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09화 (109/317)

# 109

중층

[아지렉의 대지에 입장하였습니다.]

리베리드의 도움으로 손쉽게 공간이동을 통해 도착한 아지렉의 대지. 그곳에서 아지렉은 돌 위에 드러누운 채 뒹굴거리고 있었다.

"응…? 리베리드!"

곧바로 일어나는 거대한 몸집의 고릴라. 그가 바로 중층으로 가는 관문을 지키는 중간 보스, 아지렉이었다.

"이 사기꾼! 여기가 어디라고…!"

"여전하군요. 아지렉."

리베리드는 그런 격한 반응의 아지렉을 바라보며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사기꾼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고릴라는 격하긴 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했다.

놀 영웅을 제외하면, 하층에서 사실상 말이 통하는 유일한 몬스터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이 만나는, 최초로 대화가 통하는 몬스터.

물론 중층으로 간다면 오크나 수인들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아지렉과 그런 그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리베리드.

"죽지 않고 영원히 싸울 수 있는 장소로 보내주겠다더니, 이게 뭐냐! 여기 어디에 그런…!"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몇 년? 며어어엇녀어어언? 하. 내가 니 마음대로 움직일 것 같아? 오는 놈들은 전부 그 퀘스트라는 것으로 엿을 먹여…!"

"아. 안 그래도 여기 이분이 당신의 첫 손님입니다."

"…호오? 네놈이 직접 데려왔다 이거군?"

아지렉은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네 마음대로 해 줄 수는 없지. 이 빌어먹을 새끼야. 어이 너. 지금 당장 가서…."

"아. 이분은 안 됩니다. 아지렉. 퀘스트를 허가해드릴 수 없습니다."

움찔.

곧바로 아지렉은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시스템 메시지를 보는 모양. 글자도 아는 듯했다.

"이, 이 씨벌놈이 지금…!"

"아, 그분은 시간이 없는 분이라서요. 빨리 싸우고 통과시켜 주세요, 아지렉."

빙글빙글 웃어대는 리베리드와 그런 리베리드를 노려보는 아지렉. 하지만 역시 상하 관계는 명확한 것인지 아지렉은 씩씩거리면서도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묵사발을 내주마 빌어먹을 새끼야."

나는 괜히 튀는 불똥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1회차에서 많은 수련자들을 대놓고 골려먹었던 놈이다. 정말 더러운 성격 때문에 고생했는데, 조금은 풀리는 기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런 감정보다는 시간이 더 아까우니까. 기껏 공간 이동까지 받았는데, 더는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끝내자. 고릴라."

"내 이름은 아지렉이다 원숭이."

여전한 호칭.

나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검을 꺼내 아지렉을 도발했다.

"그냥 들어와. 리베리드 님? 바로 시작해도 됩니까?"

"아 물론…."

"그건 내가 정하는 거야! 이 왜소한 원숭이가!"

아지렉을 완전히 무시하자 그는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지렉의 시험을….]

나는 즉시 마력을 활성화해 빠르게 달려든 아지렉의 기습을 피했다.

그러자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아지렉은 다시금 자세를 잡고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게 휘둘러오는 팔.

나는 단숨에 검기를 뽑아내고는 마주 검을 휘둘러갔다.

"검기!?"

아지렉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팔을 거두었다.

신중해진 표정의 아지렉.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

속도 자체는 내가 빠른 편. 게다가 근력도 60이라는, 중층에 어울리는 수준을 갖고 있었다.

높은 근력은 이러한 속도에 깊은 영향을 준다. 물론, 일정 수준의 민첩이 없다면 컨트롤이 안 된다는 불상사가 생기지만 나는 민첩 또한 50이다. 약간 부족하기는 하더라도 컨트롤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곧바로 아지렉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지렉의 표정은 시시각각 초조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리베리드가 데려온 사람에게 지는 것이 불쾌한 모양. 아지렉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그러나 그렇다고 실력의 격차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흥분해 달려드는 아지렉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상대의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는 오래갈 수 없었다.

곧바로 리베리드가 전투를 중지시켰다.

"상대가 안 되네요. 시험은 통과한 것으로 판정하겠습니다."

[아지렉의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중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을 습득하였습니다.]

[중층과 하층은 연결되어 있으며, '늪지'를 통해 언제든지 하층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튀어나오고 아지렉은 강제로 몸이 정지되었다.

증오스러운 눈초리로 리베리드를 바라보는 아지렉.

"…이새끼가…."

아지렉은 아까와는 비교도되지 않는 눈으로 리베리드를 바라보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아지렉. 수고하셨습니다."

"이러자고 나를 불렀나? 나를 시험관이라고 한 것은 너일 텐데? 내가 그 빌어먹을 시스템에 속한 이유가…."

그러자 리베리드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아지렉을 바라보았다.

"아지렉?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이 없다고 했을 텐데요? 입 닥치세요. 당신의 역할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역할에 필요한 지능과 능력이 있는 마수가 고작 당신 하나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순간 나도 경계심이 절로 들만한 기세가 리베리드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아지렉은 여전히 분노한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선 넘지 마세요, 아지렉. 이분은 당신 따위와 비교해도 좋을 분이 아닙니다. 다른 쓰레기들에게 어떻게 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을 비롯해 제가 지정한 몇 분께는 예의를 지키세요. 버러지."

그 강렬한 기세에 아지렉은 굴욕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숙여 복종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엉뚱한 수련자들이 고생하겠는데?'

저놈이 저걸로 한을 풀 리가 없었다. 아마 저 원한과 스트레스를 다른 수련자들에게 풀 터였다. 어차피 우리 일행은 제외되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나중에 만들 길드의 길드원들이 고생 좀 하겠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었다.

