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준비
우리 일행이 결국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음을 루셀에게 전하자,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아뇨. 그만큼 준비를 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물론입니다. 약속드린대로, 충분한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조건을 밝혔다.
"그래도 장비를 지원받자마자 바로 의뢰를 시작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적응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것도 많아서요."
"받아만 주신다면 만족합니다. 그래도 너무 늦으시면 저도 곤란해져서…."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장비를 받고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거든요."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장비를 얻으면 익숙해지셔야지요."
장비를 받고 한 달. 나처럼 근력 40에 달하는 것도 아니고, 나서윤은 33, 남은주는 29에 불과했다.
지금도 조금씩 회복해, 남은주는 14, 나서윤은 17에 머물러 있었다. 남은주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도 있었고, 감소된 근력이 워낙 낮아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도 있었다.
나야 잡무를 도우며 쉬엄쉬엄 단련했기에 35 정도를 만드는 데 두 달 이상이 걸려버렸지만, 이들은 빡세게 훈련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만큼 장비를 맞추는 데 걸리는 시간과 추가로 준비된 한 달의 시간이면 대강 회복할 수 있다고 봤다.
나는 촌장과 협상해 나흘 정도 뒤에 일행과 함께 티드린드 성에 가기로 결정했다.
나흘의 시간 동안 나는 계획된 프로그램은 남은주와 나서윤에게 적용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하유진을 보자, 이왕 하는 김에 하유진까지 훈련시키기로 결정, 셋을 한 번에 교육하게 되었다.
게다가 남은주는 자신의 신체 스텟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약점도 남아 있어서, 이전의 훈련까지 포함해 정말 지옥 같은 스케줄이 완성되었다.
"…죽을 것 같아요, 신후 오빠."
"그래도 해야지."
"…알긴 아는데요…."
근력 훈련 방법을 가르쳐 준 후 몸에 체득시키기 위해 다른 둘을 굴리면서 나는 다시금 이전에 알려 주었던 훈련을 시켜보았다.
남은주는 근력 훈련을 하던 와중이라 정말 힘들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내가 하는 지시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저런 말을 하는 정도. 평소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남은주가 저런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정말 힘들기는 한 듯했다.
"형,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예요?"
"하면 좋은 거야. 근력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후, 후우! 후우…."
나서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가 시키는 훈련을 반복해서 행하고 있었다.
근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은 별다를 것 없었다.
아직 수준이 낮은 만큼 20대 정도 까지는 현대에서 쓰는 방법인 무게를 늘려 부하를 주는 방식이 효율적이다.
이건 30대까지도 가능한 방법이기는 하다. 그 이상으로 근력이 올라가버리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일단 30대가 넘어서기 시작하면 슬슬 톤단위의 부하가 필요하게 되고, 그쯤 되면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다른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마력을 이용해 근육에 부담을 주는 방법이나, 중력 마법이 걸린 수련용 기구, 가장 효율적이고 미친 방법으로는 마력을 이용해 스스로의 근육을 찢고 재배열하는 방법이다. 이건 너무 위험하고 부작용이 커서 실제로는 잘 쓰지 않는 방법이지만.
결국 가장 흔한 방법은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마법이 걸린 물품은 비싸다. 그러다 보니 결국 돈 많은 놈이 더 강해지고 그래서 돈을 더 버는, 힘에 있어서도 부인부빈익빈이 현실이 되고 말았었다.
그나마 민첩이나 체력은 다른 방법들이 존재했지만, 근력만큼은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근력 훈련을 스킬로 익힌 놈이 알려준 방식인데,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저런 비상식적인 방법밖에는 없는 듯했다.
나중가면 능력치는 진짜 훈련보다는 사냥을 통해서 올리게 된다. 업이 쌓이고 격이 높아지면 샤냥중 자연스럽게 신체 스텟들이 하나씩 늘어 갔으니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답은 사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하연은 매일 기도를 통해 신성력 스텟을 올리기 위한 노력을 했고, 나연 또한 마력을 높이고 정령들과 더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행들은 탑이라는 상황과 나라는 교사 때문인지 하나같이 부지런했다.
이게 올바른 것이긴 하지만.
