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스킬의 영향이 보통이 아니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다.
1회차에서 이 던전을 깬 놈은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정신 방어를 해주는 것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하기야 여유가 된다면 그런 장비 하나 맞추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그래도, 힘들지만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스킬 없이 온 이유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었고, 일단 스킬을 덮어쓰지 않은 상태라 육체 정화 스킬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정 버티기 힘들면 육체 정화를 통해서 한 번 걸러야 한다.
나는 내가 아군인 전사를 베어내기 전에 선수 쳐 뱀파이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뱀파이어는 맞서 괴성을 질러왔다.
"키야아아악!"
듣기 싫은, 째지는 음성.
내 눈에 보이는 뱀파이어는 말 그대로 인간과 괴물의 경계선에 선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인간의 몸 형태에 이목구비가 존재했지만, 눈은 핏빛으로 점칠 되어 있었고 이빨은 송곳니가 눈에 띄에 자란 모습에 피부는 핏줄이 보일 만큼 창백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도저히 인간이 짓기 힘들 만큼 일그러진 표정이라 혐오감을 자극했다.
이건 바리치의 문신 때문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로 저딴 형태인 것.
극도로 혐오감을 일으킨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앨거차의 문신 효과로 증가된 신체 능력. 문신이 없었던 이전의 신체 능력으로는 셋을 상대하는 것이 한계였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열이 넘는 뱀파이어도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다. 신체 능력치는 높을수록 1의 차이가 심각하게 벌어지니까.
뱀파이어가 마주 괴성을 지르는 사이에 나는 한층 더 빠른 속도로 가속했다.
그리고 더럽게 벌려져 돌출된 송곳니를 보이는 주둥이에 검을 그대로 쑤셔 박았다.
"키엑!"
그리고 검을 뒤틀며 아래로 내려긋는다.
더, 더 많은 피를 흘리도록.
"끄르륵!"
순간 내 모습을 놓친 주변의 뱀파이어의 시선이 뒤늦게 나를 향한다.
하지만 나는 베어낸 뱀파이어로부터 나온 혈액을 그사이 흡수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신체 능력이 증폭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신체 능력도 아마 포인트상 100이 한계일 거다. 물론, 앨거차의 문신과 마찬가지로 100이 넘어가면 포인트 상승이 없겠지만 그래도 보정 정도는 해줄 터.
게다가 피를 보면 볼수록 강해지는 이 능력의 특성상, 다수를 상대할 때 그 보정은 끝을 모르고 상승할 터.
양민 학살자의 탄생이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순간, 나는 현재 능력만으로 양민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 숫자가 무의미한 존재. 불사의 육체까지 함께하는 이상, 나의 전투 지속력은 탑 내 최고의 반열에 이를 거다.
흡수한 피의 일부가 혈무로 변환되어 주변에 퍼진다.
뱀파이어들은 본능적으로 피가 보임과 동시에 흡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혈무가 흩어진다.
그리고.
"끼에엑!"
"끼아아악!"
쿨럭!
곧바로 중독된 뱀파이어들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독성을 띈 피를 뿜어내는 혈무.
잠깐 사이에 효과를 보일 정도로 치명적인 독성이다.
내 피가 모두 저런 독으로 바뀐다라….
혐오감보다 만족스러움이 먼저 떠오른다.
숙련도를 올리면 독성도 강해질 터. 거인에게도 통할 정도로 강해져야만 한다.
피를 봄과 동시에 정신에도 조금 더 강한 부담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동시에 조금은 갈증이 해소되어 여전히 아슬아슬한 상황을 유지한다.
나는 피를 토하고 몸을 뒤트는 뱀파이어들을 노려 다시 도약, 즉시 상처를 찢어낸다.
베는 것이 아니다. 검을 찌르고, 뒤틀어 상처를 찢는다.
더, 더 많은 피를 흘리도록.
동시에 목을 끊고 심장을 찔러 생명을 빼앗는다.
죽은 뱀파이어의 혈액 통제력을 소실시킬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나를 향해 피가 폭포처럼 빨려들고 그것은 다시금 내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며 동시에 혈무를 뿜어낸다.
혈무는 독인데도 불구하고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뱀파이어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혈무를 흡수한다.
중독자가 늘어나고 다시 뱀파이어를 베어낸다.
반복적인 공격. 하지만 그들도 멍청하지만은 않다.
