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84화 (84/317)

# 84

조사 의뢰

나는 중심 부족을 발견하고 조금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저 깃발은 분명 중심 부족을 뜻하는 깃발이다. 그게 바뀌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여긴 분명 29구역이다.

나는 혹시 몰라 주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가 몇 구역이었죠?"

"29예요. 왜 그래요?"

"…아뇨. 저기 저, 깃발 보이시나요?"

"…그러게요. 이제껏 저런 깃발은 못 본 것 같은데…."

중층에서 만날 오크들은 각 부족마다 자신을 뜻하는 특유의 깃발이 존재한다. 그러나 놀들은 만인장 수준은 되어야 자신만의 깃발을 세운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특유의 문양은 중심 부족이었던 이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경배하는 황금 놀.'

황금 놀 부족의 중심 부족 특유의 문양이었다. 게다가 그 깃발 옆에는 중심 부족을 뜻하는 문양도 같이 세워져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저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은 중심 부족이라는 뜻.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는 분명, 저 중심 부족은 30구역에 존재한다. 게다가 황금 놀 부족의 중심 부족, 경배하는 황금 놀 부족은 특이한 부족이라 다른 놀들과는 다르게 이동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소에 존재한다고?

시간이 되돌려진 이상, 바뀌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과거 그대로. 그런데 자신이 아는 미래가 변했다? 그 변수는 나 말고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끽해야 간섭력을 얻은 관리자들로 인해,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수련자들에 의해 영향이 생겼다면 모를까.

현재 우리는 단독 선두고 하층에 존재하는 유일한 수련자 팀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영향을 줬어야 하는 게 맞는데….

'하층에 와서 한 거라고는 갈색 놀 한 부대 막은거랑, 황금 놀 500의 침공을 막은 게 다인데?'

고작 그걸로 저 중심 부족이 29구역으로 떨어졌다고? 말이 안 된다.

결국 과거와 달라진 것은 우리가 하층에 진입한 시점이라는 건데….

'설마 아직 성장이 덜 된건가? 그래서 29구역 판정을 받은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이후 세력이 더 강성해져 이 땅이 29구역에서 30구역으로 승격되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이 땅은 과거에도 29구역이었다. 30구역은 조금 더 이동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놀 영웅.'

그게 부활하고 난 다음 부족의 위치를 옮겼다는 뜻이 된다. 안 그러던 놈들로 아는데, 왜 그런 짓을?

나는 의문이 들었다.

메인 퀘스트는 놀 영웅의 부활을 저지하라 하였다.

그러면서 건 조건은 황금 놀 부족의 전멸, 혹은 놀 영웅의 심장을 파괴할 것.

나는 이것을 행하는 이들이 30구역의 중심 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긴 했다. 단지, 29구역에 존재한다는, 과거와 다른 기억에 놀랄 뿐.

29구역과 30구역. 여기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하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아."

"네 형."

"조금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여. 조금 가까이서 마을 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너무 들어가지는 말고. 그리고 만약 걸린다 싶으면 즉시 도망쳐. 지원해 줄 테니까."

"네. 알겠어요. 형."

그간의 경험 덕분에 하유진은 놀 마을을 조사하는 것에 그다지 겁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껏 걸린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른다.

중심 부족의 족장쯤 되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되도록 너무 가지는 말라고 했던 거고.

하유진은 내 말이 끝나자 곧바로 은신을 사용, 마을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하유진은 마을 외곽을 돌면서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너무 들어가지 말라는 내 충고 때문에 일단 간을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자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마을 안으로 사라졌다.

내 충고도 있으니 너무 들어가지는 않을 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 조심스럽게 마을 밖으로 빠져나오는 하유진을 볼 수 있었다.

은신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치고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은 듯했다.

"형! 형!"

충분히 마을에서 떨어지자 하유진의 흥분된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찾았어요! 찾았어!"

"안에 사람이 있었니?"

"네. 그것도 엄청 많이요! 30, 30명 정도 됬어요!"

"30명이나?"

나연은 상상 이상의 숫자에 놀란 듯했다.

30. 생각 이상으로 많은 수였다. 이번에 납치된 3명을 제외해도 27명은 있었다는 뜻.

그런데도 납치를 시도했다고?

"다들 멀쩡해 보였어?"

