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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94화 (94/317)

# 94

인내

최대 2년. 내 말에 일행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2년은 좀 과장이기는 하다. 아무리 생존이 우선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2년씩이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지간히 일이 꼬인다고 하더라도 2년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일행에게 조금 과장을 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 상황을 조금 더 강조하고 싶었고, 조금 더 필사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현재 최선두지만, 그래 봐야 탑에 온 지 반년도 안 된 애송이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2년을 여기에 묶인다? 우리는 더이상 선두가 될 수 없었다.

기껏 강해졌는데 이곳에 묶여서 레벨업도 멈추고 하층에서 더는 올라가지 못하면 지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다.

이들의 강함은 분명 하층의 수준을 뛰어넘기는 했다. 하지만 선두로써 지금까지 자원과 기회를 독점했었는데, 더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 더는 층을 올라가지 못한다면?

성장의 정체가 찾아온다. 당장에야 소화할 것들이 남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신체 능력의 상승은 멈출 테고, 이들의 신체 능력은 중층에서는 흔한, 그냥 그런 수준에 불과하다.

아주 부족하지는 않더라도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못하다는 뜻.

일행은 이런 객관적인 정보는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자신들이 강해진 이유가 최선두로써 내 도움을 받아 수많은 기회를 독점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 이점을 잃어버린다면?

온갖 더러운 꼴을 봐 온 이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약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공포를 불러올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힘이 부족해서 설움을 당한 적이 거의 없었던 이들이기에 더더욱. 이제껏 힘이 부족하면 내가 나섰고, 어떻게든 해결해 왔으니까.

"2, 2년씩이나요?"

"최악이긴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그치만 저희 식량이…."

"만약을 대비해서 엄청나게 챙겨 왔기 때문에 어떻게 1년 가까이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식량을 까먹지만 말고 꾸준한 사냥을 하면 식량 때문에 2년을 못 버틸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 식량이 부족하면… 놀이라도 잡아먹는 수밖에요."

놀을, 몬스터를 잡아먹는다.

생긴 것은 일단 개, 늑대, 하이에나 짬뽕처럼 생겼다. 이족보행과 사족보행을 같이 하기는 하지만 짐승처럼은 생겼다는 뜻.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를 잡아먹는다는 말에 그 광경을 상상했는지 일행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북함.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몬스터중에는 식량으로 쓸 수 있는 존재들은 제법 많았다. 단지,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 뿐.

놀, 오크, 오거 정도는 먹을 수 있으며, 트롤은 아예 그 피를 이용해 포션을 만들기도 하는 만큼 먹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단, 트롤은 가공이 필요했다.

제국의 소수민족 중 일부는 자신이 쓰러뜨린 강자의 육체를 먹으면 그 힘을 얻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강한 오크나 오거 등을 사냥할 경우에는 그 시체의 일부를 꼭 챙겼다.

"몬, 몬스터를…요?"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하연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래도 나는 단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들은, 더 절박해야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정도로 시간을 잡고 있었다.

딱 두 배로 기간을 뻥튀기한 것.

애초에 황금 놀 쪽의 중심 부족이 흑색 놀 진영과의 접경지에 등장한 이상, 흑색 놀들도 중심 부족이나 그에 준하는 다수의 부족이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두 부족의 전면전이 될 수 있었고, 부딪치는 순간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은 오래갈 수가 없다. 이들의 전투는 정말 전면전.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기 때문이다. 사냥을 가야 할 놀들도 점점 전쟁에 투입이 될 테고, 식량이 부족해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하면 개체 수 감소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흑색 놀 뒤에는 적색 놀 부족이, 황금 놀 부족 뒤에는 갈색 놀 부족이 버티고 있다.

이들 네 부족과 마지막 한 부족인 회색 놀 부족. 이렇게 다섯 놀 부족은 서로의 영역의 경계가 맞닿아 있는, 서로 물리고 물린 관계다.

그렇기에 언제까지 싸울 수는 없었고, 일정 시간 동안 싸운 뒤라면 멸족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회를 틈타 흑색 놀 부족 영역으로 넘어가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그 기간을 빠르면 3개월이라고 보았다.

만약 둘이 끝까지 물러나지 못해 서로 멸족을 각오하고 싸워 준다면? 나야 더 좋다. 시간은 조금 더 손해를 보긴 하겠지만, 그만큼 더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일단은 서로를 이간질하고 일행이 성장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이간질을 시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한쪽은 성지가 파괴되어 놀 영웅을 계승할 기회를 잃었고, 다른 한쪽은 놀 영웅이 될 수 있는 후계자가 생겼다. 어쩌면 진짜 끝까지 싸울지도 모른다.'

잘하면 진짜 서로가 멸족을 각오하고 싸울지도 모르니까.

황금 놀 부족은 우리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있었고, 흑색 놀 부족은 영웅 후보가 생긴 만큼 저쪽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달려든다고 느낀다면,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다.

뭐, 흑색 놀 쪽에서 놀 영웅 후계자가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설마 어디 구석께서 혼자 조용히 수련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부족이 합심해 키워줬으면 키워줬겠지.

