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06화 (106/317)

# 106

잠시 이별

탁.

주하연이 손을 들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런 화제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반대를 외쳤던 나서윤이 그런 주하연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일행의 얼굴은 심상치 않았다.

최근 들어 유혹(?)이라는 이름 하에 가까워지려고 달려드는 나서윤은 물론이고 최근 자신감을 얻은 남은주도, 재능이 출중하지만 상대적으로 일행들 중 가장 약한, 그래도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하유진까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최근 상대적 박탈감인지 자격지심인지를 느끼는지 기가 죽어 있는 나연은 아예 무척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일행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데 반해서 나연은 그 성장세가 무척이나 둔했다.

여전히 소환하는 정령은 최하급 수준이었고 그 수도 둘. 그나마 교감 능력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정찰에 관해서는 하유진과 함께 완숙한 능력을 선보였지만, 그게 한계였다.

마력은 그럭저럭 성장해 소환 지속시간을 비롯해 전투 지속력은 길어졌지만, 정령이라는, 출력의 한계가 명확하게 정해진 덕분에 눈에 띄는 성장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과거 남은주가 필사적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나연이 필사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일행 전체가 수련에 소홀함이 없었고 꾸준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해가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만족스럽기는 했다.

"얼마나요?"

"…최소 반년입니다."

"…하. 반년이요?"

주하연은 어딘가 비난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눈빛. 그러더니 미간을 가볍게 누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에요?"

주하연이 일행을 대표해 내게 물었다.

이전에도 주하연은 나를 제외한 일행들을 대표하고는 했었다.

처음 파티가 합쳐질 때부터 그녀 또한 셋 뿐이기는 하지만 한 파티의 리더였고, 덕분에 표면상 동등한 관계를 구축했었다.

하지만 이후 내 활약이 커지고 파티 내의 주도권을 틀어잡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서브 리더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건 나연이 정령을 소환해 입지를 구축하고 나서윤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 이후로도 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인망도 있었고 나이도 가장 많았으며 다른 일행에게는 없는 부드러운 리더십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엄청나게 성장해 나서윤과는 다른 의미로 파티 내에서 입지를 구축했고 파티의 중심인 나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완벽한 이인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최근 견제(?)를 하던 나서윤조차 주하연의 가벼운 제지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저렇게 표정으로만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으니까.

사실, 내가 일행과 떨어지려고 했던 것도 저런 주하연의 존재 덕분이었다.

내가 없더라도, 일행이 흩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나는 주하연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다음 지역으로 향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다음… 지역이요?"

"네."

"…그건 또 어디서…."

"늪지, 아십니까?"

"…들어본 적 있어요. 우리가 처음 들렀던 모너스 마을 뒤쪽으로 갈색 놀 영역을 지나치면 나오는 장소라고…."

"네. 그 늪지를 지나면… 제국으로 갈 수 있다더군요."

상인들도 그쪽을 통해서 이쪽 영지와 거래한다.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자주 오지는 않았고 그만큼 물품도 비쌌다. 운송비를 제외하고도 상당한 폭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에는 물품이 부족한 이상, 그런 상인들의 폭리에도 영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영지의 특산품 증가로 조금 덜한 핍박을 받는 편. 이것들이 저들에게 제법 이익이 되는 면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상인은 상인이라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물건이 끊기면 영지 입장에서는 곤란하다. 아주 못살지는 않지만, 그만큼 궁핍하게 지내야만 한다.

훗날 나는 그쪽을 정리하고 제국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야 한다.

이쪽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 아마 영주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터다.

하지만 늪지에는 리자드맨들이 살고 있으며, 길은 험난하다.

상인들마저 여기에 오기 위해서는 정말 대규모로 뭉쳐서 와야 할 정도.

놀들이나 리자드맨들이 함부로 습격하지 못하도록 큰 규모로 움직인다.

다행히 길 자체는 오랜 시간 교류함에 따라서 존재하기는 하고, 놀들이나 리자드맨들도 과거 몇 번이나 습격을 실패한 경험 덕분에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지나갈 이들이라는 것을 아니까.

