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내가 돌아온 이후, 한동안 나서윤은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주하연과 밤을 보내거나 조금 가깝게 지내다 보면 종종 불퉁한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그리고 갈수록 그런 기색은 심해져 가는 편이었다.
그나마 일행들이라면 괜찮은 편이지만, 그 외의 타인, 특히 여성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내게 거슬릴 만한 짓은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런 기색이 느껴질 뿐. 아마 나서윤은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쪽으로는 재능이 출중한 주제에 이쪽은 조금 부족한 것 같으니까.
그래도 영민한 것은 사실이라, 후폭풍이 있을 만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역으로 영민하기에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야 회귀자니 이쪽 영지가 내게 중요한 영지라는 자각이 있지만, 나서윤은 아니니까. 이쪽이 갑이고, 내가 과거 앨리자뱃을 거절한 전적이 있는 만큼 제법 함부로 대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그러지는 않겠다만… 혹시 모르기도 하고, 은근히 멸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골치군.'
나서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자매인 나연과 일행이 있는 상황에서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것은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심리적인 마지노선이라는 것이 있었고, 길드 장이 될 입장에서 이런 쪽은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험, 험한 꼴…."
내 말을 어떻게 알아먹은 건지, 앨리자뱃의 표정이 묘하게 붉어진다. 하지만 아무래도 토펜이 단단하게 주의를 준 듯, 물러서지는 않았다.
"괜,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약소 귀족, 아니 사실상 거의 모든 귀족의, 그것도 영애의 운명은 보통 이런 편이다. 사실, 후계자가 아닌 이상 남자도 데릴사위라는 명목으로 팔려갈 수 있는 만큼 영애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후계자도 팔리지만 않다 뿐이지 정략적인 결혼은 잦은 편이었다. 그것을 생각해도 이 앨리자뱃 영애의 상황은 상당히 비참한 편이었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애. …이런 늦었군."
"오빠!"
급하게 달려온듯, 나서윤의 호흡이 미약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어디선가 앨리자뱃이 내 방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우연히 봤겠지. …솔직히 감시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확히는 내 방 근처를 감시했겠지.
나서윤은 나와 앨리자뱃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통 방해하지 않지만 앨리자뱃은 우리 일행도 아니고 내가 거절한 전적이 있는 만큼 지금은 끼어들어도 별 탈이 없다는 계산이 선 거겠지.
"…그래."
"벌써 자려고요?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조금 필사적인 말. 어딘가 허술한 핑계지만 이건 나한테도 좋은 거절 명분이니까.
"중요한 일이야?"
"네, 네!"
"그래. 알겠다. 영애, 죄송하지만 다음에 다시 이야기했으면 하는군요. 아무래도 저희가 얼마 뒤에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알겠습니다. 신후 님. 그럼, 다음에 다시…."
그럴 일은 없겠다만.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내 말에 고개를 숙인 앨리자뱃이 물러간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서윤의 눈빛은 무척이나 서늘했다.
앨리자뱃이 나간 방에 침묵이 찾아왔다.
나서윤은 어딘가 안절부절한 모습이었고 나는 그런 나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내 눈빛을 참지 못한 나서윤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오빠, 방해, 였어요?"
"아니, 괜찮아. 음… 굳이 말하자면 잘했다고 해 주마. 하지만, 함부로 그러지 마라."
함부로 이러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 계산은 잘하는 편이니까. 아마 눈치만 보고 낄 때 안 낄 때 파악은 잘할 거다. 지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렇기에 한 마디 경고만 하고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래. 이거 때문에 온 거야?"
"……."
하기야 그것 말고는 없겠지.
"그럼 나가봐. 퀘스트까지 며칠 남긴 했지만, 아무래도 상황상 일찍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니…."
"오빠."
나서윤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나는 안 돼요?"
"……."
나서윤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피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 되는 건 아냐. 하지만 당장은 안 돼."
"…내가 미성년자라서?"
"어."