…내게 예의를 차리는 특이한 플로어 마스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플로어 마스터는 플로어 마스터. 그 층을 지배하는 자 다웠다.

"그럼, 유신후 님? 다음번에는 시간이 충분할 적에 다시 뵙고 싶군요. 언제 식사라도 한 번 하시겠습니까?"

"…플로어 마스터와 그래도 됩니까?"

"중층에 진출하신 분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이미 제 시험은 통과하신 거니까요."

리베리드는 아지렉을 대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한동안 바쁘기는 하지만…."

"아 여유가 되시면 부탁드립니다. 물론, 원래 임무가 더 중하신 분이시죠. 잊지만 말아 주시길."

리베리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치 이중인격 같은 모습. 하지만 나에게만 친절하면 상관없었다.

"…물론입니다.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 주셨는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예. 바쁘신 와중에 죄송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나는 고개 숙인 아지렉과 여전히 웃는 얼굴일 리베리드를 뒤로 한 채 중층으로 향했다.

***

[중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단촐한 메시지.

하층에 입장했을 때와는 다른 메시지였다.

중층부터는 하층처럼 친절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구역이 있기는 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퀘스트 등이나 레벨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출입이 가능해진다. 물론, 상층에 해당하는 60층은 역시 마찬가지로 자격을 증명해야만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상층으로 가는 자격의 증명이 난이도가 무척 높고 지루하다면서 악명이 자자한 편이었지만, 60층에서 끔살당한 내 입장에서는 그 난이도마저도 낮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튜토리얼 때는 미션이 완료되지 못하면 층간 이동도 불가능했던 것에 비해 훨씬 제한이 널널해졌다.

1층부터 시작해 위층으로 갈수록 제한이 풀려가는 느낌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사실이기는 하지만.

[열세 번째 꽃이 드디어 해방이라고 외칩니다.]

"…리베리드의 말 못 들었습니까? 최대한 자제하라면서요."

[열세 번째 꽃이 이정도는 상관없다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모두 당신 덕분이라며 감사를 표합니다.]

"…나 덕분에 힘이 남아돈다고?"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른 히든 클래스에 비해서 관리자에게 지원받아야 할 것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얻는 거라고는 직업뿐. 스킬도, 아이템도, 영약도 지원받지 않는다. 다 내가 알아서 하니까.

덕분에 간섭력이 남아도는 거다.

플로어 마스터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고. 한 푼이라도 아껴서 나를 돕길 바라겠지.

"…중층에도 플로어 마스터가 있을 텐데요?"

[열세 번째 꽃이 한동안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직 제재는 없다고….]

왔네. 제재.

게다가 내가 알기로 중층에서는 활동하는 플로어 마스터가 다수다.

아마 제대로 뚜드려 맞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드디어 중층….

나는 곧바로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경악한 표정의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복장.

제국의 정규병이었다. 아무래도 정찰을 하던 모양. 1회차에도 이 근처에 검문소가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니, 아니다. 용병인가?"

"그렇습니다."

"그, 그렇군. 늪을 건넜다는 것은… 티드린드 쪽 사람인가."

"네, 뭐.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수련 때문에 한동안 그쪽에서 활동했었죠. 아, 혹시 신분 확인이 필요하신…."

"그, 그렇군. 잠시 보여줄 수 있나?"

"여기 있습니다."

나는 따로 갱신받지 않은, 여전히 F급에 해당하는 용병패를 보여 주었다.

갱신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명성도 충분했고 거기서 갱신받아 봤자다. 기왕이면 좋은 장소에서 갱신하는 것이 더 신뢰성이 높았다.

티드린드 성은 애초에 범죄자들이 뭉쳐 세워진 곳이다 보니, 등급이 높아도 신뢰를 잘 해주지 않는 편이었고.

"확, 확인되었다. 발급을 받은 곳이… 다른 곳이로군? 못 들어본 곳인데…."

"아, 제가 제법 먼 지방에 있다가 수련차 간 거라… 동부의 작은 영지에서 발급받았습니다."

"…먼 곳에서 받았군. 아무튼 알겠네. 지나가게나."

"감사합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사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검문소를 지났고, 다행히 다른 병사들은 별로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난 병사만이 이상한 반응을 보일 뿐.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혼자 늪지를 뚫어서 그런가?'

어쩌면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솔직히 그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금세 병사에게 신경을 꺼버렸다.

우선 용병패를 갱신해야 한다.

접경지에서 갱신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거리가 멀기에 일단은 제법 큰 성에서 받는 것이 차선이었다.

'가장 가까운 성이… 에울프 성이었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차피 길을 따라 이동하면 성에는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외곽이라도 이제는 진짜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곳에서 실력을 증명받으면 아마 B급 용병패 정도는 얻을 수 있을 터. 신용은 의뢰를 거쳐 가며 쌓거나 누군가의 보증이 필요하므로 아쉽지만 패스해야만 했다.

신용만 있었다면 상단 등의 호위 명목으로 긴급 화물 운송 등에 참가해 혼자 이동하는 것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이쪽 일은 신용이 필수라 실력 증명만으로는 참가하기가 힘들다.

오래 활동이 필수적인 덕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패는 갱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첫 번째 목표인 마고그족의 영지로 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 증명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마고그족은 제국 내의 소수 민족 중 하나다. 힘을 숭상하는 만큼, 일정 수준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그런 의미로 용병패는 실력 증명을 위한 좋은 수단 중 하나였다.

과거에는 야만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인간의 주적인 오크들 때문에 제국은 수많은 인종을 받아들였고, 마고그족은 그런 이들 중 하나다. 영지로 인정받은 곳에서 자신들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원하는 전설 등급의 스킬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곳 말고도 들러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나는 이곳을 첫 번째로 선택했다.

나는 에울프 성으로 이동하며 오랜만에 상태 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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