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하층 진입
아침 일찍부터 마을은 분주했다.
조금 일찍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가게 문을 열 거나 사냥을 나가는 등 무척 바쁜 움직임들이었다.
지구처럼 휴일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해서 수도 같은 곳은 1주일에 한 번 쉬기는 하지만, 이런 접경 지역은 아니었다.
"나오긴 했는데… 서윤아, 내가 알기로 진짜 여기서 놀 거 없거든?"
어제 논 것도 아니고, 밖을 조사한 것도 아니지만 1회차의 경험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긴 놀 거 없다. 나중에 수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도시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딱히 놀 거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시장이나 한 바퀴 돌고, 주변 산책하면 끝. 그런 사실을 말해줘도 나서윤은 싱글거릴 뿐이었다.
"그거면 돼요."
"…뭐가 된다는 건데?"
"에헤헤. 그냥 오늘 산책 조금 하다가 같이 수련할 거에요."
"…그건 노는 게 아니다만?"
"나는 오빠랑 같이 수련한 적이 없어서, 충분히 노는 거예요."
"…내가 너 봐준 적이 없었던가?"
있었다. 없지는 않다. 튜토리얼에서이긴 하지만.
"최근 은주 언니나 유진이에 비하면 훨씬 덜한걸요?"
"…그거야 너는 최근에 마법을 익히고 있으니까."
그쪽 계통은 하나도 모른다. 1회차 시절, 안 그래도 스킬 슬롯이 부족했는데, 거기 마법 관련 스킬을 하나라도 넣을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래도 제 스킬중 하나는 이도류인데,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어요."
알아서 잘 크는 애를 건들여서 뭐하겠나. 긁어 부스럼이라 생각해 건들지 않았다.
"그래그래. 그럼 오늘은 너랑 같이 수련하면 되는 거야?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 줄게."
오늘 같이 놀아주겠다고 한 이상, 하루를 완전히 나서윤에게 투자할 생각이었다. 미래의 랭커 후보인데, 그깟 하루쯤이야.
그런 만큼, 나서윤이 수련을 원한다면 받아줄 생각이었다.
확실히 마검사 적성인 만큼, 검 수련도 필요하긴 하니까.
"그럼 주변에 적당한 장소가…."
"아, 제가 알아요. 어제 주변 많이 돌아다녔거든요."
…어지간히 기대했나 보다. 솔직이 이쯤 되면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나서윤은 앞장서서 마을 밖으로 향했다.
내가 어제 나갔던 곳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 멀지는 않았다. 약간 언덕 느낌의 공터. 지대가 마을보다 조금 높았다.
훗날 마을이 발전하며 마을에 포함된 장소. 미래의 판자촌이다.
나도 잠깐이지만 이 장소에서 산 적이 있었다.
용케도 이곳을 수련 장소로 삼았다 싶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약간 높은 장소도 위라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괜찮죠? 경치도 나쁘지 않고, 오늘은 날씨까지 좋아요."
"…그래."
수련을 바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잠시 선 채로 마을을 바라보던 나서윤은 잠시 자리에 앉았다.
팡팡.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는 나서윤의 손짓에, 나는 거부하지 않고 나서윤의 옆에 앉았다.
휘잉.
언덕 위로 바람이 스쳤다.
나서윤은 말없이 한참이나 마을을 바라보았다.
나는 수련하러 오지 않았냐며 나서윤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냥 완전히 맞추기로 작정했으니까.
"…헤헤."
말없이 가만히 있자, 어느 순간 나서윤이 웃고 있었다.
피식.
"좋냐?"
"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어지간히 같이 있고 싶었나 보네."
"그럼요."
"왜 그렇게까지…."
나는 말을 잇다가 멈췄다. 이건 말 해봐야 마이너스다.
하지만 나서윤은 다음 내용을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오빠가 날 구해줬으니까요."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나는 끝내 입을 열었다. 실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무는 쪽이 맞다. 하지만 입을 연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 이후로는 버리는 사람이 더 많았어."
"상관없는데요? 날 구해줬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알 바 아니에요."
싱긋 웃는 나서윤. 나는 나서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나서윤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역시, 조금 이상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정상일지도. 인간은 이기적이니까.
아무리 도덕을 학습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우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드물다. 나연만 하더라도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이후에야 나에게 도덕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고, 나와 잠시 갈등을 빚었다가도 결국 자신과 동료인 우리들의 안전과 생명을 우선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결국 자신과 주변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솔직히 언니가 짜증 날 때도 있었어요."
"…왜?"
"우리가 오지랖을 부릴 처지는 못 됬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그러니까… 오빠도 우리들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꾸 괜한 짓을 하니까요.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언니만 양심에 찔리는 거 아니에요. 나도, 하연 언니도, 은주 언니도 힘든데, 후환 될 애들을 살려 놓으라고 하지 않나, 생명은 소중하니 살인은 안된다고 하지 않나…. 제일 힘든 건 오빠인데."
8층 때의 이야기 같았다.
이미 그때부터 친언니보다는 내 쪽에 무게가 실렸다는 이야기다.
"언니한테는 분명 고마워요. 지구에서도 아픈 엄마랑 나 때문에 잘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일을 했고, 여기서도 오빠를 나에게 데리고 와 줬으니까, 분명 고마운 건 맞는데, 그런 성격이니까 지구에서도, 이런 곳에서도 날 포기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래도, 때때로는 짜증나요. 저, 많이 이기적이고 나쁜 애애요. 그렇죠, 오빠?"
나는 나서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나쁘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원래 사람은 사람 전체를 다 좋아하지는 못해. 그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야."
나도 그렇다.
