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여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 신관인 이상 어지간해서는 어기지 않는다. 페널티가 있기 때문. 신성력이 떨어지거나 때로는 신관의 자격을 박탈하기도 한다. 물론 일정 수준이 되지 않는 신관은 그러한 맹세도 쉽게 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페널티가 오게 만들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신성 계약서를 만들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나는 그런 수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 하지만 동시에 충분한 효과를 지닌 말이기도 하다.
왜냐면, 신전 자체에서 처벌을 하기 때문.
신관에서 이 맹세를 공증받고도 어길시에는 이단심문관이 파견되기 때문. 확인 결과 실제로 어겼음이 판명된다면 파문이나 징벌을 받으며, 내가 원한다고 말했던 귀족이 되는 길은 사실상 막힌다고 봐야 한다.
아예 파문이 된다면 가능성이 0인 것은 아니지만, 신관이 여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어겼다는 전적이 남은 이상, 귀족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예가 땅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니까. 귀족이 되기에는 명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마 못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를 차지해도 그 서약서가 발견되는 시점에서 끝이라고 봐야 한다.
내 마력의 흔적을 남기고 받는 즉시 안전한 장소로 보낸다면 내가 자신을 뒤통수치지 못한다는 확신은 줄 수 있을 거다.
"…그 말은…."
"예. 신전으로 가서 서약서를 작성하죠. 저는 절대 이 영지를 탐낼 생각이 없습니다."
서약서 내용이 웃기긴 할 거다. 저는 세력을 이루고도 티드린드 영지를 차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라니 얼마나 우스운가?
물론 서약서에 먼저 적대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들어가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을 터.
결국 내 목적은 이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까지 하겠다면 못 믿을 것은 없지."
토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네. 광산 계약. 하도록 하지."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목표로 했던 것들을 모두 달성했다.
하층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모두 얻었다는 느낌.
이제 남은 것은 놀들을 견제하고 광산을 확보할 교두보를 만드는 것과 세력이 약해진 흑색 놀들을 멸망시키는 것 정도였다.
아마 우리가 흑색 놀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는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아니, 어쩌면 년 단위의 시간이 흘러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세력이 가장 약한 우리가 성을 버리고 다수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부터가 위기를 초래하는 행동이다. 현재 인간이 전력을 다해 흑색 놀 지역으로 진격하면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고 이기기는 할 거다. 그나마도 흑색 놀의 세력이 아작난 덕분에 가능한 일.
그러고 나면? 티드린드 영지는 멸망이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우리가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키면 다른 놀들이 구경만 할 리가 없었다.
비어버린 성을 공격하던가, 되려 우리를 먼저 쳐서 다 죽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해야할 일들은 우선 세력을 정비하고 저들을 자극하지 않는 규모의 병력으로 흑색 놀의 세력만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 우리 파티와 용병들. 그리고 일부 정예 병사들이 뒤를 받쳐줄 터였다.
그래도 한계가 있는 것이, 일정 수준 이상의 부락은 우리가 먼저 치기도 힘들다.
특히 웅크린 흑색 놀 부족은 먼저 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되려 우리가 위험하다.
우리 여섯에 다른 용병과 병사들이 합쳐진다고 한들, 그들이 우리처럼 강하지는 못하다.
현재 우리 파티가 안전하게 기습 가능한 규모는 3천 미만의 존재들. 거기에 용병과 병사들이 뒤를 받쳐준다고 한들, 4천이 넘어가면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3천에게 덤벼들어도 용병이나 정예 병사들이 제법 많이 죽을 터였다. 우리야 피해가 없겠지만, 저들은 아니니까.
결국, 인간 측 세력의 힘만으로는 동귀어진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약해질대로 약해진 흑색 놀 부족 하나 잡기도 힘들다는 거다.
나는 토펜에게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고, 우리 파티가 가능한 수준의 전투를 알려준 뒤, 영지의 힘을 자세히 들었다.
토펜은 결국 놀 영웅을 살려두게 된다면 영지에 미래는 없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 기세였지만, 나는 그런 영주를 말렸다.
"아직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길게 보셔야 합니다."
막막한 표정의 영주였지만, 그래도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줄기 희망을 얻은 듯했다.
"결국, 다른 부족들을 이용하는 것은 같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제 용병 단들이 나타나기까지는 적당히 견제를 하는 것이 낫죠."
"…더 빨리는 안 되는 건가?"
"완전히 제 용병 단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정말 아쉽군. 그들만 있었다면…."
당장은 부족할지 몰라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거였다.