"흐아아!"
뱀파이어를 죽이고 피를 흡수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생긴 여유를 바탕으로 워 크라이를 사용함과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오는 피로 이루어진 창을 피해낸다.
움찔.
워크라이의 영향으로 뱀파이어들의 광기 어린 군기가 조금이나마 깎여나간다.
콰직!
바닥에 꽂힌 피의 창은 그대로 대지를 뚫어버리고는 몸체 중간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위력적인 공격.
곧이어 피의 창은 다시 혈액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내게 흡수되어 사라진다.
뱀파이어의 마법. 피로 이루어진 마법들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창, 검, 철퇴와 같은 무기. 그물, 사슬과 같은 내 움직임을 방해할 목적인 형태도 있었고, 완전한 구(球) 형태로 날아들어 폭발하는 마법 또한 있었다.
나는 되도록 회피를 우선했지만, 일부는 베어내 형태를 일그러뜨렸다.
그런 마법들은 즉시 내게 흡수되어 능력치와 혈무로 변했고 일부는 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음 휘두른 검이 뱀파이어의 가슴을 베어내는 순간.
푸확!
검에 스며들었던 피가 폭발하며 상처를 더 벌려버렸다.
바리치 문신의 효과, 추가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극한 활성화 때문에 조금 늦게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그리고 일정 수 이상의 뱀파이어를 베어내자 드디어 제대로 정신이 돌아왔다.
검. 검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쓰던 검이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형태였다.
희미한 기억이 어느 순간 급부상한다.
'흡혈검(吸血劍)!'
흡혈검. 자신을 파괴하거나 상대를 파괴함으로써 효과를 얻는 스킬이 바리치의 문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스킬들도 그런 것이 존재했고, 장비도 마찬가지다.
흡혈검은 상대를 베어내면 피를 흡수해 스스로의 공격력을 증가시키고 사용자를 회복시키며 동시에 오염시키는, 마검 계통의 무기였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피를 머금는다면 스스로 진화까지 하는 최상급 장비다.
그런 검이 왜 여기에?
의문도 잠시, 나는 곧바로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푸하하하하!"
이건 대놓고 이기라고 하는 것 아닌가.
좋은 장비에 좋은 스킬에, 상성 우위인 마물들. 나는 내 웃음에 움찔거리는 뱀파이어들을 향해 다시금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사들이 있는 위치를 살핀다. 그들은 원진을 형성한 채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아무리 뱀파이어들이 다 흡수한다고 해도, 혈무는 독을 품은 안개다. 전사들이 중독되면 위험하다.
잘 버티고 있는 상황이니, 이들을 학살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스킬들을 하나씩 사용하며 그 능력을 시험했다.
노출된 피보다는 아직 신체 내부의 피가 더 늦게 흡혈 된다는 것, 이걸 이용하면 끊임없이 피를 흡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며, 추가 피해는 폭발뿐만이 아니라 내가 컨트롤하기에 따라 절삭력을 높이거나 관통력을 높이는 곳에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혈액의 질에 따라 상승하는 능력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쯤 미쳐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현재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극한 활성화는, 이번 던전이 아니면 한동안 써보지도 못한다.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어느새 천에 이르는 뱀파이어를 학살했을 때, 내 능력치는 앨거차의 문신을 극한 활성화 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피에 마력이 잔뜩 들어간 뱀파이어들이다. 엄청난 능력치의 상승. 게다가 주변을 둘러싼 뱀파이어의 절반은 중독된 병신들이다.
"으흐흐…."
내 몸에는 상처하나 없었고 으레 전투 중에 묻었던 피들은 흔적도 없이 깔끔한 상태였다.
모두 흡수된 상황. 나는 턱을 타고 흐르는 침을 느끼고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빌어먹을. 육체 정화."
화악!
나는 곧바로 육체 정화를 사용해 정신을 되찾았다.
처음 하나나 둘, 수십을 베어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갈증이 줄어들어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지만, 일정 수 이상을 죽이고 흡수하자 되려 정신이 침식당한다.
정신을 보호할 다른 스킬과 보조 아이템, 불사의 육체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사의 육체가 성장하면 내성도 성장하니 아마 이런 현상에 저항할 수 있을 터. 물론 그래도 정신을 보호할 스킬은 필요하지만.
정신을 차리자 던전의 목표가 생각났다. 곧바로 전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공포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뱀파이어는 없었다.
