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조사 의뢰
"형! 형! 괜찮아요?"
성녀 후보를 데려오겠다는 이유를 말미암아 하얀빛의 공간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내 곁에서 내 몸을 격하게 흔드는 하유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뭔 일 있어?"
"아니, 형, 몸이…."
하유진은 급하게 내 몸을 살펴보았다. 뭔가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듯했다.
"뭐, 어땠는데?"
"그게, 형이 저기에 손을 올리고 나니까… 몸에서 막 빛이 나고… 그리고는 막 멍하니 서 있고… 그러니까 막, 형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하유진은 뭔가 막막거리며 횡설수설 해댔다.
나는 내 몸을 살펴보았다.
조금 활력이 도는 듯했다. 마력도 조금 증가하고 신체 능력, 특히 성장 보정이 붙은 근력이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 결과 근력이 1 상승해 있었다.
잠시 접촉만으로 이 수준이다. 아니, 나는 제법 시간이 오래되었겠지. 혹시나 싶어 하유진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얼마나 서 있었어?"
"30분, 30분 정도 서 있었어요…."
대충 대화를 한 시간이 그 정도 되니, 시간 흐름이 이상한 곳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지역 주변에는 몬스터가 없는지 30분 동안 아무런 습격이 없었다. 하기야 가까운 부족이 황금 놀의 중심 부족인데 있을 리가.
내가 손을 댄 스태프를 바라보자, 미미하긴 하지만 빛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닿기만 해도 힘이 조금이나마 계승된다. 재능도, 능력도 되지 않는 이들은 버티지 못하겠지만,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수련자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능력치는 잠재력으로, 부족하다면 레벨로 갈 수 있으며 기술은 스킬 슬롯이 차지하게 될 거다.
성기사 스킬 두 개, 성녀 스킬 두 개에 잠재력과 능력치 상승이라면 주하연과 남은주가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다.
특히 재능이 부족했던 남은주라면….
'1군에서 떨어질 일은 없겠군.'
개인적으로 남은주에게 주기 아까운 것은 사실이나, 받을 사람이 없다.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까지 보관도 못 한다. 스킬 만이라면 1회차의 전례가 있으니 가능하겠지만… 봉인지를 유지하던 힘의 계승이 불가능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힘 또한 전설 스킬에 맞먹는 이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버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성녀고 뭐고 그 혼만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나는 분노를 삼키며 하유진에게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여기가, 생각 이상으로 보물이야."
"…네?"
"일단, 돌아가서 설명해 줄게. 시간이 제법 지났어. 다들 걱정할 거다."
"…네 형."
어느새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보통 이 시간이 되면 슬슬 복귀를 시작했었으니, 우리가 늦으면 남은 이들이 혼란에 빠질 터였다. 말도 하지 않고, 정확히는 말할 시간도 없이 이쪽으로 온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거의 4시간 이상이 걸렸다. 당시에는 놀들의 속도에 맞추느라고 오래 걸렸을 뿐, 최고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 반도 안 걸린다.
놀들도 인간을 안전하게 옮기느냐고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일 테지만.
나는 우리의 흔적을 대충 지우고 한동안 천천히 이동하며 흔적을 삭제, 충분히 거리가 떨어지자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유진과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면서 물었다.
"건강한, 그러니까 살 좀 오른 사람은 몇 명 정도 남았어?"
"오늘 데려간 만큼 건강한 사람은 두 명 정도에요."
그렇다면 또 한동안 가지 않을 터다. 아무래도 제법 수가 모인 이후에 가는 모양이니까.
오늘은 다섯 명을 데려갔지만 내 예상상 아마 최소 인원은 네 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결계 내부의 놀 영웅에 박힌 검을 제외하면 밖에서 빛나는 무기가 네 개니까.
틀릴 수도 있기에 하루 이틀정도는 확인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지난 열흘간 아무런 이동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베이스캠프에 돌아오자 주변은 완전히 어둑어둑한 상태였다.
우리가 복귀하자 아니나 다를까 일행들은 한껏 걱정한 표정이었다. 특히 나서윤과 남은주는 아예 반쯤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특이 사항이 발생해서, 확인하다가 그랬습니다. 도저히 전할 시간이 없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시간이 되도 오지를 않고… 서윤이가 갔을 때는 둘 모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정말 급했어요."
