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77화 (77/317)

# 77

브리터스 마을

습격을 알리는 신호. 우리는 급히 훈련을 멈춘 채 장비를 갖추고 마을의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경대가 어느 정도 목책 위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뒤늦게 용병들이 우르르 도착하고 있었다.

"…줬나 빠르네."

한 용병의 중얼거림.

우리 일행의 신체 능력에 비해 저들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작은 증거.

비슷하게 출발한 이들 사이에서 우리 일행의 속도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덕분에 용병들 중 가장 먼저 입구에 도착했고, 우리 파티가 배정받은 성문 바로 옆자리로 빠르게 올라갔다.

우리가 자리로 들어가자 대신 경계하던 자경단이 자리를 넘겨주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금색 털을 가진 놀들. 듣던 대로 다섯 백인대 수준으로 보였다.

"많네요."

우리 일행도 이정도 숫자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미궁에서 몰이 사냥을 했었지만, 통로가 한정된 편이라 이렇게 넓은 공간을 이용해 달려오는 모습은 처음.

조금 긴장된 기색이 느껴졌다.

"목책도 있고 주변에 아군도 있습니다. 진짜 도움이 될지야 둘째 치더라도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겁니다."

"…그래요. 그렇겠죠…. 후."

"아군보다는 우리 쪽 파티원 중심으로 지원하는 것 잊지 마세요. 여유가 돼서 다른 사람을 지원하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이쪽이 우선입니다."

"당연한 말씀을."

그거면 된다. 어차피 저들은 최대한 죽이는 것을 피하는 편이고, 이제껏 버티면서 산 채로 잡혀간 인원이 셋이면 제법 잘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젠장 또 왔어…."

"씨발놈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주변의 웅성거림. 용병과 자경단을 살펴보자, 이들이 되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그사이 달려오던 놀들이 제법 먼 거리에서 멈추더니 천천히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 번에 달려들 생각인 듯했다.

"온다, 온다, 온다…."

근처의 한 자경 단원이 주문을 읊듯 온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늘 같은 패턴이었던 듯, 백인장들의 신호에 맞춰 놀 무리가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온다! 모두 전투 준비!"

"끌려가지마! 최대한 버텨!"

"컹컹컹!"

점점 다가오는 놀 무리들. 어느새 그들의 짖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카사!"

화르륵.

일정 거리 내로 진입하자 나연이 빠르게 정령을 소환, 정령 마법을 사용했다. 다수와의 전투에서는 실프보다는 카사가 더 유용하다.

"파이어 볼!"

콰앙!

우리 쪽으로 달려오던 놀들 중 일부가 불에 타며 바닥을 뒹군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놀들은 멈추지 못한 후열에 의해 짓밟혀 순식간에 죽어 나간다.

이서어 나서윤또한 마법을 사용, 일부 놀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수는 일부에 불과할 뿐. 놀들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나연에이어 나서윤의 마법마저 발사되자 이어서 궁수들의 화살 비가 쏟아진다. 일부 놀들은 그 화살에 맞고 쓰러졌지만, 대부분은 맞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책을 향해 돌진해왔다.

"컹!컹!"

놀들은 순식간에 목책에 접근, 하나둘 목책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황금 놀들에 의해 시달린 마을답게, 모너스 마을보다 더 높은 목책은 놀들도 그리 간단하게 올라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몬스터. 어렵더라도 높은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하나둘 목책 위로 올라와 팔을 뻗는다.

"죽어!"

자경단과 용병들은 그런 놀들을 향해 위에서부터 무기를 내리찍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놀들은 그런 와중에도 무기를 붙잡고 인간을 어떻게든 끌어 내리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내 앞으로 올라온 놀이 내게 팔을 뻗는 모습을 바라보며 단숨에 목을 치고는 주변을 살펴보자, 모든 놀들이 하나같이 목책 위의 인간을 죽이기보다는 사로잡으려는 기괴한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끄아악!"

그런 와중 한 놀이 자경 단원 한 명의 팔을 이빨로 물었다. 그대로 매달린 채 자신의 무게를 이용, 자경 단원을 목책 아래로 끌어내려 했다.

"잡아! 잡아!"

주변의 용병과 자경 단원은 팔이 물린 이를 움켜잡고 매달린 놀의 머리를 마구 공격했다.

놀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경 단원을 문 채 버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일행은 더욱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한…."

"모릅니다. 일단은 눈앞의 놈들부터 처리하죠."

