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마지막 웨어울프를 베어내었을 때, 던전 클리어를 뜻하는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동시에 전신에서 충만하게 느껴졌던 힘이 사라졌다.
이어지는 극심한 고통.
"…크윽."
나는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앨거차 님!"
곧이어 허리마저 힘이 풀려 상체 또한 지탱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전신을 달리는 고통. 혈관이 저리고 근육이 쥐어 짜이고 뼈가 어긋나고 몸이 뒤틀린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회로를 달리던 마력들이 폭주해 회로를 찢어버릴 듯 날뛰기 시작한다.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극심한 고통.
하지만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고통을 견뎌내었다.
처음 느껴보는 어마어마한 고통.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극한 활성화가 완전히 풀렸는지 시야마저 검게 물들어버린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그대로 정신을 잃고 쇼크사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긴장을 놓지 못했다. 끔찍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냈다.
끝까지 정신을 유지했고, 제법 시간이 흘렀는지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10분. 아니, 불사의 육체가 가진 능력까지 생각하면 그보다는 짧은 시간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시간 이상을 버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억, 허억…."
"앨, 앨거차 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거친 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대답할 이유도 없었다.
던전이 클리어된 이상 곧 있으면 나갈 수가 있을 터.
그 뒤로는 안녕이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후계자여.
"……."
허공을 쳐다보자 무슨 희끄무레한 안개 같은 것이 보였다.
생김새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앨거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내 주변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전사들은 사라져 있었다.
고요한 숲. 그리고 위에 보이는 영혼 같은 형상.
나는 가만히 그 영혼을 올려다보았다.
-내 힘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힘이다.
그런 것 같았다. 후유증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함부로 모든 힘을 활성화했다간 그 고통이 다시금 너를 찾아갈 것이고, 선을 넘는다면 그대는 고통과 함께 죽어갈 것이다.
아마 본래 앨거차의 영혼은 아닐 터였다. 아마도 시스템이 재현한 거겠지.
-뿐만 아니다. 죽지 않더라도 후유증에 시달려 그대는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러니 힘에 취해 너무 과한 행동을 하지 말라.
-그리고 부디, 그 힘을 우리 일족을 위해 쓰기를 바라노라.
그것이 끝이었다.
롤플레잉 형 던전이기 때문일까. 별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후유증과 그 위험성을 미리 알려주고 경고한다는 의미로는 쓸모가 있겠다만, 굳이 저런 식으로 표현했어야 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을 주는 탑이 저렇게 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람. 힘만 주면 됐지.
1회차 문신의 주인들은 실제로 저 말을 따랐다. 함부로 극한 활성화를 하지 않았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덧붙인 일족을 위해 힘을 쓰기를 바란다는 말까지도 지켰다. 그리고 죽었지.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건 이제 내 것. 나를 위해 쓸 계획이다.
곧이어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처음 던전으로 들어갔던 장소, 앨거차가 최후를 맞았던 곳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던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누운 채로 주위를 살피자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마고그 족들이 보였다.
몸은 땀과 피로 점칠 되어 있었지만, 던전의 특이성 덕분일까 극한 활성화로 인한 고통과 후유증은 없었다.
체험과 경고를 위해 그런 상황을 주었을 뿐이니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모든 후유증이 소멸한 듯했다. 만약 거기서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번 던전의 진짜 시험은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었을까.
[조건을 만족합니다.]
[앨거차의 문신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왼팔.
나는 가만히 그 팔을 들여다보았다.
"앨, 앨거차 님의 후인이 나타났다! 문신을 각성시켰어!"
주변에 위치한 전사들이 경악한 상태로 상황을 알렸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이봐!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외지인 전사잖아! 얼마 전에 들어왔다던… 그러고 보니 어제 여기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웅성웅성.
이렇게 유명해지면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지금은 유명세보다는 하루라도 더 빨리 강해지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전신에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극한 활성화가 아니더라도 문신의 기본적인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이전과는 충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불사의 육체 숙련도를 올려야겠군.'