리자드맨들은 침략을 받은 경험이 없었고 놀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것을 1순위로 두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래서, 그 제국이 다음 지역이라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냈던 사막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늪지로 이동하면 31구역이 되더군요."

"…언제 다녀온 건가요? 거기는?"

"혹시나 해서 시간을 좀 냈습니다. 최근, 회색 놀들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도 레벨의 성장이 거의 막힌 상태이니 활로는 찾아야 하니까요. 슬슬 미궁의 최상위권 수련자들이 올라오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래요. 우리가 꽤 오래 이곳에 머무르기는 했죠. 하지만."

주하연은 단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우리와 떨어져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해요. 오히려 다음 지역이라면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저희와 떨어져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해요."

단호한 주하연의 말.

일행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주하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저희 일행이 모두 다음 지역으로 가기 위해 빠져버리면 겨우 확보한 광산을 비롯해 주변 동향을 알아보는 것까지 전부 불가능해집니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씩 일행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거의 멈추긴 했지만 갈색 놀과 붉은 놀의 접경지나 회색 놀을 견제하고있는 광산 주변의 동태 등을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파티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힘들다.

과거 수많은 조사 의뢰의 실패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나마 우리 파티 정도의 무력과 하유진의 은신, 나연의 정령과 같은 특별한 정찰 능력을 바탕으로 최근 균형을 유지하는 편이었으니까.

"…혼자 위험하게 그런 곳에 갔다가 또 고립되면 어쩔 셈이에요?"

"걱정 마세요. 혼자라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저들에게 조금 상처가 될 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혼자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만약, 미궁에서처럼 다음 지역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면? 애초부터 그런 장소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여기가 하층이라고 알고 있어요. 만약 신후 씨의 예상이 맞아 늪지 다음인 제국이 중층이면? 그래서 완전히 공간적으로 단절된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확실히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상인들이 오고가지 않습니까. 완전히 단절된 공간은 아닐 겁니다."

"그건 추측이잖아요! 뭔지 알지 못할 때는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것 몰라요? 가끔씩이지만 신후 씨는 묘하게 무모해요! 평소에는 그렇게 조심하면서!"

'…그거야 확실히 아는 정보 때문이지….'

내가 회귀한 사실을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여기를 안정화 시키려면 적어도 수련자들의 대부분, 그러니까 한바다씨 일행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에는 힘듭니다. 그마저도 약간의 시간은 필요하구요. 설마 이대로 그냥 다 버리고 대부분의 수련자들을 지옥으로 던지자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우리가 빠지고 광산을 다시 빼앗긴다고 해서 여기가 지옥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없더라도 놀 영웅이 나타나려면 10년은 걸린다. 수련자들이 10년 안에 놀 영웅을 막을 수준이 못 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혹시라는 것이 있었다. 저들은 놀 영웅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계승을 통해 강해지기 전까지 놀들을 상대로 최대한 조심해야 했던 기억이 있는 이상 양심에 찔리기는 할 거다.

그러나 예상외의 말이 나왔다.

"상관없어요."

"…네?"

"…언니?"

놀란 표정의 나연. 그러나 나연을 제외한 일행들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바다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우리 일행이 더 중요해요. 그리고 저희가 해낸 일들도 많으니 바다 정도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한바다 씨가 나온 이후에 돕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영주 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아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요. 영주라면 충분히 도와줄 거예요."

"…우리가 떠난 다음에 잘도 도와줄…."

"해준 것들이 많으니까요. 신후 씨가 얻은 광산 지분이나, 우리가 지금까지 해준 것만 해도 얼마인데? 결국 다시 광산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 바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결국 지원을 해줄수 밖에 없기는 하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엉망진창인 줄 아시죠?"

그간 노력해 얻은 평판이나 신뢰, 그리고 우리들의 명성 등을 모두 진흙탕에 던져버려서라도 절대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즉, 설령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판명 난다고 해도, 절대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뜻.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중간에 그냥 도망쳐버린다? 아무리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보이는 현시점에서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그냥 도박 수준.

"알아요. 엉망인 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던져서라도 절대 당신과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일행은 하나같이 주하연을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나연만이 어딘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머리가 복잡할 거다.