"아뇨. 그렇게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다들 지친 표정이었구요. 갇혀 있었는데, 앞에 먹을 것이 쌓여 있는데도 다들 삐쩍 마른 모습이었어요."

뭔가 있기는 있다.

"…좋아. 일단 저들이 인간으로 뭘 하는지 알아봐야겠어. 이 주변에 캠프를 만들어야겠네."

다행히 캠프를 세울 장소는 존재했다. 놀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암석 지대. 거대한 부족인 만큼 저들의 영역은 넓어 꽤나 멀어진 장소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는 데, 암석 지대는 영역 밖에 존재하는 데다가 저들이 잘 찾지도 않는다. 딱 안성맞춤인 장소.

나는 그것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는 척하며 즉시 그 장소로 일행을 이끌었다.

암석 지대를 본 일행은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삼는 것에 금방 찬성했다.

우리 일행은 곧바로 암석 지대 중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을 찾아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도대체 뭘까요. 사람을 서른 명이나…. 그러고도 또 습격을 했다면…."

"뭔가 있기는 있습니다. 확인을 해 봐야겠어요."

나는 하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아,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좀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지원을 하기는 하겠지만, 주체는 네가 될 거야."

"네! 아까처럼 사람들 감시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그게 주 임무가 될 거야. 무론, 네 안전이 최우선이야. 특히 강해 보이는 놀이 있으면 최대한 조심해. 혹시 발견되면 진짜 위험하니까."

"걱정 마세요! 적어도 중간까지는 전혀 눈치를 못 채더라고요! 되려 숨바꼭질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겁이 없네.'

겁먹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긴 하다만….

아이가 맡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임무지만, 하유진 말고는 할 인원이 없었다. 게다가 되려 하유진은 이런 중요한 역할을 지산이 맡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이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자신이 맡게 될 줄도 몰랐고, 그만큼 자신이 신뢰 받고 인정 받는 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투명 인간의 부작용인가.'

한동안 스킬 때문에 투명 인간으로 지냈던 것이 어린 마음에 크게 상처가 된 듯했다. 그 반작용으로 보인다.

"그럼, 맡길게. 혹시 정말 위험하면 이거 쓰고."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신호탄을 그에게 넘겼다.

이게 터지면 정말 목숨을 각오하고 놀들의 부락에 들어가야만 한다.

만이 훌쩍 넘는 놀이 살아가는 거대한 부락. 우리가 장비를 갖추고 수준을 높였다고는 해도, 거기서 살아돌아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들키는 순간 하유진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그나마 천운이 닿아 마을 외부로 나올 수 있다면 내가 데리고 도망이야 칠 수 있겠지. 단, 일행들과는 헤어져야만 한다. 일행까지 합류하면 도망은 칠 수 없다.

괜히 조사 의뢰가 몽땅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뜻.

하유진은 기쁜 표정으로 내가 주는 신호탄을 받아들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주하연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필이면 저런 거대한 부족이라니…."

"뭐,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았겠습니까. 애초에 잡혀간 인원이 적은 만큼, 강대한 부족으로 인간이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요."

예측 범위 내긴 하다.

"…그 사람들 구할 수 있을까?"

나연이었다.

"나연아, 그건 안 돼. 구할 수도 없고, 구했다간 우리까지 다 죽어."

주하연이 나연의 한탄을 막으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표는 조사야. 저들의 목적을 알아둬야 해. 저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고, 대체 왜 마을을 습격하는지만 알아내면 떠나야 해. 우리 일행의 힘으로 저들까지 구해 줄 수는 없어."

"…알아요 언니. 그냥… 너무 안타까워서."

"그건 그래. 하지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구분하렴."

"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연.

그녀는 내게 마음을 열었다고 판단된 순간부터 제대로 일행을 아끼고 있었다.

되려 이젠 나보다 더 일행의 안전을 신경 쓰는 수준.

언제나 악역을 자처해야 했던 나로써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나연을 제외하면 그들의 안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유진은 자세히 보면 우리 일행 말고, 자신을 제대로 봐 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되려 그런 이들을 보면 불퉁한 표정을 지을 정도. 잘못되었다면 그들에게 분노를 품었을 수도 있지만, 그냥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난 뒤로는 분노나 증오를 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자들에 대해 관심이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로써는 무척이나 좋은 점이지만.