나는 내가 급박하게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를 일행에게 설명했다.
"…그런, 그런 용도로 사람을 쓰고 있다고?"
나연은 한껏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그런 목적이었어요… 확실히 살려갈 이유가 있었네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도 알겠고…. 그나저나 놀 영웅이라니…."
나는 뺄 정보들은 적당히 빼고, 알지 못했던 정보는 성녀에게 들은 것처럼 가볍게 꾸몄다.
내가 먹을 생각이었기에 과하게 성녀와 대화한 것이 조금 후회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힘만 받고 끝낼 관계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좋은 기회입니다. 확인 결과 힘을 계승하면 능력치가 오르더군요. 게다가 예상이긴 하지만, 스킬 까지 받을 수 있을 것 습니다."
"…대단하네요. 신후 씨는 어디 다녀오기만 하면 뭐 하나씩은 꼭 들고 와요. 엄청 유능하시네요."
"운이 좋을 뿐이죠. 과찬이십니다."
"…그런 거 안 들고 와도 되니까, 위험한 일에 그만 끼어들었으면 하지만요."
"하, 하하…."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내심 부럽고 짜증 났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마 계승이 끝나고 나면 속마음이 조금 달라질 거다. …아니 주하연이라면 이제 충분하니 그만 위험하게 다니라고 더 잔소리하려나?
질투심을 억누른다. 이것도 다 과정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다. 나 혼자 할 수는 없기에 내 세력을 키우고 나도 강자 수준의 힘을 얻을 생각이었다.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자원은 내사람들에게 나눠 줄 계획이었지. 그런데 그게 다른 방향으로 이뤄졌다.
내가 먹을 예정이었던 힘이 아군에게 넘어갔다. 그것도 훨씬 부풀려진 상태로. 최소 기반이 사실상 완성 직전이라는 뜻. 그것도 고작 한 군데의 힘만을 이용해서. 이러면 제법 많은 기회가 남는다.
그걸 모조리 내가 처먹을 계획이었다.
전직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거야 지금도 관음하고 계실 열세 번째 꽃에게 요구하면 그만이다. 검사 보정이 필요하니까.
그래도 이번 기회가 이리되어 버리니, 시기가 예상보다 무척 빠르다. 이것 하나만큼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일찌감치 나만을 위해 달릴 기회가 마련되었으니까.
'레일. 그래, 나는 지금 레일을 까는 거다.'
나라는 기차가 달릴 레일을.
나는 성녀와의 대화를 마저 말하며 주하연과 남은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번에 엄청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뭐 조금 속이기는 했지만…."
시선을 돌려 슬쩍 일행 전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그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얻을 기회다. 일행은 하나같이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 살아갈 힘을 원한다. 그건 나를 말리는 주하연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각자 동기는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래도 결국 원하는 것은 같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을 일행에게 말했다.
"현재 얻을 수 있는 힘은 셋입니다. 하나는 성녀, 하나는 성기사, 하나는 용사."
"…그렇군요. 혜택은 셋…."
"성녀는 사실상 정해져 있죠. 하연 씨, 저는 당신을 성녀 후보라고 속일 생각입니다."
일행 중 사제는 둘. 나와 주하연이다. 내가 거절당한 이상, 주하연이 받을 수밖에 없다.
주하연은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까지 일행을 챙겨주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힘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명을 들어보면 내가 억지로라도 힘을 얻을 방법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크게 느끼는 듯했다.
"신후 씨는… 정말…."
나는 주하연의 중얼거림을 흘려버리고 다음 나서윤을 바라보았다.
"용사의 힘은, 서윤이, 네가 받을 거다."
"…네? 제가요?"
의아해하는 모습. 나는 1회차의 정보를 마치 성녀의 이야기처럼 꾸며 말했다.
"용사는 마검사였다고 하더라.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뭐, 추정이긴 하지만. 어쨋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아…."
그리고 마지막, 성기사의 힘.
일행은 그것을 당연히 내가 가질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과거 내가 탱커기는 했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더 좋은 길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과거에야 어쩔 수 없었지,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남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기사의 힘은, 은주 네가 계승한다."
"…네?"
남은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제일 낫다는 판단이야. 네 부족한…."
"오빠!"
