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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96화 (96/317)

# 96

보답

습격이 끝난 이후 우리는 잠시 후퇴하여 정비할 시간을 가졌다.

압도적인 승리. 감정을 추스른 일행.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나서윤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땠어요, 오빠?"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주 잘했어. 화계통을 금지했는데도 깔끔했다. 마법뿐만이 아니라 검술도 소홀히 하지 않았더라."

"…검술을 못 하면 오빠랑 같이 앞에 설 수 없으니까요."

헤헤거리는 나서윤. 전투 직후의 담담했던 표정과는 달리, 내 칭찬 한 번에 그 표정이 무너졌다.

"형, 저도, 저도요!"

"그래, 정말 잘했어. 은주를 잘 보조하더구나."

나는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정찰대도 별로 무섭지 않아요. 어떻게 할지는 정하셨나요?"

자신 있어 하는 주하연의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탈출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황금 놀의 세력은 반 토막이 났고, 사기도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나는 접경 지역을 바라보며 말했다.

"흑색 놀들과 사이도 아마 역대 최악의 수준일 겁니다. 우리를 잡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들이 뒤쪽을 쳐 버리겠죠."

다섯 달간 이쪽에 집중한 황금 놀 부족의 세력은 흑색 놀과 함께 크게 깎여 나갔다.

그나마 흑색 놀은 세력이 축소되더라도 놀 영웅이 탄생하면 단숨에 다섯 놀들 중 중심으로 떠오를 테지만, 황금 놀은 이제 사실상 세력이 가장 약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갈색 놀들과의 접경 지역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 예상에 분명 상당히 많은 영역을 빼앗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했을 테니까.

나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약 올려주죠. 우리는 되도록이면 당당하게 나설 계획입니다. 보이는 족족 우리가 먼저 칩니다. 위치를 대놓고 알려주는 셈이죠."

"……."

평소 이런 의견을 질색하던 주하연이지만, 지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천 단위 집단을 기습으로 쓸어버렸다.

그것도 여유롭게. 사실 이 두 배쯤 되어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일행은 이제 다수의 놀들이 몰려온다고 한들, 충분히 자신들의 몸을 건사할 수준은 되었다.

좀 많거나 힘들다 싶으면 그냥 도망치면 된다는 것.

좀 많다 싶은 병력이 빠지면 흑색 놀들이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니 아주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우리를 고립시켰던 놈들을 당당하게 뚫고 복귀할 수 있다는 것.

상대가 몬스터들이라고는 해도, 분명 스스로가 만족스럽고 짜릿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조금은 성취감을 맛볼 필요가 있었다. 이 성취감은 훗날 이들의 또 다른 동기가 될 테니까.

뭐, 덤으로 놀들에게 엿도 먹여 주고, 세력도 깎으면 우리에게는 이득이다.

가는 길에 황금 놀 부족을 반쯤 멸망시키고 흑색 놀도 어마어마하게 병력이 깎이면 단숨에 명성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증명 과정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보다 더 손쉬운 방법은 없을 터였다.

일행은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들에게 자신감도 붙었고, 상황도 유리하니 거부하는 인원은 없었다.

날이 밝고 난 이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걸음으로 황금 놀들의 영역을 활보했다.

지나가던 정찰대들은 우리의 모습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고, 일부는 불에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대부분은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도망쳐버렸다.

나는 그들을 잡지 않았다.

우르르 몰고 온다면 우리 대신 흑색 놀들이 날뛰어 줄 터. 올 수 있는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에 온 놀 들은 2천에 가까운 수였다.

"와, 많다."

하유진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의 전투를 통해, 이 수라면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단번에 그런 계산을 하는 것을 보면, 8살이라도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실력을 판단하는 눈이 형편없네요. 어제 그리 당하고 두 배에 불과한 숫자로 오다니…."

주하연또한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2천이 적은 수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말도 되지 않게 강해졌을 뿐.

