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17화 (117/317)

# 117

나타난 전직 가능한 클래스 목록들. 맨 위의 두 개는 현재 나와 계약한 열세 번째 꽃의 직업이다.

나머지는 여전히 나를 노리는 타 차원의 관리자들이 하는 유혹이고.

'대부분 첫 번째 선택지에서 봤던 놈들인데….'

물론 아닌 놈들도 있었다.

이들이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신중한 녀석들이 있겠지. 튜토리얼이라는 1차 거름망을 통과한 놈들보다는 하층까지 통과한, 확실한 놈을 얻고 싶은 녀석들도 있었을 거다. 그 외에도 1회차와 다르게 간섭력이 더 많은 만큼 지금 받은 놈들 말고도 더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널렸을 거다. 여유가 있다면 일부러 간섭력을 좀 넉넉하게 남겨 놓았겠지.

그래도 아마 내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다른 놈들에게 쓸 예정일 것을 내 쪽으로 돌려서라도 밀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만.

열세 번째 꽃만 해도 가이아와의 계약이 있으니 받아들인 거다.

그래도 역시 관리자들의 용사 욕심은 알아줘야 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놈들이 이리 많다니…

약하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주제에.

'남 말할 처지는 아닌가….'

생각해보니 나도 재능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후 집단을 만들 때는 많이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목표를 우선으로 생각해 움직였던 만큼 능력 위주로 선발했던 것은 저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내가 키워줄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최종 목표인 거인과의 전투를 상정했을 때, 질 대신 양으로 밀어붙였다가는 승산이 낮았기 때문에 나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구의 상황이 엉망이라는 뜻.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한들 내가 선인도 아닌데 도움도 안 되는 이들을 잔뜩 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렇게 직업 선택 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자, 조금 불안해진 것인지 열세 번째 꽃이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열세 번째 꽃이 왜 선택하지 않느냐고 불안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안흔들려 걱정 마라."

괜한 걱정을 하는 듯해 적당히 안심시켜 주었다.

[열세 번째 꽃이 선물도 준비되어 있다고 당신을 꼬십니다.]

'선물?'

솔직히 기대도 안 된다. 직업만 봐도 대충 관리자의 힘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름만 그럴듯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일단 시스템에 표시되는 이상 완전히 허위로는 작성하기 힘들다. 그 직업을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메리트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까? 예를 들어 사신의 추종자. 무려 신(神)자가 붙는 직업이다. 추종자가 조금 격이 떨어지긴 하더라도 그 하위 기술들을 얻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 태양의 전사라던가, 대놓고 아이템을 암시하는 폭풍검의 주인 같은 경우만 봐도 아름다운 검사보다는 훨씬 끌리는 것이 사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어쩌겠나. 내 고향의 관리자가 가이아인데.'

고향이 약한 게 죄다. …쳐들어온 놈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닌 게 문제긴 했지만.

나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아름다운 검사를 선택했다.

[직업 아름다운 검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전직하시겠습니까? Y/N]

나는 곧바로 Y 버튼을 눌렀고, 직업 정원의 수호자가 아름다운 검사로 변경되었다.

[직업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곧이어 튀어나오는 내가 배울 수 있는 스킬 목록을 치워버렸다.

제단에서 배울 수 있는 스킬들은 한정되어 있고, 쓸모 있는 조합법도 그다지 많지 않다. 실험할 기회가 부족했기에 1회차에서 아무리 기간이 있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열세 번째 꽃이 잠시 기다리라고 외칩니다.]

"응?"

갑자기 날아오는 간접 메시지. 전직이 끝났으니 다시 플로어마스터들이 하지 말라고 경고할 텐데?

어찌 된 것이 말리지 않는다. 진짜로 뭔가 있나?

[열세 번째 꽃이 선물은 받고 가라고 외칩니다.]

"그거 진짜였나?"

[열세 번째 꽃이 자기를 뭐로 보는 거냐며 길길이 날뜁니다.]

"그래봐야 뭘 줄 수 있다고… 어차피 간섭력 거의 없잖아?"

애초에 격이 다르다. 딱 봐도 1회차에서 제대로 된 용사를 영입하지 못했을 터. 닉네임이나 제시하는 직업명만 봐도 수많은 차원 관리자 중에서도 상당히 하위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열세 번째 꽃이 당신에게 피해는 되지 않으면서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거라고 외칩니다.]

