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조사 의뢰
1회차에서는 아무래도 이 거지 같은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놀 영웅이 그대로 부활한 모양인데, 이미 들킨 이상 끝이다. 일이 쉽게 풀렸다.
게다가 어떻게 찾을지 막막했던 전설 장비, 정확히는 전설 스킬들이 어서 가져가시라고 눈앞에 곱게 쌓여 있었다.
정말, 정말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였다.
이 스킬들만 손에 넣는다면, 현시점에서도 최고나 다름없는 내 무력이 더더욱 발전한다. 게다가 그냥 스킬만 주는 것이 아니다.
이 힘들. 봉인지 유지를 위해 남아있는 이 힘들마저 흡수할 수 있다면….
'랭커.'
꿈이 아니다.
랭커,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이쪽 세력을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고, 후에 찾아올 한국 쪽 수련자들을 내 아래 넣는 것이 무척이나 수월해지는 셈.
그렇게 된다면 중층에서 더더욱 커다란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랭커 후보들을 견제하고 잘만 하면 그들마저 내 아래 세력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과거 1회차에서,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지구를 버린 전적이 있으니 마음에 들지도 않고, 정신 상태도 확인해야 하고, 부족하다 싶으면 정신 개조가 필요하긴 하다만…. 하나라도 손에 넣는다면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다.
이전에야 방해가 된다면 제거, 가능하다면 협력 정도가 지침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들마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관리자들에게 넘어간다면 치우면 그만이고, 아니라면 이 쪽이 재활용한다.
최고의 시나리오다.
"…어째서 웃는 거죠? 당신 설마…."
내 웃음에 성녀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뭐 인간을 증오하는 범죄자나 싹 누런 빌런 후보쯤으로 보인 듯했다.
"아,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놀과 성녀 님께서 생각하시는 놀의 수준이 많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요."
오해할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놀 심장이 넘어가면 즉시 놀 영웅이 탄생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웃는다니… 내가 생각해도 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기쁜 걸 어떻게 하냐고….'
엄청나게 이득을 얻을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까?
내 말에 성녀의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그, 놀 영웅이 부활해 봤자, 끽해야 다섯 놀 부족이 연합하고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만만히 봐서는 안 됩니다. 아마 시간만 주어진다면 백만 대군이 넘는 놀의 군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성녀는 한껏 심각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밝히기 시작했다.
600년 전 놀 영웅이 탄생하고, 그로 인해 왕국에 위기가 찾아오고, 용사를 선별하고, 여신교를 통해 성물을 전달, 용사 파티를 형성해 우여곡절 끝에 용사의 검이 놀 영웅의 가슴에 꽂는 것에 성공했지만, 영웅의 계승이 있음을 알게 되고 끝내 마법사와 용사, 성기사와 성녀 넷의 힘을 이용해 이 장소를 봉인했다고.
마법사는 이 봉인을 완성한 대가로 그 자리에서 모든 힘을 잃고 소멸. 장비에 힘을 남기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녀의 희생 덕분. 마법사의 마법에 더해 여신의 기적이라는 기술과 자신의 혼이 남아 이곳을 지키는 대가로 천 년의 봉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60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서서히 자신의 혼이 마모되어 이제는 찌꺼기밖에 남지 않았고, 놀들이 이 장소를 발견하고 마침내 봉인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아 봉인이 깨질 위기라 절망하고 있었다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쭉 듣고 난 다음 생각했다.
놀 100만 대군. 그래. 대단하긴 한데….
"그거, 제국 군단 둘 정도면 그냥 쓸어버릴걸요?"
1회차에서 한 60만 찍었던 것 같은데, 그거 군단 하나가 그대로 쓸어버렸다.
"…네?"
"제가 알기로 제국 각 군단 하나하나가 최소 4~5만 수준인 걸로 압니다. 장비 수준도 높고 편제도 제대로 된다면 놀 50만도 충분히 이길 수준이라….
"…인간이 그렇게 강해졌다고요?"