자신도 떨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를 버리고 싶지도 않을 거다.

내 말을 잘 듣겠다고 했고, 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떨어지자고 말하는데, 일행이 되려 그딴거 상관없으니 떨어지지만 말자고 말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따로 활동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그런 것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반년이면 우리가 고립된 기간에 가깝다. 그 기간에도 나와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끽해야 달에 한 번. 그랬는데도 멘탈이 흔들렸던 일행인데, 이제는 통째로 반년이다. 그마저도 최소. 그래도 나는 퀘스트 전에는 돌아올 생각이었다.

단호한 주하연의 시선과 내 시선이 부딪쳤다.

아무래도 진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설마 이리 강경하게 나올 줄이야…. 머리가 아플 정도다.

"…7개월 이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따라오셔도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최소화…."

"반년이라더니 이제는 또 7개월요?"

갑자기 주하연이 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평소 이런 적이 없었던 사람인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내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일행이 되려 주하연을 응원하고 있었다.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반응. 나는 표정이 점차 굳어감을 느꼈다. 그런 내 반응에 주하연의 표정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다음 일어날 일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알면서도,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는 듯한 눈빛이 보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후우…. 리더로써 명령하죠. 지금부터 주하연을 서브리더로 임명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7개월간, 파티를 이끌어 제가 하던 일들을 계속하시면 됩니다. 내용은, 대충 아시겠죠."

"신후 씨!"

"주하연 씨.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간 최대한 일행에게 맞춰 민주적인 방향으로 파티를 이끌기는 했지만, 파티 리더는 어디까지나 나다.

싫으면 본인이 나가야만 한다.

이제 탑에서 보낸 기간이 1년을 넘겼고 용병을 비롯해 이곳의 거주민들의 상태를 보면 이 '직위'가 얼마나 중요하고 상하 관계가 엄격한지 알만한 때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어떤 의미에서 지구의 군대와 유사하다. 왜냐면 여기는 군대와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장소니까.

내 첫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

주하연의 표정이 천천히 절망에 물들어갔다.

이렇게 말한 이상,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처음, 처음이잖아요… 이렇게 나오는 거…. 그 명령이… 저희와 헤어지는, 그런 거라고요?"

"서브 리더 주하연. 대답, 안 하실 겁니까?"

"너무해요. 당신, 너무, 너무 잔인한 거 알아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눈으로 엄중히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리더. 뜻대로… 하세요."

"언니!"

"…서윤아, 나서면 안 돼."

남은주 또한 침통한 얼굴로 그런 나서윤을 막아섰다. 그녀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연은 입술만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형, 왜… 대체 왜… 형…."

하유진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럼, 말했다시피 한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알려드리죠. 서브 리더는 잠시."

"…네."

본래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음에 올라올 한바다를 비롯한 수련자들을 핑계로 대고, 홀로 살아나올 수 있다는 것만 가볍게 증명한다면 조금 어렵더라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선한 편인 이들이니까.

그러나 설마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지리멸렬하게 다 버리고 그냥 떠나자고?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만 넘기면 사실상 이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면 오히려 득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중요한 순간에는 헤어짐을 납득 했었고, 성으로 돌아온 뒤로도 종종 따로 행동하고는 했으니까.

그러니 내 이 선택이 왜 필요하고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헤어져야만 하는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 주하연이라면, 납득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지금 이 상황을 잘 넘겨야만 했다.

게다가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좋지 못하다.

지금 분위기는, 정말 최악이니까.

특히 나올 때 보였던 나서윤이나 하유진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고 남은주 또한 겨우 나서윤을 말렸을 뿐 자신 또한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과거 구석에 몰렸을 때나 보았던 표정이었다.

주하연을 이끌고 내 방으로 들어왔지만 주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

나는 먼저 사과를 전했다.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완곡한 표현.

그러나 주하연은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연 씨.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꼭 필요한…."

"으흑…."

"…하연 씨?"

"읍…."

나는 급하게 몸을 숙여 주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본 주하연의 얼굴은,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주하연의 얼굴은,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져 일그러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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