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86화 (86/317)

# 86

조사 의뢰

"안, 안 돼요! 형!"

내가 장비들을 향해 걸어가자 기겁한 하유진이 나를 말렸다.

아까 그들의 꼴을 보고는 혹여 나마저 그리될 까 겁먹은 듯했다. 자신을 제대로 봐 줄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하유진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일 테니까.

나는 내게 매달려 울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유진에게 말했다.

"걱정 마라. 바로 손대지는 않을 거야."

손을 대긴 할 것 같지만.

솔직히 손을 안 댈 수는 없었다. 아까 다섯 번째 손을 대고는 죽었다는 남자가 어떤 원리로 죽은 건지 대충은 알 것 같았으니까.

은은한 빛이 보이는 장비 다섯 개. 검, 방패, 성직자용 로브, 스태프,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 영웅의 가슴에 박힌 검 한 자루.

놀 영웅의 가슴에 박힌 검을 제외하면 전부 성직자용 스킬을 전수하는 아이템들이다.

내가 원했던 만능형 전위를 위한 스킬 구성들.

아이템 잊혀진 성기사의 검과 방패에서는 각각 전설 스킬, 여신의 징벌과 철벽의 수호자를. 그리고 저 스태프와 로브에서는 각각 성녀의 축복과 성역 선포라는, 전설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저 놀 영웅의 가슴에 박힌 검 또한 만만치 않다. 용사의 증명이라는 아이템으로, 마력 회로 - 이중 나선 구조라는 특이한 전설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생긴 것은 검 주제에 주는 스킬은 마법사 스킬이라 알려졌다.

저 특이한 마법 회로를 갖게 된다면 더블 캐스팅을 손쉽게 할 수 있게 해 준다. 정확히는, 더블 캐스팅이 아닌 같은 마법을 두 번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지만, 그것만 해도 보통 수준의 스킬은 아니다.

과거에는 이 스킬을 가진 놈이 제법 뛰어나기는 해도 괴물 수준은 아니었기에 증명은 되지 않았지만, 더블 캐스팅을 쓸 수 있는 마법사였다면 두 개의 마법을 각각 두 번씩 사용하는 괴물이 탄생했을 거란 소문이 돌았었다.

나는 저게 나서윤에게 무척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예상이긴 하지만, 마검사의 단점 중 하나인 전투 중에 마법을 사용하기가 극히 어렵고,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육체 강화가 약화된다는 약점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는 해 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하나하나가 엄청난 보물 수준이라는 거다. 게다가… 이건 1회차에서의 이야기다.

지금 몇 년이나 더 빨리 넘어온 덕분에 새로운 기능이 열린 듯했다.

아까 이 무구에 손을 대고 폭발해버린 놈 덕분에 확신했다.

이 무구들은 현재 놀 영웅을 봉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웃긴 건은 내가 보기에 저 놀 영웅이라는 놈은 분명 죽었다는 거다.

죽은 놈을, 그것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놈이 부활한다?

그런 전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작 놀 수준의 격을 지닌 놈이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전설을 가진 놈들은 하나같이 악마나 드래곤, 로드급 성혈의 뱀파이어나 자연 발생종인 0세대 라이칸스로프 정도다.

지능이 있어도 대화가 안 통하는 수준의 놀이 그런 전설을 재현한다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마 놀 영웅의 부활은, 저 개체의 부활이 아닌 놀 영웅이라는 존재 자체의 부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심장.

이유는 간단했다. 시스템 메시지 창이 목표를 그렇게 정해 놓았으니까.

게다가 그 주체는 황금 놀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쨋든간에 이 무구들의 힘은 현재 이 봉인을 유지하고 있었고, 인간의 손이 닿으면 그 힘이 줄어든다.

정확히는 극히 일부가 줄어들어 인간의 몸에 들어갔다가 미미한 손실을 안고 다시 무구로 회수된다.

인간이 그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자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강제적이긴 하지만 그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몸에 남은 흔적 때문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펑.

그 횟수는 아마 본인의 현재 능력이나 잠재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되었다. 아까 죽은 남자의 말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5번 정도가 아니었을까? 놀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는 인간을 이용해 봉인을 차근차근 풀어 왔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무구 주변의 공간에 손을 올려 보았다.

파직-.

'역시.'

이 주변은 결계로 정확하게 막혀 있었다.

가볍게 손을 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반발력이 강하다.

더 강하게 댔다면 큰 피해를 봤겠지.

"형! 형! 괜찮아요?"

갑자기 일어난 반발에 하유진이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유진아."

"…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음일까. 하유진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나도 손대 봐야겠다."

"형!"

어차피 막혀서 들어갈 수 없다면 결국 봉인을 풀기는 해야 한다는 뜻. 안으로 들어가야 심장을 파괴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걱정 마라. 아까 마력의 움직임을 좀 확인해 봤는데, 내가 손댄다고 죽지는 않아."

일단 일행에게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눈앞에 이런 장비들과 알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는데 그냥 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확인은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엄청 아플거예요. 아까 형도 봤잖아요!"

"글쎄… 그럴지도."

"그러면…!"

"주변 경계 좀 부탁할게."