이런 식이면 소극적일 만하다. 미친놈들 아닌가? 확실히 자경단과 용병들은 달려드는 놀들을 죽이고 처리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공격을 피하고 달라붙는 놀들을 떨어뜨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함부로 공격하다가는 되려 무기를 잡히고 끌려간다. 그렇다고 이들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라 단번에 올라오는 놀들을 처리하지도 못해, 각잡고 싸웠다간 금세 지치기 십상. 그랬다간 아차 하는 순간에 끌려간다. 이런 상황이면 적극적인 게 더 힘들기는 하겠다.

'생각보다 개판은 아닌가.'

아니, 전투에 관한 한 개판이 맞기는 하다. 그래도 정상 참작은 가능한 게, 몸을 사린다길래 미루거나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다. 촌장인 루셀 입장에서야 하나라도 많이 죽여서 잠시라도 쫓아내길 바라겠지만, 이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끌려가는 이들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위기에 처하면 서로 연합한 이들끼리 도움을 주며 꾸역꾸역 버티고는 있으니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전투가 질질 끌리고 길어질 수밖에 없다. 용병들이야 돈 좀 더 벌겠고, 마을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손해를 꽤 볼 테고.

파견된 자경단들이야 자기 목숨을 잃지 않으니 만족할 만하다.

대부분의 놀이 목책에 달라붙어 위의 인간을 노리는 와중, 특이한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향하는 놀들의 수가 늘어난 것. 그들은 하나같이 나연과 나서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쟤네."

나서윤은 놀들이 기묘하게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저들이 왜 나연 자매를 쳐다보는지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잡아가는 사람을 고르나?'

일단, 여자라 그런 것은 아닐 거다. 용병들 중에도 여자가 있긴 했는데, 그리 과하게 달려드는 느낌은 아니다. 추측되는 이유는, 둘 모두 마법을 사용해서. 그것이 아닐까 한다. 마법을 쓰다 보니 마력이 많이 방사되는 편인데, 그걸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면 그만. 나는 주하연에게 말했다.

"지금 나가겠습니다."

"…벌써요? 조금 더 있다가 지친 이후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미묘하게 이쪽으로 공격이 쏠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은주가 고생 중이죠."

사실이었다. 미묘하게 이쪽으로 공격이 쏠리자 그만큼 남은주가 고생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은주가 제일 먼저 지칠 판이다.

그러면 나서윤이 나서면 되긴 하지만, 그만큼 마법 전력이 줄어든다. 나는 그걸 원치 않았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물론입니다."

주하연은 곧바로 신성력을 쏟아부어 내게 굳건한 대지의 방패를 사용했다.

"30분 이상 유지 될거에요. 신후 씨라면 그 전에 방패가 파괴될 일은 없겠죠. 시간이 되면 다시 걸어줄 테니, 잠시 돌아오시길 바라요."

"뭐, 그러죠."

나는 곧바로 목책의 가장자리 위로 이동했다.

그런 내 행동에 일행은 '벌써 시작인가?' 싶은 표정이었고, 다른 아군들은 저게 지금 뭘 하는 건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이!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위험하잖아!"

"내려와, 미친놈아! 지금 뭘 하는 거야!"

뭘 하긴. 나갈 생각이지.

나는 곧바로 마력을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러자 내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들의 시선이 강하게 내 쪽으로 쏠렸으니까.

마력. 그것을 많이 지닌 이들을 쫓는 것이 맞았다. 아무래도 잡아가는 원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제물이라도 바치나?

나는 내게 달려드는 놀들을 단숨에 베어내고는 목책 아래, 마을 밖을 향해 뛰어내렸다.

"…미친!"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사방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들의 시선은 알 바 아니다. 목적은 평판과 명성. 경험치는 덤이다. 그를 위해 나는 목책 아래로 뛰어내렸다.

주변의 놀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인다.

일부 놀들은 목책에서 뛰어내려 내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목책에서 떨어지며 최근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미약한 중력의 대검]

9층 던전 이후 쓸 일이 없었던 무기. 그냥 철검이 더 익숙하기도 했고, 미궁은 지형 특성상 쓸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방치되던 무기를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대검의 모습에 주변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

"마법사가 셋이야?"

"아냐, 마법 무기일 수도 있어. …아공간 주머니를 갖고 있던가."

나는 공중에서 무기를 바꿔 든 채 아래의 놀들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콰앙!

마력을 사용해 타격 순간 무기의 무게를 약간 올리는 옵션까지 사용하자,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대검에 머리가 찍힌 놀은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으깨져 버렸다.

그러나 앞서 봤던 것처럼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광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어 오는 황금 놀들.

