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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92화 (92/317)

# 92

고립

놀 영웅의 혼. 그것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이쪽에서는 충분히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방향이 흑색 놀들이 서식하는 지역이었으니까.

아마 영혼이 다음 놀 영웅을 만들 숙주를 찾아서 발각이 된 것은 아닐 거다.

거기서 빙 돌 이유가 없었으니까.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소리.

하지만 그것을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혀, 형이 시키는대로, 일단 가서 확인을 했는데, 무언가 이상했어요. 그, 사람들, 갇혀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전부 찢겨서…."

놀들이 한 짓이라고 한다.

"…확실히, 밖에서 봐도 마을의 상태가 이상했어요. 뭔가 어수선하다고 해야 하나…."

같이 갔던 나서윤의 증언. 그런 상황임에도 마을 안까지 잠입한 하유진의 행동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성지에 무슨 일이 있으면 신호가 가는 모양이에요. 아니면, 정기적으로 정찰이라도 보내던가."

정찰은 없을 거다. 우리가 몇 번 확인을 했었으니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있다는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현재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이 성지의 이상을 알아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성지의 이상을 눈치챈 이상, 주변을 뒤지는 것은 뻔한 순서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29구역에 고립돼버린다.

"…젠장."

일이 조금 꼬였다.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력은 상승했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합을 맞춰 보기는커녕, 자신들의 힘을 제대로 체감도 하지 못하는 상태.

이런 상태로 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설령 충분한 훈련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여섯으로 만 단위 놀과 싸우는 것은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최고의 선택은 도주. 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탈출합니다. 저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일행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챙길 것은 별로 없다. 몽땅 인벤토리에 집어넣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나연은 빠르게 실프를 소환, 우리가 지냈던 흔적을 최대한 지워버렸다.

"최대한 빨리 탈출합니다. 휴식은 거의 없어요. 지치면 다른 팀원에게 의지해서라도 빨리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은 그냥 평범한 놀 부족이 아니다.

가죽 색깔이 금색인 놀들의 중심 부족이며, 그렇다는 것은 타 부족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인다? 도망치는 것이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놀들은 상당히 빠른 편이고, 후각까지 좋다. 후각이야 미리 준비를 해 왔지만, 그 압도적인 숫자로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 일행 전체가 하유진처럼 은신 스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행들은 굳은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덜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여기만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 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주변 부족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하면 대부분이 협조할 거라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루트를 이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선택했다.

흑색 놀과의 접경 지역. 들어올 때도 이용했던 지역이다. 그쪽이 낫다.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은 황금 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흑색 놀과는 되려 사이가 나쁘다. 애초에 모든 놀들은 색깔이 다르면 서로 싸우니까.

인종차별도 아니고.

아무튼, 저쪽을 통해서 나가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일행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방향을 확인한 일행은 곧바로 내 의도를 알아챘다.

"…신후 씨."

"네."

"어째서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시간이 없다면서…."

주하연의 물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네?"

나는 다시 한번 느낌이 좋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마을에 가까운 구역으로 향할수록 부락의 규모가 작아지고 놀들의 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같이 이동 해왔다. 1회차를 모르더라도 그 정도는 안다.

만약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이 자신들 성지의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나도 그냥 평범하게 빠져나갔을 거였다.

들어올 때야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은 조금 들켜도 충분히 감당도 가능하고, 도망만 치면 되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저 놀 부족은 특이해요. 보시다시피, 다른 곳에는 좀처럼 없는 깃발도 갖고 있고, 규모도 무척이나 크죠. 게다가 생각해 보세요. 저희가 힘을 얻은 곳은 봉인된 놀의 성지입니다. 즉, 성지에 가장 가까운 부락이라는 거죠."

나는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주하연은 능력치의 계승 덕분인지 생각보다 잘 따라오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신성력을 이용해 보조하는 것 같았다.

나연과 하유진은 아직 지쳐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이동한다면 아마 금세 지칠 거다. 하지만 나서윤과 남은주가 있는 이상,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만큼, 영향력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부락간 교류를 본 적은 없지만, 놀들은 나름 군대를 이루고, 부락이라는 곳에서 단체 생활을 합니다. 그런 만큼 타 부락과 서로 소통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이어지는 내 설명에 주하연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알겠어요. 무슨 뜻인지. 확실히, 놀 영웅이 없더라도 같은 가죽 색깔을 지닌 놀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아니 그렇겠네요. 기우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네요."

주하연은 혼자 납득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하연은 즉시 뒤로 물러나 다른 일행에게 내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일행은 한층 진지한 표정으로 속도를 올리는 내게 어떻게든 맞춰 오고 있었다.

나는 최선두에서 달리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내달렸다. 그리고 항상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지는 법.

내 불길한 예감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어떻게 앞지른 걸까. 타 부족에서 나온 정찰대로 보이는 놀 무리를 발견했다. 가죽 색깔은 역시 황금색. 아직까지는 황금 놀의 영역이다. 이틀은 더 달려야 흑색 놀과의 접경 지역이 나오는데….