어느새 처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 저들보다 내가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었을 터.
전사들은 공포에 젖었으면서도 어딘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내 주변에 쓰러진 뱀파이어들.
아마 자신들이 죽더라도, 부족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 더 만족스러운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전사들은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 마고그 족을 위하여!"
"대전사 바리치 만세!"
"마고그 족이여 영원하라!"
어딘가 3류 연극과도 같은 움직임과 목소리.
그러나 그런 상황과는 다르게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고, 그들은 미소로 대답했다. 내가, 자신들을 죽이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전사들은 어딘가 동요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육체 정화 덕분에 멀쩡해진 정신으로 저들을 베어낼 생각은 없었다.
1회차의 원주인이나 바리치가 어찌했는지는 모른다.
알 바도 아니고. 나는 내 방식대로 움직이면 된다.
어느새 뱀파이어들은 반쯤 기어가며 도망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혈무를 흡수하며 중독된 채로, 자신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나를 피해서.
나는 그런 뱀파이어들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직, 실험할 것들이 남았다. 스킬에도 적응해야 하고. 이번 던전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
나는 뱀파이어들을 향해 흡혈검을 들이댔다.
***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모든 전사가 생존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흡혈검(吸血劍)'을 지급합니다.]
[바리치의 문신이 활성화 됩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도 주변의 모든 전사가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던전이 클리어됨과 동시에 주변의 피가 몽땅 사라져 내 피를 태우기 시작한 것.
이번 고통은 앨거차의 문신과는 전혀 다른 고통을 나에게 선사했다.
-부족을 위하여.
나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비명을 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희끄무레한 영체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앨거차와는 다르게 그는 단 한 마디만을 내뱉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전신의 피가 마르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체감했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나는 던전 밖으로 쫓겨났고, 한동안 피가 마르는 끔찍한 느낌이 몸에 남아 있었기에 바리치가 최후를 맞은 장소 근처에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힐로도, 육체 정화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전과는 다르게 마침 지금은 밤이었고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필요했다.
앨거차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진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다들 이쪽으로 찾아올 테니까.
오른팔을 바라보자 은은한 핏빛으로 빛나는 문신이 보인다.
제대로 활성화가 된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추가 보상으로 받은 흡혈검을 확인했다.
[흡혈검(吸血劍)]
-등급 : 레어
-피를 머금고 성장하는 마검. 피를 먹으면 일시적으로 공격력이 상승하며, 주인의 상처를 회복시킨다. 동시에 마검답게 주인을 잡아먹으려는 악독한 본능을 간직하고 있다. 소유자는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공격력 : 45
-옵션1 : 피를 먹을 경우 일정 시간 동안 추가로 공격력 상승. 일정 수 이상의 적을 베거나 강자의 피를 먹일 경우 영구적으로 공격력 상승.
-옵션2 : 피를 먹을 경우 소유자의 상처를 회복시킨다.
-옵션3 : 상처 회복 시 일정 확률로 상태 이상 '광기'에 빠져들 수 있다.
-정보 추가 :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를 여럿 죽일 경우 아이템의 등급이 상승한다.
"하."
나는 힘든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장비를 얻었다.
이 검은 성장형 장비. 게다가 나는 레벨에 비해 능력치가 높아서 당분간 수준 높은 몬스터를 사냥할 계획이다. 어쩌면 슈퍼 레어가 된 흡혈 검을 가진 채 하층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시간을 벌었다. 이 검이면 장비는 충분하다. 다른 장비를 구하러 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흡혈검은 한 자루가 아니지.'
슈퍼 레어급 흡혈검에게 동급의 흡혈검을 2자루 먹이면 전설급 흡혈검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과거 흡혈검의 소유자가 그렇게 흡혈검을 찾아다녔다지? 그리고 끝내 찾아내 전설 등급의 흡혈검을 소지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랭커가 되었다. 무척 드문 경우. 그 끝은 비참했지만.
게다가 전설급 흡혈검은 더 상위의 무기를 얻기 위한 재료이기도 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건 확인되지 않았지만.
나는 흡혈검을 든 채로 하늘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양팔의 문신. 그리고 레어급, 성장형 무기.
피식.
강해질 기반을 다졌다. 가장 큰 산을 넘은 셈.
나는 달빛을 뒤로한 채 영지의 입구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