그래도 극한 활성화를 했을 때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불사의 육체가 최고 수준에 오른다면 원할 때마다, 혹은 극한 활성화를 상시 유지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전사들을 헤치며 길을 열었다.
대부분은 그냥 비켜주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한 전사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이봐!"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전사를 바라보았다. 전사의 문신. 거기서 은은한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활성화가 된, 제대로 된 전사.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앨거차 님의 문신을… 어떻게 각성시킨 거지?"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앨거차 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뭐?!"
주변이 경악하는 것을 느낀다. 딱히 숨길 필요는 없었다. 1회차에서 이 힘을 얻었던 이들이 딱히 구속받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미고그 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거기서 시험을 받고,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마, 말이 되는 소리라고…!"
나는 왼팔을 들어 올려 문신을 보여주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빛 문신.
그러자 전사의 입이 닫힌다.
그럴 수밖에. 여기 대놓고 증거가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이제껏 그런 전사는…!"
"이유는 모릅니다. 갑자기 이상한 장소로 소환되었고, 자격을 증명했을 뿐. 그 대가로 문신을 각성시켜 주셨습니다."
"……."
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여기서 더 좋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힘으로 마고그 족을 이끌라고 하셨다. 그 말 한마디면 마고그 족을 내 아래에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바로는 되지 않겠지. 여러 시련이 있을 거다.
하지만 당장은 필요 없었다. 되려 귀찮기만 하다. 이들은 탑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주변의 웨어울프와 뱀파이어들 때문에 당장 전력으로 쓰지도 못한다. 제국 내 영향력이 엄청나지도 않다. 내 길드의 메인이 수련자여야만 하는 이유다. 수련자들을 확실히 잡은 뒤, 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써 마고그 족을 사용한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 온다고 하더라도 마고그 족은 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리치의 문신마저 활성화 시킬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침묵에 휩싸인 전사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바리치가 최후를 맞았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리치의 던전도 마찬가지였다.
롤플레잉 형 던전.
거기서 나는 바리치가 되었고, 그의 검을 들고 마물인 뱀파이어들과 싸워야만 했다.
단지 앨거차의 던전과 다르게 바리치의 던전은 목표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던전 클리어 시점에 전사가 하나라도 살아있을 것.
앨거차의 던전에서는 단 하나의 전사도 죽지 않은 만큼 얼핏 듣는다면 어렵지는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르다. 던전에 진입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 나와 전사들은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뱀파이어들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잠시 시간의 유예가 있었다. 스킬을 파악할 시간은 있어야 했으니까. 마치 주변은 시간이 정지된 상황 같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타이머가 생겨났다.
아마 저게 0초가 되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겠지.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바리치의 문신 또한 앨거차의 문신처럼 극한 활성화가 가능했고, 던전 내에서는 제한 없이 극한 활성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강제로 극한 활성화 상태가 되었다.
이건, 사용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즉, 여기서는 죽더라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죽기 전에는 내보내 주겠지.
나는 극한 활성화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이 던전이 앨거차의 던전보다 되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뇌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주변이 온통 핏빛이고 감정이 격해진다.
내 주변에 서 있는 전사들마저 적들로 인식된다. 저들이 내게 있는 힘을 다해 살기를 내뿜는 것만 같았고, 그들의 우려 섞인 얼굴 위로 비열한 표정을 짓는 그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덧씌워진다.
시간이 멈춰있는데도 이 지경이다. 말까지 하고 표정 변화까지 일어난다면 어떤 꼴이 될까.
저들이 나를 해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감각은 저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격렬하게 외쳐댄다.
이 살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흔들린다.
그제서야 던전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전사들을 죽이는 것은 뱀파이어 뿐만이 아니다. 나까지 포함된 인원이지. 그것을 참아야만 한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바리치의 문신 효과는 엄청났다. 그리고, 그만큼 부작용이 심각했다.
[바리치의 문신(임시 활성화)]
-앨거차가 멸족의 위기에 빠진 자신의 일족을 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신. 동생이자 대전사인 바리치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되었다. 뱀파이어를 죽이기 위한 바리치의 고심이 한껏 깃들어 있다.