"…뭔데?"

보고 판단하면 될 일.

[열세 번째 꽃이 스킬 목록을 보라고 말합니다.]

나는 닫았던 스킬 목록을 불러왔다.

그러자 한 스킬의 빛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혹의 검술?"

등급은 레어.

나는 레어 등급의 웨폰 마스터리가 있었기에 별로 갖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반등급이었지만, 지금은 레어로 성장한 무기 관련 숙련도 스킬.

매혹의 검술은 이름은 둘째 치고, 효과가 뻔해 보인다.

"이게 선물이라고?"

[열세 번째 꽃이 꼭 배우라고 간절하게 말합니다.]

"스킬 슬롯이 아깝다만?"

[열세 번째 꽃이 슬롯은 소모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스킬을 배우는데 슬롯을 소모 안 해? 고유 스킬 말고는 그런 게 없는데?'

애초에 상점에서 배우는 것이 고유 스킬이 될 리가 없었다. 스킬 합성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아. 합성인가.'

자동으로 합성되도록 모종의 조취를 취해 놓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한다.

하지만 웨폰 마스터리가 더 범용성이다. 포함될 뿐일 텐데….

[열세 번째 꽃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힘 좀 써서 종속시킬 거라며 사실을 밝힙니다.]

"종속?"

종속. 열세 번째 꽃의 설명에 의하면 스킬 하위 카테고리로 포함시키는 방법이라고 한다. 듣도보도 못했던 방법이다. 애초에 웨폰 마스터리는 무기 하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포기하고 다양한 무기에 대한 넓은 범용성과 보정을 얻는 스킬이다. 그런 스킬에 포기한 깊이를 더해주겠다고? 그게 되나?

물론 검술인 만큼 검에 한정되긴 하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열세 번째 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대신 앞으로 한동안 지원이 어렵다며 우물쭈물거립니다.]

지원? 기대도 안 했다. 로또 맞은 기분이다. 이게 이렇게 잘 풀리나?

"상관없어. 이거면 충분하다. 그게 정말 된다고?"

[열세 번째 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대신 앞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되서 간접 메시지 보내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안보내면 나야 편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되려 반기는 반응이자 섭섭하다며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알 바 아니었다.

반응을 무시하고 스킬을 선택하자 미리 힘을 썼다는 것이 사실인지 슬롯을 소비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웨폰 마스터리 스킬이 변했다.

[웨폰 마스터리(슈퍼 레어)]

-모든 근접 무기에 보정 효과

-검술에 한해 강한 보정 효과

-검에 한해 공격 시 일정 확률로 매혹 효과

본래 일반 스킬이었던 웨폰 마스터리가 숙련도 덕분에 레어로 상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합성, 아니 종속이라고 했던가? 그것 덕분에 등급이 상승하고 추가로 휴과도 두 줄이나 늘어났다.

…처음으로 제대로 관리자의 지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좋은 도움이었다.

"…고맙다."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주력 무기는 검을 써야 할 듯했다. 그래도 상황에 맞춰 타 무기를 쓰기는 하겠지만.

당장에야 무기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검을 주로 쓰는 편이었다. 열세 번째 꽃은 내가 검만 계속 써대니 배려해준 것 같기는 하지만.

스킬을 익히고 전직을 마치고는 남은 시간을 확인하자, 대략 3달이 조금 안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갈 시간을 고려하면 대략 2달 좀 넘게 남은 셈. 마음 같아서는 전설 등급 장비를 하나라도 갖고 싶었지만….

'현재 수준으로는 불가능.'

지금 상당히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설 등급 장비를 얻기에는 능력이 모자라다. 장비는 스킬과 다르게 슬롯만이 아니라 자격도 필요한 만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다.

'이카로스의 꿈.'

전설 등급의 부츠다. 이쪽으로 가면 스킬도 얻을 수 있었고. 중국 쪽에서 건너온 이들이 그리 말하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가능하게 해주는 스킬이랄까? 하지만 이것 말고도 욕심나는 스킬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이쪽은 전설급 스킬인 환경 동화.

모든 상태 이상에 대한 내성을 올려주는 스킬이다. 물론 육체에 한하긴 하지만 그 범위가 어마어마해서 키워 두면 엄청나게 쓸모가 많다. 일단 내성 스킬은 슬롯에 여유만 있다면 하나 정도 갖고 있는 것이 좋았다.