솔직히 흑색 놀을 괴롭히지 않더라도 놀 영웅이 등장하기 전에 놀들을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지만, 밝혀 봐야 믿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토펜의 생각에 맞춰 흑색 놀을 괴롭힐 방법과 놀들이 날뛰게 만들 구상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서로가 만족할만한 이야기가 오갔고, 계획의 초안이 완성됨과 동시에 휘하의 지휘관을 찾아가 더 보안할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하층에서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해야 할 일들은 사실상 거의 끝난 상태.
게다가 나는 성장이 정체된 상황이다.
근력이야 보정 덕분에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었지만, 성장시킬 스킬이라고는 웨폰 마스터리 말고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그만큼 조급함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급하기만 해서는 될 것도 안 된다. 나는 하나씩,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토펜과 신전으로 방문, 서약서를 작성했고, 조사대가 돌아와 놀들의 삼파전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나? 땅이 붉었을 정도라고 들었다. 조사대원들은 하나같이 질린 얼굴들이었다.
나는 일행에게 내가 얻은, 토벤과 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수련자들이 하층에 진입하면 우리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좋은 생각이에요. 세력이 있으면… 좋기는 하죠."
"…우리끼리 다니는 것이 좋은데…."
"세력이 된다고 해도 우리 파티는 사실상 고정일 거야. 뭐 몇 명 더 영입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야…."
나서윤은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확실히 여섯이라는 숫자는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기는 했으니까.
우리의 질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수가 많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동시에 우리들이 더 안전해지기도 하고.
"그러면 신후 오빠가 단체의 리더가 되는 건가요?"
"…아마도?"
남은주는 괜찮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제는 자신이 밀릴 걱정은 없다는, 확신과 자신감까지 얻은 듯했다.
하기야 자신이 얻은 것이 얼마인데.
게다가 과거 생존 본능이라는 스킬을 가졌을 정도로 안전에 예민한 애다. 수가 늘어나는 것을 가장 환영하는 쪽이라는 뜻.
나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를 키우면서 힘이 약한 이들도 차별 없이 받을 계획이기에 되려 반기는 눈치다.
힘이 약한 이들은 발언권이 없다시피 할 예정이라 상관없었다. 어차피 집단을 움직이는 이는 나를 비롯해 선택받은 몇몇이 할 예정이다.
집단의 이미지를 위해서 실력이 좀 부족한 이들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들이야 모르지만 중층에서 있을 다른 국가의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이쪽이 뭉칠 필요가 있었다.
숫자 자체도 집단의 힘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니까. …결국 거인과 제대로 싸우는 것은 그런 이들이 아닌, 진짜 실력자들일 테니, 궁극적으로는 그냥 그런 이들일 뿐이지만. 그래도 지원 정도는 할 테니 아주 무쓸모는 아니겠지만.
그렇기에 내 계획은 일행의 동의 아래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약간의 준비를 마친 시점부터 우리는 용병과 병사를 지원받아 흑색 놀들을 조금씩 습격하기 시작했다.
26구역을 비롯해 27구역까지는 어렵지 않게 청소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참가를 주저했던 용병들도 계속된 성과와 보수에 어느새 하나둘 더 참가하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일대의 모든 용병이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어 마을 주변의 안전을 위한 정찰 임무를 자경단이 해야 할 정도였다 .
그래도 덕분에 흑색 놀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세력이 반 토막인 상황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집요하게 흑색 놀을 괴롭히는데 쏟아부었고, 덕분에 흑색 놀들이 서서히 위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우리가 탑에 온 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탑에 들어온 시점으로 1년이 지났기에 상태 창 상에 보이는 나이가 한 살 늘어났다.
어떤 의미로는 탑에서의 첫 생일이라고 할까? …그렇게 되면 모든 수련자의 생일이 같아지는 기적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만.
나서윤은 드디어 17살이라며 이제 자신은 고등학생이고 성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내게 어필했다.
"3년이나 남았다만?"
"너무해!"
고등학교에 입학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고등학생이냐.
게다가 내 한 달간의 현자 모드까지 풀려버렸다.
덕분에 주하연은 토벌 중임에도 불구하고 밤에 가끔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용병과 병사들의 묘한 눈초리나 나서윤의 울 것 같은 표정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무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28구역에 해당했어야 할 대지는 아무래도 내부의 세력이 위로 도망쳤는지 한 단계 강등된 상태였다.
내부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흑색 놀 구역이 분명한 지역에 이상한 세력이 발견되었다.
"…저거 미친개들 아냐?"
