시에 기회가 있는데 그냥 넘기기도 그렇다. 그렇기에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하, 하하. 내가 대답해 줄 것…."

나는 요한의 새끼 발가락 끝을 지그이 밟아주었다.

"끄, 끄으윽…!"

"별거 아니니까, 우리 서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빨리빨리 대답 좀 해주자. 네 얼굴 보기 짜증 나거든."

"으… 으흐… 으흐… 내가, 제대로 대답할 거라고…."

"네가 내 파티원들을 설득하겠답시고 찾아온 그 날 있잖아."

나는 몸을 낮춰 요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주하연과 남은주, 둘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요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상당히 섬뜩해 보였다.

***

다음 날이 되었고, 예정대로 우리는 출정식을 가졌다.

영주는 예의 그 차가운 말투로 짧은 연설을 마쳤고, 덕분에 출정식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번 토벌은 성의 미래가 걸린 만큼 영주가 직접 친정을 시도했다.

어차피 길라함이 실무적인 일은 다 하는,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영주가 최고 우두머리이기는 했다.

나는 가장 최신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지도를 살피며 고블린들의 부락 위치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놀과는 다르게 이들의 부락은 천적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이동하는 경우가 적어서 큰 변화는 없을 줄 알았지만, 이전 우리의 습격 이후로 제법 배치가 바뀐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지도를 한 번 본 후 곧바로 주하연에게 건네버렸다. 나는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건 초기 단계부터 유효한 말이었다.

"대 부족을 중심으로 상당히 밀집되어 있네."

"네, 언니. 아무래도 예전 일이 영향을 크게 준 것 같아요."

"어떤 의미로는 편한 것 같은데. 그냥 쳐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이러면 수가 적은 우리가 불리한 거 같아."

주하연이 나서윤, 남은주, 하유진을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유진은 말없이 이야기를 듣는 수준이었지만.

남은주.

나는 남은주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신후 오빠?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니. 딱히 없어."

"은주 언니. 근데 어차피 우리가 그냥 싸워도 이길 거 같은데, 불리할 게 있을까요?"

"싸우기 전에는 모르지만… 신후 오빠는 이번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내가 끼어들지 않는 전투. 그런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규모가 큰 전투에서 거의 참견 없이 알아서 하라는 경우는 없었다. 진형이나 공격, 후퇴 타이밍조차 전혀 조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요한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주하연이라고 했던가? 그쪽은 신중하긴 했어. 상황을 보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 큭큭. 그래도 나를 부정적으로는 보고 있더군. 도저히 못 믿는 듯한 느낌이었어. 하지만 남은주라고 했던가? 그년은 달랐지. 크하하. 정말 귀여웠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더군.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대놓고 벌려줄 것 같았다는 말 말이야! 그년이 바로 그런 과였지! 뭐 옆에 년이 잘 컨트롤 하기는 했지만… 글쎄? 저주의 계약서가 없었다면, 네가 조금만 늦게 상황을 뒤집었다면 그년은 내 편에 붙었을지도 몰랐는데 말이야. 아쉬워. 그랬으면 우리 처지가 달라졌을…."

이빨 상태와 내가 추가적으로 가한 몇몇 고문들 때문에 말이 새서 알아듣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대강 저런 이야기였다.

물론 요한이 순순히 대답하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력 회로를 지지면서 양물을 잘라버리려고 하자 결국 떠듬거리며 내 질문에 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혹여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배신할 뻔 했다라….'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이었나?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였나 싶었다. 물론 요한의 주관이 섞인 말이기는 했다.

말 그대로 김인실과 박남영 꼴이 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물론,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저런 일이 있었다면 속으로 걸릴만 하기는 했겠지.

힘을 얻은 이후로 자신감을 얻은 것도 강해졌다는 것 말고도 내게 인정을 받았다는 면도 없지는 않을 터였다.

당시 내 수준을 생각해보면 저들의 대화를 들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 요한을 엿먹이기 위해 작업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떠듬떠듬 들리는 수준이더라도 대화의 문맥 파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배신한 것은 아니고, 주하연이 컨트롤 했으니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뭐, 당시에 지금 만큼 저들과 친밀했던 것은 아니기도 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주하연처럼 중립적인 반응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확실히 요한을 견제하는 모습이기도 했고.

게다가 이미 어찌하기에는 내가 남은주에게 준 것이 너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이미 사실을 알아버렸고.

얼마 전 들었던 남은주의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 떠오른다. 동시에 은혜를 잊지 않겠다던, 남은주의 맹세와 자신이 나를 배신할 정도로 나쁜 년이 아니라는 말 또한, 이어서 떠올랐다.

'조금쯤, 안전장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

고블린의 숲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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