나서윤은 여전히 나나 일행 말고는 관심이 없고, 남은주는 안타까워하는 듯하지만 그냥 거기 까지다.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는다.

주하연도 최근에는 일행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고. 가장 나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연도 말만 저리 할 뿐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내게는 허용 범위지만, 주하연이 보기에는 분위기를 흐리는 것으로 보이는지 최근에는 저렇게 그녀가 나서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하층에서의 목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인 퀘스트의 목표는 저들의 전멸, 혹은 놀 영웅의 심장을 부수는 거였다.

놀 영웅의 심장만 부수면 되기도 하고, 놀 영웅에 대한 정보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대대적으로 황금 놀 부족 토벌도 준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메인 퀘스트 클리어는 어렵지 않다.

인간의 세력이 놀에 비해 약하다고는 하지만, 놀들은 저들끼리도 싸우며 뭉치지 못하다 보니 하나의 부족 정도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그만큼 피해가 크기야 하겠다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그게 중요했다.

***

다음 날부터 계속되는 감시가 이어졌다.

주행성인 놀의 특성 덕분에 감시는 비교적 수월했다.

낮이면 뭘 하는가 어차피 하유진은 발견을 못 하는데.

하유진은 인간이 갇힌 감옥 주변에서 면밀히 상황을 살폈다. 하유진이 마을 내부를 정찰하는 동안, 마을 외부, 정확히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그 주변을 확인하는 것은 거의 내 역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행 중 가장 무력이 뛰어나고 상황 판단이 빠르며 생존 가능성이 높은 게 나였다. 하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데리고 베이스캠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쳐야 하는데, 나를 제외하면 그나마 나서윤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안 된다. 그나마 그 나서윤 마저도 나만큼은 하지 못한다. 신체 능력과 경험이 명백하게 부족하니까. 게다가 그런 역할을 제외하고도 마을 외부에서 뭔 일이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상황을 살피려면 여기서도 높은 신체 능력은 필수다. 그래도 나만 고생한다며 가끔씩은 나를 대신해 마을 외부를 지키는 역을 수행해 주기는 했다.

그러는 동안 남은 일행은 휴식을 취하거나 남은주의 수련을 도왔다.

남은주는 아무래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는지, 내게 조심스럽게 수련을 해도 되는지 물었고,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과하지 않은 선에서 하라며 허락해 주었다. 그 수련을 돕는 것이 주하연.

평소라면 절대 해주지 않았을 행동. 아마 남은주도 지금 상황이 특수함을 깨닫고 내게 물은 듯했다.

나연은 베이스캠프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암석 지대 주변, 즉 베이스캠프 주변을 정찰, 경계하는 것이 나연의 주 임무였다. 정령의 힘을 빌리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거리 제한이 있어서 베이스캠프 내에서 장기간 머물 수는 없었다.

이 조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행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나서윤은 나를 돕지 않는 동안은 나연과 교대를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나연을 제외하면 그나마 신체 능력이 되는 나서윤도 경계 임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대략 열흘간 별일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벌써 임무를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그동안 알게 된 거라고는 놀들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에게 강제로 식사를 시킨다는 것과 가끔 운동을 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저항을 하지 않으면 특별히 고문을 한다거나 괴롭히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으며 되려 마치 체력을 관리해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거였다. 게다가 서로 따로 가두기는 하되, 멀리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서로 가까운 곳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명백하게 보이는, 놀들의 배려 아닌 배려에 순순히 순응하기보다는 최대한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간들은 놀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지 않으면 최대한 식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고, 운동을 하라고 비교적 자유롭게 놓아도 전혀 꼼짝하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놀들은 그런 저항 행동이 심해지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행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인간은 놀 주술사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처음 하유진이 갔을 대는 상당수의 인간들이 삐쩍 곯은 상태였다는 것을 보면, 진짜 독하게 저항하는 듯했다.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더욱 특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무언가 움직임이 있는지 평소보다 빠른 시간에 하유진이 마을을 빠져나온 것.

마침 내가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형, 움직여요."

"움직인다고? …설마."

"네. 형. 놀들이, 몇몇 사람들을 꺼내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어요!"

"…어디야. 어느 쪽으로 갔어?"

"이쪽이에요. 저를 따라오세요."

일행에게 말할 시간도 없다.

나는 즉시 하유진을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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