"신후 씨?"
"형?"
"……."
일행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내가 설마 성기사의 힘까지 포기할 줄은 몰랐던 듯했다.
"…부족한 네 능력치나 스킬들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를 내 후배라고 소개했으니까,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다."
일행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끝맺자, 한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신후 씨."
진지한 표정의 주하연. 그녀는 일행을 대표해 내 앞에 나섰다.
복잡한 표정의 주하연과 그녀보다도 더 복잡한 표정의 남은주.
주하연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걸 왜 은주에게…."
"은주에게 가장 필요한 힘입니다."
"…그럼 신후 씨는요."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충분해요."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얻겠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언제 제가 보상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죠. 튜토리얼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을 하고 보상은 다 비슷하게 받았어요. 던전에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구해 오더니, 전부 일행들에게 투자하고… 미궁에서도 그랬어요. 언제나 제일 앞장서서 위험한 일은 다 했죠. 심지어 장비를 실험하겠다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이 손수 팔목에 수갑을 찼어요. 제일 위험한 곳에서 싸우기에 능력치 하나하나가 소중할 텐데도 말이죠. 그 수갑을 찬 이후에도… 언제나 앞장섰었죠. 그것도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층에 와서도 그래요. 언제나 제일 앞장서서 제일 힘들게 싸우면서… 보상은 일행이랑 다 똑같이 받더니…."
흔들리는 눈동자.
"이번에는 아예 아무것도 받지 않고 다 나눠주겠다고요?"
확실히 틀린 말은 없네.
다행히 챙겨준 것들을 잊지는 않았나 보다.
주하연이, 아니 일행이 보기에도 확실히 내 행동이 이상하긴 했나 보다. 뭐, 확실히 행동 자체는 1회차란 다를 바가 없기는 했다. 아니 그래도 1회차는 제 몫도 못 챙겼었는데, 이번에는 좀 챙겼으니 나아지긴 했네.
그래도 호구스럽다는 것은 똑같다. 대(大)호구가 그냥 호구가 되었을 뿐.
지구에서도 똑같다. 더 잘하고 능력 있는 놈이, 더 공을 세운 사람이 보상을 더 가져간다. 그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도 법도, 질서도 없는 이 탑에서. 그러나 이제껏 일행은 그것에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니까.
하지만 지금에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저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뜻일 거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완벽한 확신이 든다.
물론, 어쩔 수는 없었다. 내 목표가 목표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러니 내게는 당연한, 그리해야만 하는 행동들이다. 계산도 충분히 했고. 하지만 일행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듯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은주에게 가장 필요한 힘입니다. 그래서 그럴 뿐, 제게 필요한 힘이 등장하면 말려도 챙길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치만!"
"…그건 따로 이야기 하도록하죠. 은주가 듣고 있습니다."
주하연은 아차 한 표정이 되었다. 남은주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저리 격렬하게 반대하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남은주는 기분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기야, 자기가 보기에도 내 결정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욕심은 날 거다.
"…미안. 은주야. 너무 흥분해서… 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어."
"아니에요, 언니. 솔직히… 저도 이해가 안 되요. 신후 오빠. 그거…."
"네가 받아야 돼. 나는 그렇게 판단했어."
"…하지만 성기사면 오빠가 더 어울리잖아요… 저는 그냥 전사고… 오빠는 사제인 데다 그, 탱커형 히든 클래스이기까지 한데…."
"그거 얻으면 마력이 신성력으로 치환된다. 그러면 내 역할상 전위에 서기가 애매해져. 우리 파티의 공격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녀에게 들은 성기사의 역할에 더 어울리는 것은 후열을 지키는 너라고 본다."
나는 한층 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퍼주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냥 좀 받으면 안 되냐?
안 그래도 배 아픈데, 주기 위해서 설득까지 해야 한다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저가 갖겠다고 서로를 헐뜯지 않는 것 하나는 좋네.
일행은 하나같이 불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하연이 나선 만큼, 더는 누구도 발언하지 않았다. 남은주가 앞에 있는 상황에, 할 말이 아니기도 했고.
나는 일행에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틀 정도는 놀들의 동태를 살필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이만 다들 가서 쉬라고 명령했다.
일행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주하연이 내게 다가왔다.
"얘기 좀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