하루 훈련이 끝나면 나는 일행들과 돌아가며 개별적인 면담을 했다. 일행들의 장비를 맞출 생각이니, 일행의 요구사항을 들어둬야만 했다. 자신이 쓸 장비니, 장비를 제작해 줄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말하는 것이 좋지만, 이들은 경험이 부족해 아직은 좋지 못한 방법이다.
나는 이들의 의견을 참고하며 필요한 장비들을 내가 직접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흘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나흘에 걸쳐 세 명은 훈련 방법을 완전히 몸에 익혔고, 때가 되자 우리는 촌장이 붙여준 사람의 안내를 받아서 트디린드 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
[특수 조건을 만족해 다음 구역에 진입합니다. 레벨이 부족합니다. 주의하세요.]
저번 사냥을 통해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25구역에 올 정도의 레벨은 되지 못한다.
그런 만큼 오랜만에 보는 듯한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입니다. 성주 님께 부탁해, 겨우 예약한 곳입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과거 모너스 마을에서 우리를 찾아왔던 드레너였다.
확실히 우리를 데리고 온 공도 있어서 안 그래도 신뢰받던 인간이, 지금은 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나흘간의 시간은 내가 일행에게 준비를 시킨 기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루셀에게도 준비를 위해 필요한 기간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머커스 대장간.
1회차에서도 잘나가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1류 대장간이었다. 몇 년 후에도 잘 나가지만, 이때부터 이미 최고 수준의 대장장이였던 듯했다.
'이곳에서 장비를 맞춘다라….'
1회차에서는 이곳에서 만든 기성품 하나 갖지 못했었는데, 정말 많이 변했다 싶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격세지감을 느끼며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평범한 상점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들리는 망치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머커스 대장간에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브리터스 마을의 루셀입니다."
"…아. 그 맞춤 갑옷을 주문하신…."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보았다.
거지 같은 장비를 맞춘 이들인데도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은 분명 잘 훈련된 점원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수천 골드를 사용할 이들이란다. 게다가 성주의 연줄까지 이용해 안 그래도 바쁜 머커스가 다른 일을 제치고 이들의 물건을 맡게 되었다고 들은 점원은 한층 더 정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는 곧바로 상점 내부의 문을 열었다. 내부로 연결된 곳을 지나 다른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듯한, 깡깡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되지 않아 막 중년에 진입한 듯한 남성과 함께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머커스입니다."
그는 우리가 성주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무척이나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브리터스 마을에서 나왔습니다. 드레너입니다. 촌장이신 루셀 님을 대리해 이쪽 분들의 장비를 의뢰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떤 장비를 원하십니까?"
나는 일행을 대표해 앞으로 나서며 일행이 바라는 장비를 설명했다.
최고급 장비인 만큼, 경량화 마법 정도는 걸린다. 그 정도는 마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일행들의 특성을 설명하며 원하는 장비들 목록을 쭉 읊었다.
하나하나만 들어도 엄청나게 돈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적어도 2천 골드 이상. 내가 예상하는 금액이었다.
내 설명을 머커스는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예상 이상으로 세심한 내 요구 사항에 그는 우리가 연줄만 믿고 온 이들이 아니라 제법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안 듯, 내 요구 사항을 세심하게 확인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나는 새삼 그가 일류라는 것을 깨달을 정도였다.
"그럼, 유신후 님과 남은주 님은 가벼운 경량화 정도만 건 철제 갑옷으로, 나서윤 님과 하유진 님은 비교적 경장을, 나연 님과 주하연 님은 각기 급소를 가릴 보호구에 체인 메일 정도를 원하시고, 무기는 남은주 님은 검과 방패, 나서윤 님은 장검 한 자루, 하유진 님은 투척용 단검과…."
주르르르르 읊어지는 요구 사항들. 전체적인 면을 넘어 디테일한 면까지 하나하나 들어가자 읊는 데만 한 세월 걸릴 정도다. 나연과 주하연은 이번 기회에 각각 마탑과 신전에 들러 로브와 신관 복장, 더불어 스태프 등도 구할 계획이었다. 나연이야 스태프가 이미 있지만, 나서윤과 주하연에게는 없었다.
나서윤은 마검사라 스태프가 아닌, 팔찌 형태의 간이 스태프를 원했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구할 수는 없었다.
만들 수 있는 장인, 그런 기술을 지닌 연금술사가 없다고 들었다. 나도 있으면 좋은 물건이었기에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중층에는 가야 할 듯싶었다.