단일 종족으로 최강 세력은 인간이다. 견제가 워낙 많고 국경이 넓은 덕분에 둘러싸여 있어 최강치고는 힘겹기는 하다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최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숫자야 오크가 더 많고 질이야 엘프 같은 이종족이 더 높지만, 인간은 그간의 발전 덕분이랄까 평균적으로 두루두루 강하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규격 외 강자도 타 종족에 비해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수련자가 등장함으로써 균형이 서서히 깨지지만.
하여간 600년 전에는 그 놀 100만 때문에 인간 종족 자체가 위태위태한 수준이라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아니지.'
즉, 이 봉인의 유지가 더는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규격 외 강자의 실력은 600년이 지났어도 여전하긴 할 거다. 아니, 그 규격 외 강자들의 경지는 같을지언정 기술이 그만큼 발전했으니 전투력 자체는 지금이 더 강하겠지. 장비 수준 차이도 분명하게 날 테고.
하지만 그 아래, 평균 전력의 차이가 어마어마 하다. 인간의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고, 장비 수준도, 기술 수준도 차원이 다르다. 성녀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마법사는 진짜 손에 꼽히는 수준인 것 같은데, 그건 지금도 같지만 전체 인구가 늘어서 차이가 심각한 듯했다.
600년 전에는 마탑이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동서남북에 각각 총괄 마탑이 하나 있고, 제국 중앙에 상아탑이라는, 모든 마탑 중 최상위에 군림하는 마탑 하나가 또 존재한다.
이 외진 티드린드 성에도 마탑 하나가 존재한다. 비록 마법사는 너덧밖에 없지만.
마탑 자체는 각 영지에 하나씩은 존재하며, 마법사 수가 인구대비 극도로 적은 것은 맞지만, 그래도 총 마법사 인구가 일만은 가뿐히 넘는다.
성녀는 내 말에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버버거렸다.
이렇게 된다면 성녀로부터 저 성녀로부터 장비와 스킬, 봉인지 유지를 위한 힘마저 얻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 이들의 몸에 흘러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 힘을 흡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성녀가 협력까지 해준다면 금상첨화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신교에 연락을 해야겠군요. 유신후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부디 여신교 쪽에 이 소식을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제국이 강하다고는 해도 일단 놀 영웅의 심장은 파괴해야 합니다. 인간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적이 늘어났기에 곧바로 병력 파견은 힘듭니다. 일단 심장은 파괴해 놓고 차후 소식을 전하면 제국 측에서 적당한 병력을 파견해줄 터. 저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저 놀 영웅의 심장을 파괴하겠습니다."
"말씀음 고맙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상황이 좋다면 제힘과 성유물들은 여신교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아직 일 년 이상 버틸 수 있으니, 부디 여신교에 소식을 전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이 개 씨발. 이년이 뭐라는 거지? 나더러 남 좋은 일을 하라고? 여기까지 와서?
나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제가 여신교의 사제 중 한 명입니다. 원래는 밝히면 안 되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용병이자 성기사 후보인 유신후입니다. 7대 성녀 님."
"…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신성력이 없음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요새 전투 능력 때문에 성기사 후보들 중 일부는 일부로 마력을 신성력으로 치환하지 않는다고 밝히고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함으로써 직업을 증명했다.
내가 마력으로 힐 스킬을 사용하자 내가 같은 여신을 모시는 사제라는 것을 안 성녀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어째서 말씀하지 않으셨죠?"
"규율입니다. 성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 중 하나죠.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된다는…."
나는 대충 지어낸, 새롭게 만들어진 규칙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대사제고 성녀고 절대로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고.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면 들키지 않도록 봉인까지 한다는 개소리를 덧붙여 주었다.
"원래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하루라도 빨리 놀 영웅을 처리하지 않으면 일대 주민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해 별수 없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렇군요. 세상이 많이 변했네요…."
조금 풀려간다 싶었지만, 성녀는 곧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대 성녀가 있나요?"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현시점에도 성녀는 존재한다. 나중에 수련자 중에서 하나가 더 등장해, 한 시대에 성녀 둘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황이 되버린다.