놀들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힘차게 짖어대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의 천인장 둘. 나는 일행에게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냥 말 한마디만 했을 뿐.

"그냥 어제처럼 하세요."

"네네."

주하연은 충분한 여유가 있는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심지어는 나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하기까지. 그렇다고 긴장을 풀었다고 뭐라고 하기에는, 스태프에 모이고 있는 신성력이 적지 않았다.

적당한 긴장과 방심 없는 태도.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은 여유까지. 이마저도 내가 없으면 흔들린다는 약점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들은 놔 줄 생각이 없기에 그런 빈틈마저 나에게는 플러스 요소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놀들을 향해 마주 달려나갔다.

***

전투는 우리의 승리였다. 당연한 귀결. 여유롭게 그들을 패퇴시켰고, 그 주변에서 대놓고 휴식을 취했다.

저 멀리서 우리를 관찰하는 정찰대의 모습이 보였지만,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하유진과 나연이 은신과 정령을 활용해 주변을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

정말 지들이 작살날 각오를 하고 우리에게 달려들면 좋지는 않았으니까.

솔직히 한 5~6천 정도가 우르르 달려들어도 도망칠 자신은 있었지만, 정말 모든 병력을 우리에게 꼬라박는다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세력이 위축되었어도 접경 지역에 있는 놀들은 2~3만에 달하는 수였으니까.

"오빠, 돌아가면 뭐 하실 거에요?"

"글쎄, 일단 좀 쉬고 싶다. 침대가 그립네. 너는 어때?"

"저는, 좀 씻고 싶달까…."

나서윤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기야 저쪽에서 마법을 이용해 물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깨끗하게 씻기에는 물이 상당히 모자랐다.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가볍게 세수를 하는 것이 최대의 사치에 가까웠으니까.

아무리 수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나서윤이라도 대량의 물은 만들기 힘들었으니까. 마력에 한계가 있었다. 모두가 씻을 수 있는 물을 만들려면 며칠에 걸쳐 수계 마법만 사용해야 하고, 그러고 나면 또 며칠은 쉬어야 한다. 효율이 별로 좋지 못했다. 특히 사막이나 다름없는, 사막화가 거의 진행된 환경에서는 더욱더.

아마 여성 진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불편하고 불쾌했겠지.

나서윤의 그런 말에 일행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씻고 싶어요…."

어린아이는 씻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유진도 어지간히 씻지 못하니 찝찝했는지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의견을 말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긴 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행은 아마 서두르고 싶기도 할 테지만, 나는 천천히 황금 놀들의 영역을 돌파했다.

저녁이 되면 꼬박꼬박 쉬었고, 행군을 급하게 하지도 않았다.

멀리서 우리를 따라오는 놀들에게 보여주듯 행동했다. 그러자 놀들의 계획이 바뀌었다.

"컹컹컹!"

"파티장 님."

"그래. 으휴. 또 오는구만. 한… 삼백인가?"

멀리서 짖어대는 놀들. 그들은 우리의 체력을 빼앗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는지 밤에는 멀리서 짖어대고 때때로 우리를 습격해왔다.

밤에 습격을 해온다고 해도, 이전처럼 천단위가 아니라 삼백 이하의 놀들에 불과했고, 우리의 체력을 빼앗는 것이 목적일 뿐인 자살 특공대에 가까웠다.

"오늘은 달려들려나?"

나는 잠든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이런 일들이 잦았다. 그러자 예민한 일행들은 곧바로 잠에서 깨고는 했지만, 나는 별거 아니니 그냥 쉬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필요한 상황에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일행은 처음 저들의 저런 행동에 무척이나 어색하고 짜증 내는 듯했지만, 이틀쯤 지나자 이제는 그냥 아무리 짖어도 잘 자는 경지에 다다랐다. 물론, 일정 이상의 소음이 된다면 다시금 깨기는 하지만. 필요할 때는 상황에 맞춰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기에 놀들에게 조금 고맙기까지 했다.

