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늪지
성을 나와 모너스 마을로 향했다. 막 하층에 도착한 새로운 수련자들은 내가 갑자기 모너스 마을로 찾아오자 의아한 모습이었다.
"유신후 님이 어째서 여기에…?"
"일이 조금 있습니다. 당분간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일이 많다고 들으셨는데…."
"저희 파티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많으니까요."
가벼운 친분을 방패로 내게 말을 걸어온 수련자들에게 웃으며 답해준 뒤 나중에 다시 보자며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갔다.
귀찮기는 했지만 일단 미래에 영입할 대상도 있고 했으니 가벼운 이미지 관리랄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괜찮은 이미지는 중요한 법이니까.
갈색 놀 지역이지만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주 이동하는 편인 놀들이지만 최근 잦은 전투로 인해 이쪽 보다는 영역의 끝쪽에 많은 수가 몰린 편이었고 애초에 이쪽 길들은 갈색 놀의 영역이기는 해도 그들이 자리 잡는 장소는 아니었으니까.
이쪽 주변은 인간들이 간혹 이용하기도 하고, 애초에 늪지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자리를 잡는 것을 피하는 편이었다.
그런 만큼 방해되는 것도 없어서 나는 빠르게 갈색 놀 지역을 돌파할 수 있었다.
[31구역 광활한 늪지에 진입하였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늪지로의 입장.
그러자 이제껏 관음해왔던 열세 번째 꽃이 말을 걸어왔다.
[열세 번째 꽃이 이제 혼자서 돌아다니냐고 묻습니다.]
"뭐, 한동안은. 내 성장이 막히기도 했고."
나는 생각난 김에 수갑을 벗어버렸고 곧이어 아이템이 소멸해버렸다.
이제껏 간혹 관음만 하다가, 일행이 아예 사라지자 다시금 말을 걸어온다. 어차피 혼자 있을 때 가끔 말을 걸어온 적도 있는 터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열세 번째 꽃이 어쩔 계획이냐고 묻습니다.]
"레벨 올려서 전직부터 해야지. 사제야 쓸 방법이 있으니 그대로 둘 거지만, 이제 수호자는 필요 없으니까. 준비해 둬. 곧 있으면 2차 전직이니까."
2차 전직은 50레벨이다. 3차가 90. 4차가 만레벨인 100때 있다고 하는데, 실제 4차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중층에서 없었다. 상층으로 간 이후 돌아온 자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사실 2차 전직으로 상위 직업이나 융합형으로 전직하지 않고 아예 다른 전직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다.
상위직으로 갈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니까.
아예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히 좋은 스킬을 얻어서 어쩔 수 없다거나 정말 자신과 맞지 않는 직업인 경우에는 별수 없이 전직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람이 나오곤 했었다. 성공한 경우는 드물지만.
하지만 나 같은 경우, 애초에 히든 클래스인 만큼 별 상관은 없었다.
히든 클래스는 다음 전직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단지 스킬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뿐. 특히 상위 스킬을 돈이나 퀘스트 없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었다.
히든 클래스들은 대부분 타 관리자가 힘을 내리는 것인 만큼 제약이 강한 편이었고, 그렇기에 스킬을 얻기 위해서 일정 이상의 재물과 퀘스트가 반드시 필요했다.
나야 이중 계약 덕분에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역으로 탐나는 스킬이 없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특혜였다.
스킬 같은 것이야 내가 아는 정보를 이용해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되려 쓸데없는 스킬을 배우는 것은 개인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내가 얻을 모든 스킬이 전설급은 아니니까.
하지만 직업 보정은 아쉬웠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바꾸려는 것.
그렇기 때문일까. 열세 번째 꽃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열세 번째 꽃이 원하는 직업이 있냐고 묻습니다.]
"근접 전사 계통이면 돼. 무기는… 기왕이면 검이 좋을 것 같네. 없으면 다른 것도 상관 없어."
[열세 번째 꽃이 아름다운 검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거 말고는 없어?"
[열세 번째 꽃이 검사 계통은 이쪽이 최선의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알겠어. 그걸로 부탁해."
[열세 번째 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수련자를 칭찬합니다.]
나는 우선 중층으로 가기 위해 늪지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아지렉의 대지. 하지만 중간에 들러야 할 곳이 존재했다.