"하지만… 하지만! 여기는…."
"나는 지구로 돌아갈 거다."
나는 나서윤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눌러살 생각 없어. 최소한의 법은 지키겠지만, 그렇다고 여기 생활에 맞출 생각은 없다. 나는 지구인이고, 지구로 돌아갈 거다. 그러니 그쪽 법을 따르고 싶네."
궤변이다. 지구의 법을 따르기는 개뿔. 그러면 살인은 왜 했나?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지만, 별수 없었다. 탑에서, 수련자들의 평판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 살인 경험이냐 미성년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파티에는 나서윤의 친남매가 있고, 그녀는 무척이나 도덕적이시라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언니한테 말 안 할게요. 오빠만 허락해 주면, 우리 둘만의 비밀로…."
"글쎄. 과연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안 된다고 본다. 사내 연애만 봐도 그렇다. 직장에서만 만나는데도 어지간하면 들키는 편인데, 그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는 와중에 안 걸린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아무래도 7개월간 헤어졌던 경험과 앨리자뱃의 방문, 토펜이 수를 쓰는 상황 등이 겹치니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았다.
내 거절에 나서윤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ㄷ.
"2, 2년. 2년을 어떻게 기다려…."
2년 그러고 보면 벌써 탑 입장 시점을 기준으로 2년이 지났다. 16살이던 나서윤도, 어느새 18살이 된 것.
생각보다 이런 쪽에 집착이 심했다. 의부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대로 방치하면 진짜 그리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했고, 그러는 사이에도 나서윤의 고개는 점점 더 땅에 가까워져만 갔다.
"서윤아."
나는 고민했고,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마이너스라는 판단을 내렸다.
'어디 보자, 이런 상황에 쓸 만한 흔한 말이….'
"…네."
"역시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힘들어."
"…네."
"하지만 나도 네가 꼭 싫다거나 하지는 않아."
미래에 랭커보다 강해질 인재다. 싫을 수가 없었다.
"……."
그러면 왜 안되느냐고. 나이가 뭔 상관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
그런 시선을 담담히 받아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심리적으로 힘들어."
"……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네가 스무 살이 되고, 그때도 지금 마음이 변치 않으면…."
꿀꺽.
나서윤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차올랐다.
"그때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네가 싫지는 않거든."
절대 싫을 수가 없지.
"…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자. 응?"
참으라는 말에 나서윤이 또다시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알겠어요 오빠… 힘들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런 걸 어떻게 그래. 오히려 내가 미안한걸."
나는 나서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고 그제서야 나서윤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럼, 오늘은 돌아가렴. 말했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돼버려서 조금 일찍 성을 떠나야만 할 것 같다."
"…네. 맞아요. 그게 좋겠어요."
나서윤은 내 말게 격하게 동의했다.
"그럼 내일 보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일 말하면 되니까."
"네 오빠. 그럼 밤에 실례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 자고."
"네!"
나서윤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다음 날이 되어 나는 일행에게 퀘스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좋지 않으니 미리 떠나자는 말을 전했고, 일행은 동의했다.
나는 토펜을 찾아가 곧바로 떠나겠다는 말을 전했다.
토펜은 별다른 말 없이 허락했고, 가기 전에 용병 단이나 만들고 가라며 준비했다는 듯 내게 의뢰 확인서와 추천서 등을 건네왔다. 그의 행동에 나는 우리 동맹은 계속 굳건할 거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둘은 서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건드린 것도 아니고, 시도만 했던 것인 데다 내가 동맹은 굳건할 것이라며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토펜도, 그걸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서윤의 개입으로 무산된 거고, 나도 직접적으로 거절했다기보다는 나중으로 미루자는 표현을 해 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곧바로 떠나겠다고 하는 것에서 내 뜻을 대강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로 뭐라 하기는 힘든 입장이다.
조금 아쉬워는 하겠지만. 그리고 별로 포기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시 여기로 올 거라는 믿음 있는 듯했다. 나연도 두고 가는 데다, 막 얻은 양기희 파티도 남아 있으니까. 다음 기회도 있겠다 싶겠지.
