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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23화 (123/317)

# 123

"신후 씨?"

한참을 고민하는 사이에 언제 일어났는지 주하연이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잤어요?"

"네. 신후 씨 덕분에 잘 잤어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요? 저 일어난 지 한참 됐는데."

"아하하."

"…역시 어제 제 말 때문인 거죠?"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화제를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었고, 어차피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연 씨는…."

내가 입을 열자 주하연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저도 돌아가고 싶죠. 부모님도 보고 싶고…. TV도, 스마트 폰도 만지고 싶네요. 드라마 다음 화도 궁금하고, 새로운 영화도 보고 싶어요. 기왕이면 신후 씨랑 같이요. 후후… 어째 생각나는 게 이런 거뿐이네요."

원래 그런 사소한 것이 가장 그리운 법이다. 이해는 간다.

나는, 이제, 그런 것은 별로 그립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오래 탑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군요. 저는… 가족이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쵸… 역시…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뇨. 아마, 제가 가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연 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간절할 겁니다."

"…저도…."

자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던 주하연은,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유치하게 내가 더 간절하냐 네가 더 간절하냐 하는 것을 겨룰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주하연보다는 내가 훨씬 간절하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사실, 내가 실제 지구의 가족과 그렇게까지 친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을 지탱하기 힘들어지는 순간, 생각난 것은 희미한 가족의 얼굴이었고, 그것만이 내 목적이 되고 말았다.

오직 가족에 대한 생각만으로 버텨온 시간이 너무도 길어져, 나는 가족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고작 그들이 죽었던 장소에서 죽겠다는 일념 하에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미쳐있었다.

본디 탑이라는 장소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게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몸으로 익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지구로의 귀환을 선택했을 정도니, 어떤 의미로 나는 정신병자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런 내 얼굴을 본 주하연은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군요. 신후 씨는…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탑을 오르는 거였어요."

"맞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족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래서 올라가는 겁니다."

"후후. 되게 가정적이네요. 하긴, 평소 보여주는 모습만 봐도…."

"…사실 저는 그렇게 가정적인 놈은 못 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곳에 떨어지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족의 얼굴이더군요. 솔직히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나는 자조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가족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탑을 오르고, 끝까지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멈추기 힘듭니다. 중층에서 본 현실은 지금처럼 조금 뒤처져도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담담한 말. 주하연의 눈이 흔들린다.

"그러니까, 저는 하연 씨가 말했던 것처럼, 천천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제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하연 씨는 어떻습니까?"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일부 꺼낸다. 이제껏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많지 않았다. 동시에 많은 정보를 제한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시점이 다가온다. 내가 가진 정보를 풀어도 될 때가 빠르게 다가올 것이고, 그리된다면 일행은 따라오기도 벅차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들에게 힘들더라도 따라오게 만들 수 있는, 동기를 심어 놓을 계획이었다.

만약에 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따라오게 만들어야 할 테지.

"…저도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주하연은 진지한 내 물음에 조금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저는 죽고 싶지는 않아요. 비참한 꼴을 겪고 싶지도 않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네요. 하지만…."

나는 묵묵히 주하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후 씨와 떨어지는 것은 더 싫어요. 조금, 속물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신후 씨 곁에 있으면 힘들더라도 안전하기도 하고… 또, 행복하니까요."

주하연은 조금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신후 씨가 올라간다면 저는 끝까지 따라갈게요. 이제, 약한 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약한 소리 하셔도 됩니다. 속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안전하고 싶다. 누구나 다 느끼는 감정이죠.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말요?"

"대신, 제 앞에서만, 우리 둘이 있을 때만 그러셨으면 합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제 앞에서만 약해지신다면, 그리고 다시 일어나실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제 욕심에 따라와 주신다는 이야기니까요."

"버려지고 싶지는 않아서요. 아니… 오히려 신후 씨라면 억지로 끌고 가셨으려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과거에는 몰랐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는 절대 하연 씨를 놓을 생각이 없었거든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에요. 다른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아마 신후 씨가 원한다면 어떻게든 따라와 줄 거에요.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좋아요. 다시 함께,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이게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제가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말 같기도 하지만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이렇게 키워 놓고는 힘들어하니 놔둔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갈 거고,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나는 가볍게 주하연을 끌어안았고, 잠시 뒤 침대를 벗어났다.