다행히 내가 더 먼저 발견했기에 나는 일행에게 정시 신호를 보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이미 어제 시점부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제 성지에서 돌아오는 사이에 길이 엇갈렸거나, 우리가 베이스캠프로 복귀하고 난 직후쯤에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곤란하네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아무리 일행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한들, 현시점에서 우리 일행들만으로 황금 놀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영웅이 없고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운다고 하더라도 황금색 가죽을 가진 놀의 숫자가 수만 단위일 텐데,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

차라리 내가 힘을 독식했으면 시간이 좀 걸려도 가능은 했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성녀든 뭐든 과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내 현재 무력으로는 턱도 없는 소리다.

보이는 정찰대의 숫자는 200 남짓. 별거 아닌 숫자다. 문제는 저걸 죽여버리고 난 이후다. 싸우는 와중에 다른 정찰대가 가까이 올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한들 언젠가는 들킨다. 그러면 엿 되는 것은 우리다.

죽이고 시체를 인벤토리에 넣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자리가 없었다. 내부는 내가 가져온 여러 물품들과 끝없는 식량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먹어 생긴 빈 공간에는 놀 영웅의 시체가 들어가 있었으니….

식량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이걸로 버텨야 하는 만큼, 하나라도 아껴야 한다.

내가 한참을 생각하고 있자, 일행들의 기색이 좋지 못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놀 정찰대는 백인 장의 지휘 아래 이 일대를 빠르게 수색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뭉쳐있던 두 개의 백인대는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있어서 이번 수색은 피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

나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못하군요. 그러니 그냥 버팁니다. 거리가 제법 되는 만큼 이번에는 저희 쪽을 피해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행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습격합니다. 흩어지기 전에, 모조리 처리하는 것을 우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주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이게 그리 좋은 방법은 못 된다는 것을. 흔적은 분명히 남고, 추적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정찰대를 만날 때마다 웅크린다? 점점 많은 정찰대를 만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치고 나가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일행은 침묵했고, 결국 최종 결정권자인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택지가 그것뿐이었고.

'어제 밤에 출발을 했어야 했나….'

하지만 계승 직후다. 힘든 이들을 이끌고 먼저 탈출해 봐야 중간에 지칠 뿐이다.

여기까지 잠입 하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 직선으로 통과한다면 덜 걸리긴 하겠다만, 그래도 컨디션을 망친 상태로 움직이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잡생각이 흐르는 동안 결국 흩어졌던 두 개의 백인대가 조금씩 뭉치며 다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

후우….

누군가가 내뱉는 한숨 소리가 들린다.

"…이동합니다."

나는 다시금 일행을 이끌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못해 다른 정찰대를 만났고, 나는 사전에 말했던대로 공격을 선택했다.

다행히 백인대 하나 규모. 아무래도 작은 부락에서 나온 것 같았다. 저 정도는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이제 막 멈춘 듯, 곧 흩어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주변을 더 꼼꼼히 확인하려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들만의 조사하는 구역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뭉쳐서 이동 후 일정 지역을 광범위로 수색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마구잡이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까다로웠다.

나는 나연 자매에게 빠르게 명령했다.

"나연아, 서윤아. 최대한 강한 공격으로 부탁해."

"응."

"네."

사전에 말했던 것이 있기에 둘은 망설임 없이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제공격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나와 남은주가 뛰어들어 마무리를 한다.

남은주는 방어에 치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동급의 상대와 비교를 했을 때의 경우다. 나서윤이 후열에 남고 하유진이 보조를 하는 이상 현 상황에서까지 키퍼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신체 능력도 상당히 오른 터라 놀을 상대로 깡패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다.

곧이어 나연 자매의 마법이 놀들 향해 작렬했다.

"카사,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뭐?'

두 개의 불덩이가 놀들을 향해 날아간다.

나연의 카사가 만든 작은 불덩이와 그 불덩이의 두 배는 더 되는 커다란 불덩이가 꼬리를 만들며 허공을 가로지른다.

놀들이 마법을 발견했지만, 이미 늦었다. 애초에 놀들이 마법을 막을 방법도 없었지만.

곧이어.

콰아아아아앙!

상상 이상의 폭발.

놀라긴 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한다.

빠르게 놀들의 진영을 급습했지만, 두 개의 파이어볼에 맞은 놀 백인대는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다.

현장에 도착한 나와 남은주는, 몇몇의 고통에 신음하는 놀들을 봤을 뿐. 제대로 도망칠 수 있는 녀석은 단 한 놈도 없었다.

모두 화염에 타버리고, 가죽이 일그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일부만이 고통에 찬 '끼이잉'거리는 신음과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을 움직여 꿈틀거림으로써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제대로 흩어지지 못한 채 뭉쳐 있던 곳에 제대로 작렬한 마법의 힘이었다.

"이게…."

남은주도 그 위력에 기가 막혔는지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그나마 목숨이 붙어 있는 놀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은 그냥 놔둬도 곧 죽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른다. 이번 폭발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에 이들이 죽기 전에 새로운 정찰대가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남은주도 정신을 차리고 일부 살아 있는 놀을 처리했다.

몇 마리 되지 않았기에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남은 놀들을 처리하고 일행에게 돌아가며 생각했다.

확실히, 강해지긴 강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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