"…여기 검은 애들 구역인데 왜 빨간 놈들이…."
흑색 놀 구역에서 적색 놀들이 발견되었던 것.
아무래도 황금 놀이 위축되자 곧바로 갈색 놀들이 침범을 시작했던 것처럼 적색 놀들도 흑색 놀들을 노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로써는 기쁜 상황. 토펜과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도 등장했던 상황이다.
나는 즉시 상황을 토펜에게 전하고는 하유진과 함께 일대의 정보를 쓸어모았다.
두 달 가까운 기간을 정보를 모으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사용했다.
그만큼 정보가 중요했던 것.
덕분에 상당히 괜찮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갈색과 붉은색이 충돌을 했다고?"
"네. 안 그래도 세력이 줄어들어 밀리던 흑색 놀들이 저희 때문에 후방까지 급습당하자 더 움츠러든 모양입니다. 적색 놈들은 그런 상황을 파악하는 즉시 밀어버린 것 같더군요."
"…그놈들이 가장 미치기는 미쳤지."
모든 놀들 중에서 가장 흉포한 이들은 붉은색 놀이다.
황금 놀들의 기행 이전에 티드린드 성에서 가장 많은 자경단과 병사를 지원했던 마을은 체겐 마을로, 적색 놀의 영역과 인접한 마을이다. 그러나 그 창끝이 현재 흑색 놀을 노리다가 이제는 갈색 놀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본래 흑색 놀과 황금 놀의 영역이었던 곳의 대부분을 각각 적색과 갈색이 차지한 덕분에 서로의 영역이 맞닿고 말았다.
"황금 놀들과 흑색 놀들은 어떻게 되었나?"
"황금 놀들은 사실상 전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역이 정말 최소한만 남았더군요. 제가 말씀드렸던 성지 기억하십니까?"
"기억난다네."
"그곳마저 빼앗긴 채로 더 위로 도망쳤더군요. 더 위로 가면 사막인데…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는 세력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손을 쓰기도 전에 황금 놀들이 멸절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검은 놈들은?"
"그나마 세력을 온존한 상태입니다. 깃발을 가진 가장 큰 부족(웅크린 흑색 놀 부족)을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 아예 영역 대부분을 스스로 포기한 듯하더군요."
자신들이 감당 가능한 최소한의 영역만을 지켰다.
딱 고사는 면하는 수준. 그렇지만 놀 영웅을 생각하면 아마 먼 미래를 계획하고 있겠지.
"…노리고 갈색과 적색을 부딪치게 만든 건가?"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영악한 놈들… 이렇게 된다면…."
더는 흑색 놀을 치기가 힘들어진다.
영주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다.
놀 영웅이 탄생해 저들이 연합하면 정말 끝장이니까.
나는 그런 영주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사방이 혼란스럽다 보니 저들끼리 싸우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네가 한 짓이라던데?"
맞는 말이다. 과거 흑색과 황금을 엿먹였던 것처럼 갈색과 적색도 괴롭히고는 있으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워낙 붉은 놈들이 날뛰는 덕분에…."
단지 그때는 가장 깊숙했던 29구역에서 한 덕분에 효과가 컸지만, 지금은 약한 구역에 가깝다 보니 효과가 그리 크지는 못했다.
하지만 워낙 흉포한 붉은 놀들인 덕분에 갈색과의 전투는 점점 커지는 상태다.
애초에 오랜 시간 붉은 놀과 싸워오면서 적다히 하는 방법을 깨우친 흑색이나 회색도 아니고, 서로 두 영역이나 떨어져 지낸 덕분에 서로가 생소했기 때문인지 정말 죽어라 싸워대고 있었다.
이렇게 세력이 깎아져 나간다면 우리야 좋다.
"…그래도 저들이 저렇게 싸워서 세력이 약화된다면 우리야 좋긴 하다만… 언제까지 싸울지는…."
아마 영원히 저리 싸우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리 붉은 놈들이 미쳤다고는 해도, 멸족을 각오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전쟁을 더 확대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수를 좀 쓰려고 합니다."
"…무슨 짓을 할 셈인가?"
내가 이룬 성과들이 대단하기 때문일까. 토펜은 또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며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광산도 미리미리 손에 넣어 둬야지요. 영지 자체의 힘이 커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흑색 놀은 완전히 멸절시켜야 하니까요."
"…그렇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광산은 확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회색 놀들은… 자네 설마?"
히죽.
그렇다.
유일하게 멀쩡한 회색 놀들.
나는 회색 놀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