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회귀했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거인을 죽인다는, 무척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심지어는 회귀의 계기가 된, 지구로 보내달라는 부탁도 기왕에 죽을 거면 가족들이 있던 곳에서 죽고 싶어 선택한 길이다.
그런 나조차도 지구에서 멈춰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다.
분명 내가 그리 생각하는 가족들에게도 단점은 있고, 지긋지긋한 부분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모든 것을 좋아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렇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고. 나연이도 마찬가지지. 나연이는 그런 답답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있으니까."
"에이, 사람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지는 못한다니… 아닌데요?"
나서윤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오빠한테서 싫은 점은 없는데? 오빠는 다 좋은걸요? 언니처럼 거슬리는 것도 없고."
"…아직 함께 지낸 시간이 적어서 그래. 만나다 보면 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하나씩은 나올걸?"
"헤헤. 그러면 그런 거 찾을 때까지 오래오래 딱 붙어 있어야겠다. 오빠 말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래라."
"허락 한 거에요?"
"그래. 마음껏 붙어있으렴."
'지구를 구할 때까지 말이지.'
이상적인,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보이는 나서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건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 어떤 의미로는 소설 속에서 나올 법한 사람이다. 장르가 달라서 그렇지.
오래오래 붙어 있겠다는 나서윤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엿보였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받아들였다. 오히려 좋다.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저렇게까지 내게 집착하도록 만든 원인을 제공한 것은 결국 나다.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도 다 핑계. 결국 나는 나서윤의 집착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나서윤이 진짜 여동생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들 때도 있었다.
정을 느끼면서도 이용해먹는다니, 나도 어지간하다.
"히히. 오빠, 수련해요 수련. 어제 유진이 단검술 가르쳐 줬다면서요? 오늘은 내 검술 봐 줘야 해요?"
"…이도류는 나도 힘들어. 적성에 안 맞아. 나도 스킬이 있는 만큼, 보정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적성에 안 맞으면 쓰기 힘들다? 그리고 네 것이 상위호환이야."
"그럼 대련이라도 해요. 검술 자체가아니라, 싸울 때의 모습을 보고 조언이라도 해 주세요."
"그런 거라면."
나서윤은 양손에 미래의 전설 무기와 현재의 평범한 무기를 든 채 나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근력이 깎인 상황이긴 했지만, 그 드높은 민첩과 마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나를 제외하면 일행 중 가장 강한 존재.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칠 수가 있었다. 나는 나서윤의 검을 막고 자세를 교정하면서도, 때때로 이런 게 진짜 필요한지 생각이 들고는 했다.
내가 없어도 나서윤은 빠르게 성장한다. 최근 마법을 주로 수련하고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검술 실력이 녹슬기는커녕 되려 실력이 늘었다.
양손에 검 하나씩 들고 있다는 이점을 살려 공격을 해 올 때는 식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전은 그렇게 종일 대련만을 해댔고, 오후가 되어 점심때가 되자, 나서윤은 거리에서 사 먹자고 졸라왔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서윤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리 비싸거나 대단한 음식을 원한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시장통에서 가끔 파는 꼬치구이나, 과일들 약간을 요구했을 뿐.
그마저도 제대로 식사를 하기 위해서 조금만 먹을 뿐이었다.
"이 식당! 이 식당에서 먹어요!"
나서윤은 진짜 사전 조사를 했는지 나를 이끌고 구석진 식당으로 향했다.
"어이쿠, 또 오셨구만, 용병 아가씨."
"그걸 말하면… 아니에요. 맛있어서 또 왔어요. 우리 오빠도 먹어보라고."
"흠? 그쪽이 그 하렘 용병 단장?"
"…하렘 용병 단장이라뇨? 그건 또 뭐…."
"여자만 4명을, 그것도 그 정도 외모의 여자만 넷을 끌고 다니지 않던가. 애까지 딸렸다지? 마을 안에서는 이미 유명해."
"…유진이는 제 애가 아닙니다. 실력 있는 용병입니다.
나는 담담한 척 대꾸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명성이 퍼져도 뭐 그딴 명성이 퍼진단 말인가?
어차피 그런 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하층과 중층을 지배하는 제국은 일처다부나, 일부다처도 허용하는 국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실력으로 명성이 퍼졌으면 했는데, 아직 건수가 없었다.
어차피 놀들이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마당이니, 건수는 언젠가 반드시 생긴다.
사실 이쪽이 말만 국경이지 그냥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다. 역사는 말했듯이, 범죄자들로 부터 시작된 지역이고, 지금은 폐쇄된, 내가 노리는 광산 때문에 생긴 거나 다름없는 곳이다.
뭐, 놀을 견제하는 의미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주문은?"
"이거랑, 이거랑…."
이미 자신이 왔었단 사실을 들켰기 때문인지 나서윤은 빠르게 음식을 시키기 시작했다.
"어제 먹었던 거 투성이구만?"
"그게 맛있어서 왔다니까요?"
"그려. 그거 고마워 죽겠구만. 조금만 기다리게."
가게 주인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물러가자, 나는 나서윤에게 말했다.
"어제 왔었나봐?"
"네. 언니들이랑 돌아다니다가 찾았어요. 괜찮더라구요."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었다고.
그중 지금 시킨 것들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고맙네. 서윤이덕에 맛집도 와 보고."
1회차에서 와본 적 있는 곳이라, 맛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실제로 나중에 마을이 커지고 난 후에는 식당이 더 커졌던 걸로 기억한다. 과거에는 위치가 여기가 아니었다. 아마 확장하면서 옮겼겠지.
나는 웃으며 나서윤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조금 더 산책을 하던 와중이었다.
한 사람이 헐레벌떡 용병 사무소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간 사람의 머리 위에는, 주황색 느낌표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