"그렇다면 성녀 후보를 데리고 와 주시겠어요? 그녀에게 힘을 인계하고자 합니다."
…남성 차별이냐….
하기야 여신교에서 성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는 한데….
"일부라면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확실히 그럴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성녀 후보가 온다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르헨 님의 힘은 유신후 님께 계승해드릴 수 있지만, 제힘은 성녀 후보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둘 다를 원하신다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아 참. 아르헨 님의 힘을 계승하신다면 마력이 신성력으로 치환될 겁니다."
그건 안다. 충분히 생각했던 일이다. 성녀의 전설 스킬과 성기사의 전설 스킬을 모두 얻는다면 부족한 공격력은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기에 감수하려고 했는데… 뭐? 성기사 스킬만 먹고 떨어지라고?
나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그냥 뺏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힘들은 애초에 계산 안이 없었던 힘이다. 원래 얻으려고 했던 것만 해도 충분하긴 하다. 강제로 뺏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았고. 아까만 해도, 잡혀 온 인간들이 접촉한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힘이 흘러 들어가지 않았던가?
아마 무기 자체에 자격 있는 인간이 접촉하면 시험 이후 힘을 계승하는 수순이 준비되어 있는 듯했다.
가능성 있는 이가 온다면 제대로 처리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솔직히 아쉬웠다. 이 힘들을 제대로 계승만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랭커들도 내 아래에 둘 수 있는데…. 목표를 더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렇게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녀는 내가 고민하자 그 이유를 짐작한 듯했다.
"…욕심이 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아무리 성기사 후보라고 하신들, 그렇겠지요."
티가 좀 나기는 했다. 처음에야 대의를 위하는 척했지만 지금 행동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 내가 성기사의 힘에 성녀의 힘까지 흡수해, 최초의 성자까지 된다면 어마어마한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성녀가 누구인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다. 그런 만큼 그녀가 보기에 여신을 모시는 이들이라면 하나같이 욕심낼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제힘은 여신님의 도움이 없다면 일부라면 모를까, 전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답니다. 유신후 님이 성자가 되시는 것은… 아마 힘들 겁니다."
"전 가능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이다. 현재 여신인 가이아가 내 계약자인데 무슨.
탑이 지구에 생긴 이상, 이 탑 속의 여신교가 모시는 여신은 가이아다. 탑 특성상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힘 뿐만 아니라 아르헨 님의 힘까지 받아들이셔야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낮다고 보이네요. 확신을 할 수가 없어요. 만약 실패한다면… 봉인은 깨지고 놀 영웅이 부활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군대가 오기 전까지는 그렇겠지. 1회차에서도 그랬고.
"부디, 대의를 생각해 주세요. 유신후 님."
대의는 개뿔이다.
나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 힘들을 계승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 물음에 성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제 생전의 능력 일부와 드넓은 신성력, 육체 능력과 발전 가능성을 높여줄 겁니다. 아르헨 님의 힘 또한 만만치 않답니다. 그분은 당대 최고의 성기사셨어요."
그녀는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생전의 아르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죽 듣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알겠습니다. 성녀 후보를 모시고 오도록 하죠."
"네, 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아르헨 님의 힘은 그때가 되면 한 번에…."
"아뇨. 그 힘도 필요 없습니다. 그 힘을 계승할 다른 사람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제 후배입니다."
성기사의 힘 만은 필요 없다. 그럴 바에 다른 직업으로 전향하고 말지. 스킬 슬롯이 6개일 때라면 그것만으로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슬롯이 왕창 늘어난 현재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욕심이라는 것이 있다.
무척 짜증 난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이 힘들이 아쉽다.
온전히 이 힘들을 수습한다면 랭커들마저 내 아래 둘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일행은 이제 완전한 내 편. 나연은 엄격한 내 기준에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다른 일행, 특히 주하연과 나서윤, 남은주는 내 기준으로도 확실히 내 편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스킬들을 일행들에게 나눠 주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