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브리터스 마을
"오빠!"
나서윤의 지원. 그게 없었더라도 이 시점에서 날뛰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그래도 그녀가 괜찮은 타이밍에 나와준 덕택에 더 수월했던 것은 사실이다.
"뒤!"
단 한 음절. 그 한마디만으로 그녀는 내 의도를 파악했다.
나는 단숨에 혼란에 빠진 놀들 사이로 들어갔고,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학살을 시작했다.
이제 놀들은 산 채로 잡기보다는 나를 죽이기 위해 덤벼들기 시작했지만, 너무 늦은 선택이었다.
애초에 죽일 각오로 달려들었어도 나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텐데, 백인장도 모두 죽고 기세마저 내게 넘어온 상태에서 남은 놀들이 날뛰어 봤자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 검기를 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검에 걸리는 족족 놀들의 신체가 갈라졌고, 가죽부터 근육, 뼈마저 단숨에 끊어 내며 사방에 피를 뿌렸다.
주변은 놀들이 지른 고통의 단말마와 더운 피, 지저분한 육편이 가득해졌다.
"하압!"
어느새 주변을 뚫고 달려온 나서윤은 곧장 내 뒤를 바치기 시작했다.
나서윤의 도착과 동시에 나는 검기를 풀었다.
회로가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정도면 양호하다. 전투에 지장은 없을 듯했다.
"지금은 마구잡이로 달려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도망치기 시작할 거다. 그때가 되면 나뉘어서 추격한다. 최대한 많이 죽여."
"네, 오빠. 알겠어요."
"잠시 지켜주마. 마법 한 번 쏘고 시작하자."
"네!"
곧바로 나서윤은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법을 캐스팅하고, 정해진 방법에 따라 회로에 마력을 돌린다. 동시에 탑의 힘으로도 번역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조용히 읊는다.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 그를 위한 주문. 그것이 마법의 시작이라 들었다. 더 깊은 이야기는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거의 동시에, 그것도 전투 상황임을 고려하면 짧은 시간 안에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마법의 난해함을 알게 해 준다.
단발성 마법의 경우, 스킬 등록된 기술이라면 빠르게 적응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되지만, 나서윤은 그게 아닌, 자신의 힘으로 마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탑에 들어온 지 몇 달 만에 벌써 이 수준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어지간히도 믿는군.'
이 복잡한 공정을 적, 놀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해낸다. 아무리 나서윤의 재능이 뛰어나도, 벌써부터 캐스팅을 하며 자신을 지킬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는 못했다.
실드 마법을 알아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녀를 지켜줄 아이템도 없다.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내가 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설임도 없이 적진 한복판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대단한 집중력과 담력이다.
그러나 놀들은 마법이 완성되기를 가만히 구경만 하지 않았다. 아까 나서윤과 나연의 마력을 느껴 미묘하게 우리 쪽으로 힘이 집중되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놀들은 단숨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듯했다.
"컹컹컹!"
망설이는 것도 잠시, 즉시 짖어대며 급하게 나서윤을 향해 돌진한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나서윤의 주변을 돌며 대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웨폰 마스터리의 영향을 받아 마구잡이로 휘두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적당한 투로가 형성된다.
마치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
자신의 몸도, 나서윤에게도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포위된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대검이 한없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놀들은 내 방해에 결국 캐스팅하는 동안 나서윤에게 닿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다연발(多連發) 매직 애로우!"
나서윤의 마법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벌써부터 단발이 아닌, 여러 발의 매직 애로우를 사용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닌 듯했다.
"폭(爆)!"
폭발 속성까지.
무속성이고 가장 간단한 마법에 속하긴 하지만, 두 가지나 더해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콰콰콰쾅!
연타로 터지는 매직 애로우들. 왜 마법사가 양민학살의 스페셜리스트인지 보여주는 광경이다.
이러니 내가 초반에 약하더라도 한바다를 통해서 마법사들을 지원해 키우려는 것이다.