36구역, 중층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아지렉이라는 중간 보스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놈이 시험이랍시고 해괴한 일을 시켜 먹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전투를 통해서 힘을 증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건 나중의 일. 초반에는 리자드맨을 천마리 잡아 오라거나-그것도 시간을 하루 준다-리사르를 토벌해 심장을 가져오라고 하거나, 리버그를 죽여 머리를 증거로 들고 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지 기분에 따라서 저런 꼬장을 부리고는 했었다.
게다가 웃긴 것은 시스템상 퀘스트로 인정이 되어 버려서 그 안에 하지 못하면 애초에 통과 자체가 되지 않는다. 퀘스트 실패 시 한 달이라는 기간을 묶여버려서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수 있었다. 이런 꼬장 때문에 한동안 한국 쪽 수련자들은 중층으로 진출하지 못했었다. 금세 알려졌지만 아지렉을 상대해 힘을 증명하는 것이 훨씬 난이도가 낮았다.
리사르나 리버그는 아지렉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 정확히는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아지렉은 그냥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났지만….
'리사르는 물리 방어력이, 리버그는 독을 썼었지.'
리사르는 마법사나 수준 높은, 정확히는 검기를 사용하는 검사가 필요했고 리버그는 독 때문에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그러나 시간에는 장사가 없다고. 훗날 수준이 높아진 수련자들이 단체로 둘을 토벌, 그 이후에는 대부분 힘을 증명하거나 리자드맨을 토벌함으로써 다음 층으로 향하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따라잡혔다고 한들, 현재 내 실력은 몇 년 후의 중층에서도 중간 수준은 된다.
그리고 그 중층에는 저들 수준의 마물은 흔한 편. 그렇기에 나는 둘을 먼저 토벌해버리고 증거를 아지렉에게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나야 하층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검기를 사용하는 검사이고 동시에 레어급 육체 정화 스킬을 가진 사제이기도 했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늪지를 통과하는 와중 많은 리자드맨을 만났지만, 현재 내 수준으로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리자드맨 자체의 능력은 놀들보다 명백하게 높은 편이기는 했다. 각자가 놀 백인장급의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실제 둘이 붙는다면 백이면 백 리자드맨이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장소가 늪지라는 조건이 붙지만.
지형적 특성 때문에 늪지에 입장한 이들은 하나같이 불리한 환경에 처한다.
지금 나만 해도 이 끈적한 공기와 푹푹 빠지는 바닥 때문에 상당히 짜증 난 상태였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워낙 더러웠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황금 놀들 때문에 고립되었던 사막보다도 이 늪지가 더 싫었다.
특히 해충약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곤란했을 터였다.
'귀찮네.'
그렇지만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냥 귀찮고 짜증 나는 수준.
그 증거로, 지금만 해도 내 앞에서 '끽끽'거리던 리자드맨 수십을 베어버린 상황이었다.
나는 현재 리사르의 둥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수련자들이 개척한 길은 없고 상인들만이 사용하는 길뿐이어서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제법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나는 둘의 토벌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몸이라, 어림짐작한 위치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반가운 메시지를 만났다.
[35구역 리사르의 둥지에 진입하였습니다.]
"찾았네."
[열세 번째 꽃이 드디어 도착했다고 투덜거립니다.]
이전에는 일행들과 함께 있는 나를 배려한다며 별다른 메시지도 잘 보내지 않던 놈이 혼자만 되면 별의별 간접 메시지를 띄운다.
일행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내가 싫어했던 것이 주효했지만, 지금은 혼자인 상황.
덕분에 열세 번째 꽃만 신난 상황이었다.
나는 검을 고쳐잡았다.
리사르는 뱀의 형태를 한 마물이었다.
몸뚱이는 칠흑빛에 가까웠고 몸길이만 20m에 달하는 거대한 뱀의 형상이었다.
특히 저 칠흑빛 뱀 가죽은 물리 공격에 상당한 내성을 갖고 있어서 어지간한 공격은 그대로 몸으로 때워버리는 놈이다.
그래 봐야 검기 앞에서는 허무하게 몸뚱이가 갈라지는 한낱 마물에 불과했지만.
중층에는 검기를 버티는 몬스터나 마물은 흔한 편이다.
대표적으로 상급 마물, 케르베로스 같은 경우, 검기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검강쯤 되어야 상대할만한 셈.
마물중 최상급인 베히모스쯤 되면 그 검강으로는 생채기 내기도 힘들지만.
'베히모스야 육체 능력이 거인에 버금가는 괴물 중 괴물이니 예외기는 하지만.'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지우고는 리사르를 향해 접근했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잠시만요."