나는 용병 단을 설립하고 일행과 양기희 파티원들을 용병 단에 등록시킨 뒤 나연과 양기희 파티에게 작별을 고했다. 양기희 파티에는 일이 있다는 말만 전했고 자세한 이야기는 삼갔다. 더 나중에 말할 셈. 나연에게는 입단속을 요구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우리는 성을 떠나 늪지로 향했다.
며칠 남지 않은 시간.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늪지를 돌아다니며 일행에게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리자드맨 사냥도 겸해 적더라도 경험치를 획득했고, 간만에 제대로 몸을 푼다는 듯, 일행은 힘든 와중에도 밝게 웃었다.
그리고 곧이어 히든 퀘스트 시작 시간이 다가왔다.
[멜리드 성의 스페레스가 과거의 약속을 근거로 당신을 부릅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Y/N]
나는 Y버튼을 눌렀고, 동행을 지정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나서윤, 주하연, 남은주, 하유진을 선택했다.
보너스는 날아갔지만, 이게 더 나은 선택이다. 어차피 튜토리얼에서의 히든 퀘스트. 그리 큰 보상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곧바로 일행들에게도 동행에 허락하겠냐는 메시지 창이 떴고, 일행은 하나같이 동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오랜만에 흰빛이 우리를 감싸들었고, 부유감과 함께 우리는 튜토리얼, 멜리드 성 주변으로 이동되었다.
****
"오랜만이네요."
익숙한 풍경. 처음 요한과 함께 소환되었던 장소다.
"요한이랑 여기로 소환되었었는데…."
요한. 그 이름에 나서윤은 불쾌한 표정을, 남은주는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고 하유진마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9살짜리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라니… 저쪽도 어지간했나 보다.
듣기로 하유진은 희미한 존재감과 은신 스킬을 바탕으로 중간부터는 거의 식량 저장고에서 버텼다던데….
뭐, 지난 일이지만.
"이번 의뢰에서 저는 거의 움직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상관없어요. 우리들만으로 충분한걸요?"
그럴거다.
2년. 1회차라면 아직 미궁에서 헤맬 때라 저 많은 고블린들을 상대하기 힘들겠지만, 이들은 이미 하층 수준을 넘어간 이들.
튜토리얼의 고블린은, 정말 흔한 게임의 튜토리얼 깨듯 깨버릴 수 있는 인재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퀘스트를 통해서 아마 많은 체감을 할 거다. 이들 수준이면 아마 내가 놀을 상대로 했던 퍼포먼스를 고블린을 상대로 재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혼자가 아닌 넷인데다 멜리드 성에서도 지원을 해 줄 테니까.
게다가 놀들의 영역만큼 여기 숲의 영역이 넓은 것도 아니라, 이들이 고블린들을 쥐 잡듯, 싸그리, 깨끗하게 청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달이 안 걸릴 거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능력치 작업이나 하면서 이들이 자신들의 달라진 힘을 마음껏 체감할 수 있도록 풀어줄 생각이다.
늪지라는, 짜증 나는 환경에서도 간만에 몸을 푼다고 했던 이들이다. 아마 여기는 과거의 약했던 기억도 있는 만큼 한층 더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달라진 자신도 확실히 느낄 테고, 동기 부여도 되겠지.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멜리드 성 입구를 향해 걸었다.
얼마 되지 않아 경비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 과거 요한의 보증 덕분에 우리를 성 내부로 들여 보내준 경비병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크롱이었나?
"어, 저 경비병… 그러니까… 크랑이었던가요?"
주하연의 말에 이름이 제대로 떠올랐다. 맞다. 크랑이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어… 어어!"
그런 우리를 발견한 건지, 경비병 크랑은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외쳤다.
"영, 영웅이 돌아왔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여기서 영웅 취급이었다.
그의 낯간지러운 외침에, 일행들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