-상대의 피를 흡수해 생명력 및 체력 회복
-자신의 피에 독성을 부여
-피의 마력을 흡수해 마력 영구 강화
-상대의 피를 사용해 전체 능력치 임시 강화
-독 내성
-흡수한 혈액량에 비례해 추가 피해
-극한 활성화 가능
[극한 활성화]
-일대의 모든 피 자동 흡수, 능력치 강화
-추가 피해량 증가
-스킬 혈무(血霧) 상시 개방
앨거차와 다르게 본인이 대전사에 이르는 자였던 만큼, 심플하게 능력치를 올려주었던 앨거차의 문신과는 차이점이 보였다.
뱀파이어를 죽이기위한 고심. 그게 무엇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피.'
뱀파이어는 피를 흡수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상처와 체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일부는 피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고 흡혈 의식을 통해 상대를 자신의 동족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저들의 힘이 될 피를 역으로 흡수하고 사용함으로써 저들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되려 본인을 강화한다.
그건 좋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었다.
완전한 타인의 피를, 그것도 마력이 깃든 이종의 피를 흡수한다는 것은 몸에 상당한 무리를 준다. 앨거차도, 바리치도 짐작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치는 스스로 그것을 원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문신이 최대한 정제를 해주긴 했지만, 스스로의 감각이 어긋나고 그 영향으로 문신의 주인이 천천히 미쳐가는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한 활성화 시에는 문신의 주인은 반드시 죽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대의 모든 피 자동 흡수 및 사용.'
이 효과는 주변의 피가 없을 경우, 본인의 피마저 능력치 강화에 사용해버린다.
끝이 아니다.
혈무. 주변의 피를 흡수, 자신의 피로 만든 후에 독성을 부여하여 곧바로 피안개로 뿜어버리는 기술.
뱀파이어들이 주변의 피를 흡수할 경우 이 혈무마저 흡수해 그대로 치명적인 독에 중독되어 버린다.
뱀파이어를 카운터치는, 바리치의 회심의 한 수.
그렇지만 이것 또한… 본인의 피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본인의 피는 한정된 자원이다.
인간은 체내 혈액량에서 30%만 잃어도 사망한다.
마력이 존재하고 스텟의 보정을 받으며 초인적인 신체를 가진 탑이라도, 다량의 피를 잃으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구에 있을 무렵보다야 조금 더 버틸 수 있지만, 그게 한계다.
아무리 주변의 피를 우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활성화 시간 내내 외부의 피만으로 스킬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효율이 다르다. 결국 본인의 피가 적더라도 꾸준히 소모된다.
스킬의 힘으로 외부의 피를 본인의 피로 만든다? 꾸준히 변환하기는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소모 속도가 다르다.
실제로 1회차 당시 이 문신을 처음으로 극한 활성화했던 수련자는, 주변에 수천에 달하는 인간의 시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라처럼 말라 죽었다.
주변의 시체들이 모두 미라가 되고도 피가 부족했던 것.
그렇기에 이 기술을 사용하면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정말로, 바리치의 문신은 불사의 육체가 없었다면 절대 갖지 않았을 스킬이었다.
앨거차의 문신과 바리치의 문신이 둘 다 전설급 최상위에 위치한다면, 불사의 육체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스킬이다.
불사의 육체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한다면 능히 바리치의 문신을 견딜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 당장 극한 활성화를 버티지 못할 거다. 하지만 나중에 숙련도가 쌓인다면 능히 해제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겨우 스킬을 파악하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새 전투 시작까지 20초.
나는 흔들리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거 정신 방비용 스킬도 얻어야 할 듯했다.
외부에서 오는 정신 공격이 문제가 아니라, 스킬의 부작용이 문제다. 한동안은 문제없겠지만, 지속되면 골치가 아플 듯했다.
그사이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잠시 뒤.
멈췄던 시간이 돌아왔다.
"크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평소 잘 내지 않았던,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뱀파이어들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