***

나는 한 명씩 일행들과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그들의 목표나 생각을 물었고, 동시에 어제 해 주었던 중층의 상황을 다시 주지시키면서 이제는 예전처럼 대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동시에 내 목표를 말하며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

"오빠 일이면 어떻게든 도울 거예요. …오히려, 제가 절대로 놔줄 생각 없으니까요. 이제 절대 저 놓고 가시면 안 돼요!"

나서윤은 내가 가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을 밝혔고.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신후 오빠. 상황이 그렇다면 더 강해져야겠네요. 최근 적이 너무 없어서…. 물론, 저는 힘들더라도 끝가지 신후 오빠를 따라갈 겁니다. 신후 오빠 곁이 가장 안전하니까요."

남은주 또한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를 끝까지 따라올 것이라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도 내 곁에 있을 거냐는 장난스러운 말에 남은주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은혜는 갚아야죠. 제 목숨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후 오빠를 배신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나쁜 년으로 보여요?"

최근 안전한 상황이 오래 유지되어 긴장이 풀어졌던 주하연과는 다르게 남은주는 되려 안전한 상황이 계속되자 불안정했던 마음을 제대로 다스려 되려 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주하연만 보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해질 지경. 자신감과 안정감이 남은주를 더욱 성장시킨 듯했다.

"형이 간다면 저도 가요. 형만이 저를 알아봐 줬어요."

하유진은 아이답지 않은 말로 나를 따르겠다 말했으며.

"…너는… 적어도 아군은 악착같이 챙기니까. 네 그늘을 넓히는 것을 도울 생각이야. 그게 힘든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나연은 내가 담담하게 속마음을 밝히자 자신 또한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며 어떻게든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마 이것 말고도 나서윤이라던가 안전이라던가 고대의 정령 같은 여러 요소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저 완고한 나연이 자기 신념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의미로 나를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필요하다면 채찍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말은 저렇게들 하지만 당장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아무리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과거와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다면 일행의 중심은 확실히 나라는 거였다. 아무리 7개월간 떨어져 있었다고 한들, 일행은 내가 없는 파티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일행은, 나를 중심으로 나만의 파티가 되어 있었다. 아마 다른 파티가 이런 기괴한 의존 관계를 갖고 있었다면 조소했을 거다.

아무리 강대해도, 저런 상태라면 중심만 무너뜨리면 손쉬운 상대가 되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파티가 필요했다.

내가 간다면, 설령 그곳이 거인에게 침공당한 지구라도 따라올 이들이 필요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파티.

그것이 어느새 완성되어 있었다.

일행들과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어느새 토펜과 약속했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

"자네와 하는 식사도 참 오랜만이군."

"그렇습니다."

"많이 달라진 것 같군. 문신이라… 그대가 그런 문신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인연이 닿았습니다. 덕분에 강해졌죠."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 그런 기술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네. 저는 마고그 족과 연이 닿았습니다."

문신을 새기는 부족이 마고그 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술적인 의미만이 아닌, 스킬화 시킬 정도의 문신을 가진 이들은 정말 적었다. 그중 마고그 족은 최고 수준이고.

"7개월이라… 어떤가. 용병 단원들은 만나 보았는가?"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다시 한번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일행들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토펜은 조금 굳은 표정이 되었다.

"다시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예.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1년은 안 걸릴 것 같기는 한데…."

내 말에 토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거이거, 복귀를 축하하기 위해 초대를 했더니 되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군. 기껏 앨리자뱃도 초대했는데 말이야."

토펜이 말하는 앨리자뱃. 그녀는 토펜이 나와 엮으려고 했던 자신의 딸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몸매도 확실히 서양인에 가까운 몸매다. 주하연이 말했던대로, 제법 아름다웠다.

보통 남자라면 거절하기도 힘들 미모. 하지만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아름다운 여자라면 1회차에서도 많이 봤다. 그런 것에 흔들리기에는 내 경험이 너무 많았다.

"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연이와 최근에 들어온 용병들을 영입했습니다. 그들도 제가 말한 이들 중 일부인데…."

"아 역시 그랬는가. 어쩐지 외모가 그대들과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지."

"덕분에 용병 단을 창설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조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보증을 서달라?"

"의뢰 확인서만 주신다고 하더라도 아마 용병 단 창설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B급 용병이 되었으니까요."

"…허허 용병 단원들이 될 이들을 만나고 온다고 하더니…."

"그들을 꾀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이번 영입 덕분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흐음… 최근 광산 이야기는 들었는가? 그대가 오면 본격적으로 개발을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곤란해."

"아. 그건 해결하고 갈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문신, 연이 닿아 얻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마 상상 이상의 장면을 보실 겁니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토펜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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