'응?'
나는 빠르게 반응했다.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
여기에 인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갑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아, 저는 리베리드라고 합니다. 하층의 플로어 마스터입니다."
"플로어 마스터요?"
하층의 플로어 마스터는 처음 본다.
중충은 그나마 멀리서라도 봤었지만.
"네. 당신께서 회귀자로 알려지신… 유신후 님, 맞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런데… 플로어 마스터께서 왜 여기에?"
"하하… 뭐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한동안 쭉 하층에 수련자라고는 유신후 님 파티뿐이었고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높여왔다. 에파토스와는 다른 성격으로 보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실은, 리사르와 리버그를 처리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왜죠?"
"실은, 그 둘은 하층의 수준을 측정하는 이들이라서요. 애초에 아지렉이 그런 퀘스트를 주는 것도 그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니까요."
"…그 빌어먹을 퀘스트를 당신이 내려주는 거였습니까?"
나도 받은 적 있는 퀘스트였다.
물론 내가 받았을 때는 이미 그 악명이 널리 알려진 상태라 그냥 포기하고 한달을 날려버렸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둘 다 어렵지 않은 상대. 그렇기에 미리 잡아버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둘의 시체는 제법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운에 맡겨서 통과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시간을 조금 들이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만약 도착한 이후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린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여기까지 왔던 거였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탑의 지침에 따라 지시를 내릴 뿐,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것은 아지렉입니다. 저는 거의 방관을 하는 편이라서요."
리베리드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퍽이나 자랑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물론, 그냥 해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한시가 급하시죠? 에파토스 님께 듣기로는, 히든 퀘스트도 있다고 하던데?"
확실히 정보를 공유하는 플로어 마스터들답게 회귀자인 내 정보는 사실상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제가 힘 좀 써 드리겠습니다. 퀘스트 대신 실력 테스트만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특혜 아닌가요? 괜찮습니까?"
"이정도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하층의 수준을 측정하면 지금만큼 초월적인 상황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있는 인원이 100도 안 되는데, 당신 덕분에 수준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하니까요."
100은커녕 50도 안 된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일행들의 수준은 몇 년 뒤의 중층에서도 하위권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수준이다. 경험과 스킬 숙련도만 더 신경 쓰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으니 확실히 밸런스가 어긋난 셈. 막 하층에 올라온 이들은 몇 년 후의 수련자들보다 떨어지겠지만, 일행들이 평균을 확 올린 편이니까.
"그래서 잠시 막아둘 생각입니다. 뭐, 아지렉은 반발하겠지만…."
그 성격 더러운 꼬장놈이 어지간히 싫어하기는 할 것 같았다.
"제가 말하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잠시 고민한 이후 그의 거래 제안에 응했다.
여기를 찾는 데만 해도 3일이 걸렸다. 이동 시간까지 감안하면 10일 이상의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셈. 나에게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보니, 그의 제안은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면 아쉽기에 나는 거래 조건을 추가했다.
"그렇게 따지면 제 일행 또한 그런 퀘스트는 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층 수준을 측정하기에는 좋은 표본이 아니니까요."
만족스럽다. 가죽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시간을 절약해 주신다고 했으니 공간 이동, 가능합니까?"
"…기왕 하는 것. 해 드리죠."
리베리드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나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좋지도 않은 늪지를 빠르게 탈출할 방도가 생긴 셈. 물론 나중에 복귀할 때는 직접 이동해야 하지만, 중층에서 목표만 이룬다면 지금처럼 불편하지는 않을 터였다.
[열세 번째 꽃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친절하다고 말합니다.]
"아, 열세 번째 꽃 님? 간접 메시지는 최대한 자제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열세 번째 꽃이 혼자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쓸데 없는 곳에 소량이라도 간섭력 낭비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힘든 임무 받으신 분인데… 더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리베리드는 무척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열세 번째 꽃이 시무룩한 얼굴로 최대한 자제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랬으면 하는군요. 가끔이라면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만…."
어쩐지. 혼자만 있을 때 메시지 보내는 것이 자기가 날 배려해서라고 하더니, 플로어 마스터에게 재제를 당한 거였구만.
나는 고개를 저었고, 리베리드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이동하도록 하죠. 아무래도 한시가 급한 분인데…."
확실히 플로어 마스터들이 호의적이라는 것은 편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곧바로 아지렉의 대지로 이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