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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22화 (122/317)

# 122

주하연의 겁먹은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건 주하연 탓이 아니야.'

열 받은 가운데도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확실히, 100% 주하연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이 7개월 동안, 주하연은 위기 다운 위기는 한 번도 없었을 터였다. 상황을 보면, 회색 놀들이 쳐들어왔던 것 같지도 않았고, 쳐들어왔다고 해도 위기는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애초에 다 이야기를 했겠지.

그렇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은 없었다는 것. 기껏해야 스트레스 좀 받고 사람 상대하는 일들이 주 업무였을 테고, 꾸준히 수련을 하며 지난 시간을 보냈을 거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게 이제껏 해왔던, 목숨 걸고 전선에서 싸웠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사람을 상대하다 죽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영주만 해도, 아무리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 한들 주하연을 홀대하지 못한다. 가장 어려운 상대도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위기감이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7개월간, 서서히 마음의 긴장이 풀어졌겠지.

그래도 나는 이 정도까지 긴장감이 풀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름, 이들도, 탑을 나가 지구로 가고 싶다는 그런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사람은 제각각이고, 모두가 귀환을 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탑을 좋아하는 또라이 새끼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여기는 지구만큼 법이 강하지도 않고, 힘만 있으면 어지간한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곳이니까.

물론 내 일행들은 귀환을 원하기는 할 거다. 지구의 상황을 모르기는 하더라도 가족이 보고 싶기는 할 테니까.

일행들 중 가족이 없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단지, 나만큼 간절한 사람이 없었을 뿐.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죽더라도 지구에서 죽겠다고 망해버린 지구에 투신한 놈은 내가 유일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 기회조차 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지구를 버리는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즉, 오히려 내가 비정상이라는 이야기.

나를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일행에게 나만큼의 간절함을 원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실수다.

일행이 풀어질 기회를 준 것도 나고, 일행을 잘못 판단한 것도 나다.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화가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들이 이제껏 나를 잘 따라와 줬기에 그만큼 목표 의식이 확고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단순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나….'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상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살고 싶어하지, 죽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나는 한참을 열을 식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순간 주하연이, 일행들의 얼굴이 지구를 버렸던 수많은 상위권 수련자들과 겹쳐 보였다.

이들도 지구가 그 꼴인 것을 알면 버릴까. 1회차에서 이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면, 역시 지구를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 떠났을까.

'그만.'

생각이 선을 넘어 폭주하는 기색이 보이자 즉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랬다고 한들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상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지구를 버리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오히려 내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이상한 새끼인 거다.

가족들이 죽은 장소, 망한 세계에 자살하러 들어가겠다니. 그게 병신이다.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이들은 제 목숨이 가장 귀하고 제 삶이 가장 소중하다.

그런 이들이 망한 세상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내가 돌아온 이유가 뭔가?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다. 이런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가족 얼굴 하나 보겠다고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성장하고 팀을 성장시키고 길드를 키워 우리가 지구로 귀환해 거인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만 가진다면. 지구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도록.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이 지랄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이해하고 이끌어야만 하는 거였다.

"후…. 흐읍… 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이완시켰다.

공포에 질렸던 주하연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져 간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겁먹은 기색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라 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조금, 흥분했네요."

"…아뇨… 제가 너무…."

"아닙니다. 제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실 만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심이 부족했습니다. 자제를 제대로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연 씨."

나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화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자제를 하지 못한 것은 실수다. 일단 리더로 복귀했는데, 이렇게 감정적이어서는 안 됐다. 실수는 실수다.

솔직히 화를 내고 호통을 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중층 상황이 어떤지, 우리를 비롯해 이 티드린드 영지라는 곳 자체가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인지 설명하면서 위기감이 부족하다고 소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봐야 남는 게 없었다. 그런다고 화가 풀릴 것 같지도 않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했다.

내 사과에 주하연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그렇게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말실수를 한 것도 맞고… 힘들게 수련까지 해가며 오셨는데, 여기서 신후 씨가 해놓은 일을 관리한다는 사람이 마음이 풀어졌어요. 화나실 만 해요. 저도 죄송해요. 신후 씨."

"오늘은 더는 힘들겠네요. 분위기가 이 모양이라."

"그, 그렇네요…. 아, 아하하…."

주하연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보내면 내일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나는 주하연에게 물었다.

"그간 있었던 일이라도 알려주시겠어요? 제가 없는 동안 하연 씨와 일행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군요."

의도적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연기한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이들을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동기 부여를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냥, 신후 씨가 관리하던 것을 참고했어요. 자주 영주 님 찾아뵙고, 용병들 사기 관리차 가끔 무료로 술을 베풀거나 서윤이랑 은주랑 대련하는 장소에서 같이 훈련도 하고, 가끔 나연이나 유진이랑 같이 나가서 직접 놀들의 동태도 확인했었죠."

"잘하셨네요."