마법사들을 모아 만든 마법 병단은 현대로 따지면 포병이다. 화력 지원을 하는 이들. 게다가 수준이 높아지면 단순 포병의 위력을 뛰어넘기 시작한다.
지금 나서윤만 봐도 자신의 재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 하층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마법사다. 중층의 수준에는 조금 못 미치는 수준.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잡몹들은 그대로 쓸어버릴 수 있다. 최소한의 수준이 되지 못하거나 어지간히 장비가 좋지 못하면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수련자들이라도 버티기 힘들다.
주변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다.
이런 잡졸들의 처리는 내가 날뛰는 것보다는 역시 나서윤이 빠르다. 마력의 부족으로 기예(技藝)를 쓰지 못하는 나는 하나씩 상대를 베어낼 때, 나서윤은 이리 학살을 해댄다. 방금 전까지의 내 활약이 무색할 지경.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아! 잘했다, 서윤아!"
그러고는 곧바로 검을 들고는 마법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은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폭발 속성을 더했다고 하더라도, 기본 베이스가 매직 애로우, 그것도 무속성인 마법이다 보니 범위도 위력도 좀 떨어진다. 그걸 수로 채운 거다. 파이어 애로우였다면 훨씬 좋았을 터. 그렇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다. 나는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 이들을 하나씩 베어내기 시작했다.
콰앙!
멀리서 날아오는 나연의 지원.
게다가 나서윤도 이제는 검을 들고는 내 뒤를 따라 내 빈틈을 차곡차곡 메우기 시작했다.
결국 놀들은 예상대로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위력이 예상 보다 뛰어나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겁에 질려버렸다.
"끼잉! 컹!"
한 마리의 외침. 그리고 그 놀을 곧바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한 마리를 시작으로 남은 놀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라도 더 수를 줄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을 끝까지 따라가 베어냈다.
나서윤은 내 지시대로 내 뒤를 메우던 역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이들을 추적했다.
기본적인 속도가 다르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나는 놀보다 빠를 수 없었고, 나도 나서윤도 마력을 제법 쓴 상태라 많은 놀들을 추살하지 못했다.
쫓아도 놓친다는 것을 알더라도 나는 최대한 놀들을 쫓았다. 솔직히 말해, 보여주기 용도였다.
나서윤 또한 내가 포기하지 않자 계속해서 달려들었고, 나연 또한 닿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멀리서 정령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기를 잠시.
'이 정도면 되려나?'
마력이 너무 부족하다. 검기의 영향이었다.
나는 더는 안된다는 듯, 조금 지친 기색을 연출하고는 놀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와아아아아!"
"미친! 미쳤어! 저게 어떻게 F급이야!"
"A! A급 용병이다! A급 용병이 나타났다!"
냉정히 말해 내 수준은 A급에 못 미친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우리의 실적에 감탄하기 바빴다.
씨익.
나는 뒤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굉장하군. 미녀 넷을 아내로 둘 만해."
내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과거 내가 차버린 베테랑 용병 삼 형제가 다가왔다. 이전에는 조금 껄렁거리는 듯하더니, 오늘은 조금 얌전하다. 역시 용병은 실력이다.
"덕분에 살았네. 이번 전투도 오랬동안 지속 될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어."
그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당장 고용이 끊기는 것도 아니고, 저들은 당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용병들은 다시금 고용될 거다. 아니면 계속 고용을 유지할 수도 있고. 대신 전투가 없으면 일당이 조금 적겠지만.
게다가 기껏 공을 세우고 온 실력자에게 왜 나대냐고 하는 것도 웃기다. 실력을 이렇게까지 대놓고 보여줬는데,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놀이 약하지는 않지만, 우두머리만 죽이면 오합지졸이 되더군요. 싸울 만해서 달려들었습니다."
"…거 저번에도 말하려고 했던 건데, 닭살 돋게 존댓말 좀 하지 마쇼, 거 부인은 잘 말하드만 왜 그쪽이 그따구로 말하는 거요?"