물론 슬롯은 많아도 부족한 것이 수련자다.

덕분에 내성 붙은 장비는 정말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쌌다.

본래 3개월간 했던 사냥을 하늘 걸음을 얻는 것과 병행해서 했더라면 둘 다 얻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곳에서 사냥과 장비 파밍을 동시에 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효율이 좋지 못했다.

그건 바리치의 문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 있는 몬스터는 하피, 즉 비행 몬스터였다.

허공답보를 가능케 하는 스킬? 있더라도 나는 1회차에서 그런 것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적응해야 하는 셈. 게다가 스킬 숙련도도 엉망이라 처음부터 몇 걸음이나 걸을 수 있을지 몰랐다.

너무 불확실한 점이 많은 셈. 거기로 갔다면 50도 채 못 찍을 가능성이 높았다.

효율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 보니 둘 다 욕심이 나지만 하나만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

대신 레벨 59라는, 말이 안 되는 속도의 레벨 업을 해냈으니 후회는 없지만.

나는 하루를 쉬며 어찌 해야 할지 고민했고 결국 다음 날 선택한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끼아아악!"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협곡 지형. 이곳은 하피들이 지내는 장소였다. 대부분 협곡의 꼭대기에는 하피들의 둥지가 있다고 보면 된다.

하피들은 잡식성이라 어지간한 몬스터는 다 먹이로 보기에 대비 없이 함부로 들어왔다간 죽기 딱 좋은 장소였다.

비행 몬스터는 대비를 하지 않고 왔다간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나야 바닥에서 비행 몬스터를 상대해 본 적이 제법 있어 괜찮다는 판단에 그냥 왔지만.

나는 결국 전설 등급 장비와 하늘 걸음이라는, 허공답보를 가능케 하는 스킬을 선택했다.

애초에 거인을 상대하려면 하나쯤 있어야 하는 스킬이기도 했다.

신장 차이가 워낙 크게 나니까.

성녀의 방해 없이 그쪽 스킬들을 모두 계승했다면 이것 대신 어머니의 가호라는, 마고그 족 특유의 발목에 새기는 문신을 얻어서 밀림 저항을 얻었겠지만… 그것은 남은주에게 가버렸다.

성기사의 스킬 중에도 밀림 저항이 존재하는 스킬이 있어서 두 개를 연계하면 거인과도 대지에 서서 당당히 맞설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렇기에 이쪽을 선택했다.

게다가 이쪽으로 온다면 사냥도 가능하다.

기왕이면 60을 찍고 돌아가고 싶었다.

"끼아아아악!"

어느새 나를 발견한 하피가 기쁨에 찬 괴성을 질렀다.

내 머리 위, 저 높은 곳에서 두어 바퀴 돌며 나를 내려다본다.

빈틈을 노리는 것.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하피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높이 바라보자 하피의 모습이 대강 보인다.

높아진 신체 능력과 마력의 강화가 더해진 덕분.

하피는 인간 여성의 상체에 새의 하반신을 가진 몬스터였다. 물론 하늘을 날기 위해 팔 자체는 날개지만. 제법 영리한 몬스터지만 아쉽게도 말은 통하지 않는 상대다.

얼굴은 일그러진 형상이라 뭣도 모르고 마주친다면 기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모습이다.

하지만 매혹의 눈동자라는 것이 있어서 매혹이 걸리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끼아아아악!"

그사이 하피는 내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냥 곧바로 공습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그런 하피를 똑바로 바라보며 검에 검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쪽이 선공할 수는 없다. 비행 몬스터를 상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나 마법사를 보호하며 돌격해 오는 적을 상대로 반격하는 방법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냥 상대로 하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

거리가 가까워오자 하피는 마치 사냥하는 독수리처럼 발톱을 세워 내 어깨를 노린다.

10m, 5m, 3m!

나는 거리가 된다고 판단하는 즉시 몸을 옆으로 틀며 내가 있던 장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걱!

검의 궤적을 따라 그사이에 걸린 하피의 몸이 갈라진다.

쿵! 드드드-

베어진 하피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내고는 사방으로 굴러가며 내장을 흩뿌렸다.

"…응?"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피의 시선이 이상했다.

내 검을 따라 고개가 돌아간다.

매혹.

매혹의 눈동자를 가진 하피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이 스킬… 생각보다 쓸모가 있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