그렇게 된다면… 여기서 버티는 것이 어쩌면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 놀들은 우리에게 인벤토리나 미궁 파편이 있는지 모른다. 지능이 있는 놈들인 만큼 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괜찮아. 할 수 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여러 경우를 따지는 동안에도 일행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나는 우선 30구역으로 넘어가 새로운 거점을 만들어야 필요를 느꼈다.

중심 부족이 있는 곳조차 29구역이다. 미래에 30구역이 된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의 규모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놀 영웅이 탄생해 다섯 부족이 연합한, 그런 상황에서 놀 영웅이 거했던 장소니 오죽할까. 그런 만큼 현시점에서 30구역으로 판정받는 지역이라면….

한 곳,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지만, 짐작 가는 장소가 있었다. 정확히 몰라도 상관은 없긴 하다. 방향만 알면 되니까.

"…버티는 것 말고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 있습니까?"

나는 일부로 일행을 향해 물었다.

일행은 침묵했다.

'조금 몰렸군.'

몬스터를 먹는다는 말과 우리가 고립된 상황에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별로 좋지 않은 습관. 앞으로 더 다양한 경험을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좀 나아질 테니까.

"그렇다면 이동하도록 하죠. 저들을 피해서, 우리가 버티고 성장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겠습니다."

"…성장이요?"

"하연 씨도, 은주도, 서윤이도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면, 틈을 봐서 더 일찍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 성장 성과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작은 희망.

내 말에 일행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다. 이들은 아직 더 강해질 여지가 있는 거였다. 몬스터를 먹는다는 말과 상황에 흔들려 짧은 시간 만에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듯했다.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생각해 냈겠지.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면 뭐… 서로 싸우느냐고 약해진 놀들을 역으로 죽이고 여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꿈같은 말. 하지만 가능성이 0은 아니다. 그들은 계승을 함으로써 엄청나게 강해졌다. 그 힘의 끝을 아직 알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 힘을 준 이들은 놀 영웅마저 죽인 이들이다.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그렇네요. 맞아요. 더 강해진다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도 있죠."

주하연의 어색한 말. 자신이 정신적으로 몰렸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아챈 듯싶었다.

"그렇다면 버티는 것으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일행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30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추적은 없었다. 놀들은 우리가 이쪽으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겠지. 이 위로는 자신들에게도 위험한 장소니까. 우리가 찾은 30구역은, 한창 사막화가 진행되는 지역이었다.

30구역이라는 판정이 나오는 순간, 일행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이 주둔한, 흑색 놀과의 접경지도 29구역 판정이다.

30구역은 어떤 곳일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9구역과는 완벽하게 다른 환경. 열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30구역의 환경은 29구역과 너무나도 달랐다.

낮과 밤의 일교차는 어마어마했고, 짐승도, 먹을 것도 없었다. 인벤토리 내의 음식이 없었다면 얼마 가지 못해 환경 때문에라도 굶어 죽지 않았을까.

그런 주제에 또 몬스터는 존재했다.

샌드 웜. 그것이 하층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메마른 사막. 소문으로만 들었고 실제로 가보지는 못했던 장소. 이번 회차에 처음 오는 장소에서 우리는 샌드 웜을 만났다.

이 지역을 사막화시키는 주범.

그 몬스터를 상대로 일행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대지에서 아래서부터 우리를 노리는 몬스터는 처음 상대해 보니까.

나의 주도로 우여곡절 끝에 첫 샌드 웜 사냥을 성공한 뒤 우리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맸다.

"벌레라… 놀 대신 먹을 게 생기기는 했군요."

내 말에 여성 진은 헛구역질을 해댔다.

괜찮은 베이스캠프 장소를 선정하고 자리를 잡는 데 다시 닷새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일행은 그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샌드 웜과 싸워야만 했다.

베이스캠프를 정하고 나 없이 일행이 샌드 웜을 쓰러뜨릴 수준이 되자, 나는 일행에게 수련과 경계를 지시한 뒤 나 홀로 놀의 접경 지역을 정찰하겠다 밝혔다.

일행은 크게 반대했다. 홀로 그렇게 다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너무 위험하다고.

나는 괜찮다는 말과 내가 수련을 해 봐야 계승을 받은 셋에 비하면 성장이 명백하게 느려 효율이 떨어지니, 자신이 상황을 살펴야 하는 것이 맞다는 말로 일행을 설득했다. 게다가 나에게는 미궁 파편도 존재한다.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애초에 빠져나가기 위해 버티는 것을 결정했는데, 정보가 없어서 계속 묶여 있는 상황은 어불성설이다.

내 설득에 일행은 정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남은주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제가, 제가 아니라 신후 오빠가 이 힘을 얻었으면…."

그래. 진짜 성기사의 힘만이라도 얻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빠져 나갈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 게릴라 짓을 해도 되었을 테니까.

"그딴 말은 하지 마. 내가 선택한거고, 너에게 필요하니 준 거야.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더 노력해."

"…네, 네… 죄송합니다. 신후 오빠…."

울 것 같은 남은주의 표정. 아니, 그녀는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 지금은 위로할 때가 아니었다.

이내 눈물을 그친 남은주의 표정은 결연해져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노력하는 남은주. 가능성마저 얻었으니 그녀의 실력 향상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행을 베이스캠프에 남겨둔 채 다시금 접경 지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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