용병은 기본적으로 존대를 잘 하지 않는다. 의뢰인이면 존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뢰인에게도 반 존대만 하는 이들이 태반인 용병 업계에서는 용병들끼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 반말 투성이다.
"…브룩."
"아, 거 그래도 할 말은 합시다, 형님."
"하하. 아직 용병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렇습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리고 부인은 아닙니다."
"…응? 부인이 아니라고? 설마 하렘 아니오?"
"그냥 동료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게 진짜라고? 그래도 그중 하나는 애인이라도 되겠지?"
"…아닙니다. 하하하."
둘째 브룩은 내 말에 정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혹시 고자쇼?"
"……멀쩡합니다."
"그럼 혹시 게…."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짝 노려봐 주었다.
그러자 브룩이라 불린 남자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존댓말을 유지해 주기도 귀찮다. 그냥 말을 놓을까 싶다가도, 한동안은 이 컨셉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한 번 참았다.
평판에 도움이 되니까.
"…저, 유신후 님 되십니까?"
브 삼형제와 대화를 하는 와중 자경단 복장을 한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성에서 지원온 인원이 아닌, 이 마을 내에서 직접 유지하는 자경단 같았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촌장님, 그러니까 루셀 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지금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내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인 만큼, 내가 지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이 마을 소속인 만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내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지, 최대한 공경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의뢰인이 부르시는데, 가야죠."
"아, 피곤하시면 내일 뵈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멀쩡합니다. 그래도 제 일행들은 좀 쉬었으면 하는군요."
"아, 예. 유신후 님만 가셔도 충분합니다. 파티의 리더시니까요."
"그거 다행이군요."
마침 일행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나서윤에게 말했다.
"들었지? 서윤아,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나는 촌장님좀 뵙고 갈게."
"…네. 알겠어요, 오빠."
나서윤은 전투가 끝난 직후 나를 데려가는 모습에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내 결정이니 따른다는 듯,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이런, 바빠 보이는군.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려 했더니…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술이나 한 잔 했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하죠. 그럼, 저는 촌장님을 뵈어야 해서요."
"그러시게."
"그럼,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경 단원은 나를 이끌고 촌장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촌장 루셀이 무척이나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오오, 유신후 님!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의뢰를 받았으니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설마 이정도 실력을 지니셨을 줄이야… 드레너가 괜히 B급 용병 대우를 해 드린 게 아니군요. 아니, 정말 B급 대우도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특히 끝까지 놀 놈들을 쫓아가시는 모습에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의뢰를 완수하려 하실 줄이야… 방어만 해 주셔도 충분히 만족했을 터인데…."
나는 내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정말 대단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덕분에 한동안 마을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나는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
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딘가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듯, 촌장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분이 아니면 감히 유신후 님 앞에서 말을 꺼내기가 어렵군요."
그는 지금의 분위기이기에 말을 할 수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의뢰서의 내용 중에는 방어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나는 내심 웃음을 지었다. 뭔 이야기인지 알겠다. 내가 바라는 바다.
"…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끄덕.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조금만 알아보셔도 쉽게 아실 겁니다. 조사는 정말 위험하고,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을 걱정해야만 하는 제 입장에서 정말 죄송스럽지만, 말이라도 한 번 꺼내 보고 싶군요."
"제게, 조사를 부탁하시는 겁니까?"
촌장은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당연하다. 오늘 활약만 해도 나는 의뢰를 초과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조사를 핑계로 내게 의뢰를 강요한다면 다른 용병들은 모조리 그 자리에서 해고당해야 한다. 아마 단체로 들고 일어나겠지.
게다가 이 위험한 일을 부탁했을 때, 내가 의뢰를 파기하면 되려 촌장이 손해다.
나같은 실력자를 함부로 대해 떠나면 내 활약을 지켜본 자경 단원과 용병,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순식간에 잃어버릴 터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예. 저는 유신후 님 파티에게 조사를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내 눈앞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메인 퀘스트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