팔다리를 노리는 것을 봐서는 매달려 무력화시키던가, 안 되면 팔다리 정도는 부숴서 끌고 갈 생각인 듯했다.

나는 몸을 돌리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훙!

콰득, 콰직!

높은 신체 능력치. 근력고 대강 회복된 상태에 마력까지 사용하자 대검이 가볍게 느껴졌다.

대검을 평범한 검마냥 휘둘러대자 단숨에 주변의 놀들이 베이고 찢기며 육편이 되어 날아다닌다.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놀들도 단숨에 스무 마리가 넘는 놀들이 찢겨버리자 그제서야 조금씩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안 오나?"

나는 대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놀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가지."

나는 가볍게 말하며 다리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리고는 마력으로 강화, 폭발적인 힘으로 바닥을 박차며 놀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도 없었던 듯, 그들은 다시금 목숨을 걸고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쾅! 콰앙!

내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연과 나서윤의 마법 지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연 자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금 대검을 휘두른다. 무자비한 공격에 놀들이 베이고 베이는 와중, 갑작스레 내 공격을 막는 존재가 등장했다.

쾅! 드득, 드드득!

놀 백인장 다섯. 그들 중 둘이 내 검의 진로를 막아서는 데 성공했다.

"오!"

그리고는 남은 백인장 중 셋이 내 팔다리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왔다.

동시에 다 피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나는 빠르게 대검을 당기며 한쪽을 향해 틀었다.

검면을 이용해 한쪽은 막고 다른 한쪽은 피해냄으로써 이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좀 낫네. 어이. 이봐."

"크르르르."

"역시 안 통하나."

백인장 정도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1회차에서는 이렇게 정면에서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기에 혹시나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족장급 이상이면 말을 알아듣는 눈치라고 하던데… 영웅쯤 되면 말이 통하려나?

실제로 탑은 언어가 통일되어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과 격이 있다면 몬스터와도 대화가 가능하다. 던전이나 사냥터 같은 시스템의 관리하에 있는 몬스터는 예외지만, 중층의 주적인 오크나 미치지 않은 오거, 종족이 다른 수인, 엘프 등과는 대화가 통한다.

35층의 중간 보스와는 대화가 가능하기도 하고.

본인들은 자신이 여전히 한국어를 쓴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레벨이 높아지고 수련을 통해 격이 상승하면서 자신이 쓰는 말이 이전까지 쓰던 모국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 그냥 죽여야겠네."

말이 통하는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붙잡아 길 안내라도 시켜 먹을 셈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결국 저들의 영역을 뒤지고 다닐 수밖에 없는 듯했다.

"컹컹컹!"

내가 잠시 가만히 서 있자, 곧바로 언제 이동했는지 나를 감싼 형대로 서 있던 놀 백인장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무기는 모너스 마을에서 보았던 백인장 처럼, 철을 두른 나무 몽둥이. 생각보다 튼튼하긴 하지만, 고작 놀 백인장 정도에 당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나는 달려드는 이들의 공격을 쭉 물러나며 피하고 위협적으로 무기를 흔들어 포위를 빠져나온 다음, 내 길을 막는 놀들을 베어버렸다.

백인장의 포위에서 빠져나와 놀을 베자 자연스럽게 내 앞에 놀 백인장 다섯이 서 있었다.

그러자 나는 잠시 정도라면 괜찮다는 생각에 대검에 검기를 두른 뒤 놀 백인장 다섯에게 달려들었다.

"컹컹컹!"

이번에도 두 마리의 백인 대장이 내 검을 막을 생각인지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스걱.

대검으로 무기째 백인장 둘은 한꺼번에 베어낸다.

이후 몸을 틀며 옆으로 공격을 하려던 한 놈을 마저 베어버린다.

남은 둘의 공격은 그대로 방치.

내 몸에 떨어지는 몽둥이찜질은 곧바로 주하연이 걸어준 방어막에 막혀 내게 제대로 충격을 주지 못했다.

단숨에 셋의 백인 대장이 썰려버리고 내게 한 공격마저 먹히지 않자, 남은 둘이 다급한 울음을 터뜨린다.

주변의 놀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물러나는 백인장 둘에게 돌격, 단숨에 두 마리마저 베어버렸다.

그러자 남은 놀들이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미친 것같이 달려들던 모습이 아니다. 모너스 마을에서도 보았듯, 하층의 놀들은 지휘관이 사라지면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쾅!

그리고 그 타이밍을 노렸다는 듯, 나연의 마법 공격이 놀들 사이로 떨어졌고.

"오빠!"

나서윤이 나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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