어차피 300단위의 자살 특공대 놀들 따위는 나와 남은주 둘이서 얼마든치 처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혼자서도 가능했는데, 남은주까지 있으면 뭐…. 최근 저렇게 짖어만 대다가 가끔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이들은 대부분 불침번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와 남은주의 불침번 시간이 끝날 때까지 놀들의 습격은 없었다. 여전히 짖어대기만 할 뿐.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듣기로는 끝까지 습격하지 않았다고.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체력이 소진되긴 했기에 좀 쌓였다 싶으면 대낮에 쉬어버렸다. 덕분에 이동 속도는 굼벵이가 기어가듯 느려 터졌고, 거의 일주일에 걸쳐 절반에 가까운 거리밖에 이동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여유롭게 이동했다. 이런 행동은 대놓고 황금 놀들을 능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황금 놀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멸족을 각오하고 우리에게 달려들거나, 그냥 우리를 포기하던가.

'포기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우리에게 분노하기는 하겠지만,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역시 포기한 걸까요?"

주하연이 조심스럽게 내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느덧 인간의 영역에 멀지 않은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우리가 있는 구역은 27구역. 곧 26구역이 도착하면 사실상 놀 영역의 끝에 가까운 장소다.

구역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본다면 본대는 아주 먼 곳에 있다고 봐야 할 터였다.

"뭐, 그렇겠죠.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걸고 우리들을 쫓을 이유는…."

[28구역이 진입하였습니다.]

…?

"…왜?"

갑작스러운 구역의 변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놀들이, 쫓아오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대규모가.

역시.

"…아무래도, 저들은 우리가 놀 영웅의 심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요?"

그렇다. 저들은 흑색 놀에서 영웅 후보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계승이 자신들 쪽에서 일어나지 않자, 계승을 시킬 수 있는 영웅의 심장을 우리가 그대로 소유한 채 도망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기야 놀 영웅이 탄생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린다. 우리 때문에 혼이 조금 손상까지 되었으니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일. 흑색 놀은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길 터였다.

그렇지 않더라면 다른 색의 놀들이 습격해 자리를 빼앗으려들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그런 경우라면… 확실히 우리를 포기하지 못할 만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다시금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29구역에 진입하였습니다.]

"…전투 준비를 하죠."

일단 규모를 봐야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그냥 튄다. 하지만 상대할 만하다 싶으면?

떠나기 전, 마지막 깽판을 치고 갈 기회가 될 터였다.

****

우리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했다.

본래라면 26구역과 27구역의 경계쯤 되는 위치. 지대도 높고 후퇴도 나름 용이한 편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먼지구름이 놀들의 접근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숫자가 많다.

"…만은 그냥 넘겠는데?"

설마 진짜 접경 지역을 버렸나?

나는 마력을 이용해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보이는 먼지구름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황금 가죽의 놀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진짜 버린 건가? 진짜로 우리가 놀 영웅의 심장을 갖고 튄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저 멀리서 가라앉아야 할 먼지구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미친."

황금 놀들의 대대적인 이동. 그 뒤를 흑색 놀들이 빠르게 쫓고 있었다.

낙오되는 황금 놀들은 그런 흑색 놀들에 의해 짓밟히고 죽어가고 있었다.

"…이건 뭔 상황이죠?"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의 주하연이 보였다.

"…튀죠."

저건 안 된다. 아니, 싸울 필요가 없었다. 저건 싸우지 않고 그냥 두기만 해도 된다. 우리가 힘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치면…."

그렇다. 곧 원래대로라면 26구역에 해당하는 땅에 도착한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 셈. 그리된다면 마을에 수만에 달하는 놀들을 달고 그대로 돌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몹 몰이로 팀킬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딴 짓을 저질렀다간 명성이 아니라 대대적인 악명을 떨치게 될 터였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방향을 바꿉니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마을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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