특히 직접 현장을 찾아갔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습격도 없어서 작은 규모지만 채굴도 하고 있어요. 일단 신후 씨 말대로, 저희 지분에 해당하는 광석들은 차용증을 받고 우선적으로 병사들 장비를 만드는 곳에 투입하고 있어요. 영주 님이 무척 감사하고 계셔요."

끄덕.

마정석이 발견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내가 회색 놀들을 쓸어버리고 대대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면 금세 발견될 테니까.

아마 튜토리얼을 다녀오면 이미 캐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하연이 더 편한 분위기에서 말을 할 수 있도록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되묻고 맞장구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내가 없었던 때의 일들은 어느새 업무에서 벗어나 사적인 이야기들로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토펜 영주 님도 너무하시다니까요? 앨리자뱃을 왜 우리에게 보내는데요? 식사에 초대하면 꼭 동석시키고, 티타임에 초대하고… 장수를 쏘기 위해 말부터 노리는 거야 뭐야."

"아하하. 아직도 포기 안 하신 겁니까? 영주 님도 어지간하시군요."

"신후 씨도 조심하세요. 영주 님이 상상 이상으로 끈질기시거든요. 게다가 앨리자뱃이 생각보다 예쁘기도…. 음… 신후 씨가 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을 하던 주하연이 어딘가 망설이면서도 어색한 얼굴로 말한다.

하기야 내가 원한다면 주하연이 막을 권리는 없으니까.

"예뻐도, 별로 생각은 없습니다. 뭐,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걸요."

나는 빙긋 웃으며 주하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곁에 있는데, 그쪽으로 눈을 돌릴 새가 어디 있나요."

조금 느끼한 말. 입과 뇌가 따로 논다. 짜증 났지만, 괜찮은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 오셨데?"

주하연은 질겁하면서도 나쁜 기분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하연의 뺨을 감싸며 얼굴을 당겼다.

주하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고,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냥 지나가려고 했던 밤. 하지만 묘하게 타이밍이 맞았고, 우리는 그렇게 일곱 달 만에 같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

"으음…."

눈을 뜬 채로 옆을 바라보자 아직 잠들어있는 주하연의 얼굴이 보인다.

생각이 많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솔직히, 오늘 있을 일들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하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이라 결국 중간부터는 집중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어색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다.

결국 다시금 우호적인 분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역시 중층에 가보니 우리는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사실이기는 하지만 결국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다시 위기를 불러일으켜 동기를 부여하면 당장은 해결이 되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우리가 더 강해지면 같은 상황의 반복이 될 뿐이다.

차라리 시간이 지나 중층에 진출할 때까지 방치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타국가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지구의 상황을 알게 될 테니 자연스레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다.

힘든 상황을 지나 편한 구간에 안주하게 된다면 다시 움직이가 쉽지 않았다.

튜토리얼, 하층에서부터 사실을 알고 절박했던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다시 피치를 끌어올리는 기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랭커가 될 놈들은 쭉쭉 성장할 테니까. 내가 7개월만에 괴물 같은 성장을 해냈던 것처럼, 랭커가 될 놈들도 짧은 시간만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할 터였다.

아무리 내가 회귀자라고는 해도 애들 돌보면서 랭커가 될 이들과 겨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손을 뒤통수에 넣어 깍지를 꼈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오랜 고민. 고민은 길었지만, 선택은 빨랐다.

'키워줄 만큼 키워 줬다.'

이제는 스스로 단련을 통해 성장할 차례다.

하유진은 받은 것이 거의 없지만 당장은 줄 게 없었다. 중층에 간다면 기회를 주긴 하겠지만 아마 다른 일행들처럼 떠먹여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차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설마 긴장이 풀어질 줄은 몰랐다.

주하연 말고도 다른 일행들이 얼마나 풀어졌는지 확인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일행들의 생각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테지. 그들이 탑을 오르는 이유라던가 목표, 그게 어느 정도의 동기 부여가 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난다면….

'이제, 채찍도 휘둘러야 한다는 이야기지.'

이제껏 되도록이면 엄하더라도 최대한 부드럽고 선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타인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아군에게는 최대한 예의 바르고 상냥한 이미지를 쌓아 왔었다. 물론 사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상태를 유지할 거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다르겠지.

집단의, 길드의 리더가 될 때가 다가온 지금, 이전과 같은 태도로 일행을 대하기는 어려웠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행을 키워줄 필요가 있었고 상당히 퍼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키워줄 만큼 키워줬다는 확신이 든다. 더는, 이전과 같이 일행들을 대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솔직히, 이제껏 이렇게 일행들을 대놓고 키워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조심스러운 면이 많았지만….

'그것도 끝이군.'

중층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제부터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상황이 변하기 시작할 거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 미궁으로 돌아가 수련을 마무리 짓고는 길드를 창설해야 한다. 중층에 진출하고, 자리를 잡고, 타국에서 쏟아져 나올 수련자들을 흡수하거나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알짜배기들을 흡수한 다음….

'상층.'

내가 죽었던 장소.

그곳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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