"…형…."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하유진은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재차 명령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장비들을 살피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스태프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곧바로 미증유의 힘이 내 몸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제법 아프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이 곧바로 빛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이전 희생자들이 당했던 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현상.

하유진이 놀라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곧바로 내 눈에 비치는 환경이 일변했다.

***

한순간, 정신을 놓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이 흰빛에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서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 얼굴이 흐릿한 여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어떻게…."

인상이 흐릿한 여성. 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보고는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마치 인식 장애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여성 또한 무척이나 당황한 듯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신 거죠?"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당신은 뭡니까?"

"저는 여신교의 7대 성녀, …라고 합니다."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요?"

"…그렇군요. 이젠 이름도 들리지 않나요…."

환영은 슬퍼 보이는 기색이었다.

얼굴은 안 보이는데, 표정은 알 수 있다니.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성녀라 이거군요."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여신교 역대 성녀따위는 나도 모르고. 다음 대의 성녀가 소환자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게 내가 성녀의 역사를 알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모르지야 않다만….

아니 잠깐만.

"7대요?"

"네. 저는 7대 성녀, 정확히는 그 존재의 찌꺼기지요."

"…이전 대의 성녀가 13대쯤 되는 것으로 아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듣기로 성녀는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고 들었다.

대충 6대면 짧게 잡아도 600년. 그러니까, 이 봉인이 600년은 되었다는 뜻이다.

'미친, 육백 년 전의 봉인이, 지금까지 되고 있다고?'

그게 돼?

나는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무구들의 기능이나 지금까지 유지되는 그 대단한 힘을 생각하면 조금 납득이 되긴 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성녀가 물었다.

"일단 이름까지 지워졌으니… 그냥 성녀라고 불러주세요. 당신은 누구죠?"

"용병입니다. 이름은 유신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방금 전까지 놀들이 봉인을 풀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요. 설마 놀들에게 잡혀 온 것이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최근 이상한 일이 있어서 조사차 놀들의 영역에 잠입해 왔습니다."

나는 자칭 성녀에게 가벼운 정보들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병 파티 하나가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는 놀 영웅을 봉인한 장소 같군요."

"…놀 영웅까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네. 뭐, 나름 조사해 왔으니까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직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니…."

성녀는 조금 안심한 듯했다.

"지금 여신교의 상황은 어떤가요? 과거에 비해 강성해졌나요?"

"…뭐 제국의 국교이기도 하니,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신교에 말을 전해 이곳의 상황을 알리고 병력 파견을 요청해주세요. 놀 영웅이 부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이쪽의 전리품을 몽땅 뺏기게 될 텐데 미쳤다고 알리는가?

"…그거 그냥 저 시체의 심장만 파괴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확실히, 그렇게 한다면 당장의 계승은 막을 수 있지만, 영웅의 혼이 이 장소를 벗어나 결국에는 새로운 놀 영웅을 탄생시킬 겁니다. 과거와 같은, 세상의 혼란은 막아야만 합니다."

세상의 혼란은 개뿔. 그냥 제국에서 병력 좀 파견하면 쓸려나가는 것이 놀이다. 600년 전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만, 현시점의 제국에게 놀 영웅 따위는 조금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지나 일정 숫자가 넘어가면 그리 만만하지야 않겠다만은….

게다가 앞으로 나타날 수련자들까지 있으니, 이 성녀라는 존재가 걱정할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경험상 놀이라는 존재는 오크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다.

게다가 심장 파괴로 부족하다면, 메인 퀘스트가 고작 저 목적만으로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몰라 물었다.

"…그 놀 영웅의 혼이라는 것이 빠져나가서 새롭게 놀 영웅을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10년. 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에라이 이 사람아. 10년이면 랭커도 등장한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랭커 혼자서도 다 쓸어버리겠다.

내가 놀 영웅의 부활을 걱정한 것은, 몇 년 내에 정말 거대한 세력을 이뤄 이쪽 지역의 힘과 한국 쪽 수련자들의 힘만으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경계했던 거다.

10년 후에 위협이 될 것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그 시간이면 중층까지 뚫고도 남는다. 한국 수련자들의 힘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한 상태. 놀 영웅이 빠르게 부활해 수련자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제국을 비롯한 타국의 수련자들이 끼어들어 이쪽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지 해결이 가능하다면 그냥 좋은 경험치 공급원에 불과하다. 물론 그 시간이면 충분히 성장했기에 어지간해서는 효율이 엉망이라 결국 다 쓸려나가겠지만.

"그렇다면 심장이 놀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경우에는 심장을 받은 놀이 현재 놀 영웅과 같은 경우, 그러니까 황금 놀이 그 심장을 얻은 경우에는 즉시 놀 영웅이 탄생합니다."

그래. 그걸 경계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단숨에 5개 부족이 통합되고 지금 수준으로는 도저히 대적하기 힘든 세력이 탄생한다.

그것은 막아야 한다. 내가 타국에서 시작할 수 없는 이상, 내 세력의 근본은 이곳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세력의 근본이 약해지면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단숨에 사라졌다.

나는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좋아. 이 장비들은 다 내 거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