이후 우리는 각자 신체 치수를 잰 이후, 일행들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나이든 노신관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신님의 은총이 있기를. …음? 신관이 계시는군요? 여신님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그는 주하연의 신성력을 느낀 듯했다. 나는 신성력이 없기에 신관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수준 높은 신관은 아닌 듯했다.
"신관이신 분의 복장이… 어쩌다가… 방랑 사제이십니까?"
"네, 방랑 사제인 주하연이에요. 반갑습니다."
"세상을 위해 제일 낮은 곳에서 수련을 쌓는 자매님을 뵙다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드레너가 나섰다.
"이번에 브리터스 마을을 위해서 조사 의뢰를 맡기로 해 주신 분입니다."
"…브리터스 마을의 조사 의뢰를요?"
신관은 무척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브리터스 마을의 조사 의뢰는 이미 제법 유명한 이야기인 듯했다.
신관이 알 정도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장비를 지원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사제님께서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시라 물욕이 없으신 듯하지만, 의뢰의 난이도가 높은 만큼 저희 지원을 받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와 드려야지요."
어떤 신전이든 신전에는 신성력이 가득하고, 성수가 존재한다. 그 덕에 신전에서 만든 로브와 스태프에는 신성력을 증폭하는 기능이 붙게 된다. 게다가 일부는 성수에 담가 장비의 질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만큼 비싸다.
노신관은 드레너의 요구에 따라 가장 좋은 수준의 장비를 들고 왔고, 확인 결과 레어급 장비임이 확인되었다.
성능도 괜찮았다.
[성력이 깃든 로브]
-등급 : 레어
-티드린드 성의 신전에서 만들어진 로브. 옅은 성력이 깃든 상태에서 1년간 성수에 담아져 로브 자체가 신성력에 친숙한 상태다. 미미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다.
-착용 조건 : 신관 전용
-효과 : 신성 마법을 약하게 증폭한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일정량 감소시킨다.
-방어력 : 25
-신성 마법 효과 5% 증가
[성력이 깃든 스태프]
-등급 : 레어
-티드린드 성의 신전에서 만들어진 스태프. 성수를 먹고 자란 나무로 만들어 미미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다.
-착용 조건 : 신관 전용
-효과 : 신성 마법을 증폭한다.
-공격력 : 1
-신성 마법 효과 20% 증가
-신성력 소모량 10% 감소
레어 장비 두 개. 로브가 300골드, 스태프가 500골드다. 미친 가격. 남은주 장비를 풀세트로 맞춰도 500골드가 안 된다. 그만큼 마법사와 신관의 장비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이 두 장비를 구입하자 허허거리던 노신관의 허리가 깊게 숙여졌을 정도. 제 돈도 아닌데, 돈을 건네는 드레너의 손이 덜덜 떨렸을 정도였다.
이후 마탑에서 산 나연의 로브 또한 250골드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대장간에 부탁한 우리 장비가 나오는 데는 2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하루만 성에서 지내고 다음 날은 다시금 티드린드 마을로 돌아가야만 했다. 놀들을 쫓아내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관계로 우리는 계속 마을을 지켜야만 했다. 이후 장비는 그쪽에서 티드린드 마을로 보낼 예정이라고.
나는 일행에게 성 구경이라도 하라며 보낸 뒤 하유진만을 데리고 다시금 신전으로 향했다.
우리가 다시 신전에 도착하자 신관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음? 아까 오셨던 일행분 아니십니까… 어찌 이곳에 혼자…는 아니시군요. 흠. 죄송하지만 환불은 안 됩니다."
그는 뒤늦게 내 손을 잡고 있는 하유진을 발견한 듯했다. 그나마 신성력이 있는 신관이라 하유진의 패시브 스킬이 발동 중임에도 뒤늦게나마 하유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신성력이 없었다면 아얘 눈치채지 못했겠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관 님. 제가 신성력은 없지만 저도 일단 신관이라서요. 기도실을 쓰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신관 이시라구요? 허허. 방랑 사제분이 둘이나 계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기도실 말씀이십니까? 얼마든지 열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노신관은 아까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되려 미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하유진을 데리고 신전의 기도실로 향했다.
기도실의 제단 앞. 나는 그곳으로 향했고, 곧바로 스킬 상점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