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72화 (72/317)

# 72

하층 진입

"…이번에 사냥터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사냥터요?"

"필드 형식의 던전 같은 거더군요. 죽이면 몬스터가 던전처럼 빛의 입자로 사라지고, 아이템은 딱히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경험치가 조금 괜찮은 것 같더군요."

"…거기서 싸웠군요. 능력치도 떨어졌을 테니, 생각 이상으로 졸전을 펼쳤나 보네요?"

"네. 맞습니다. 실제로 실력을 파악할 생각으로 둘이서 싸우게 만들었으니까요. 제가 없었다면 남은주는 죽었을 겁니다."

애초에 내가 없었다면 둘은 도망쳤을 거다. 현재 남은주 상태를 보면 둘이서 싸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찾은 사냥터에서는 어떤 몬스터가 나왔나요? 역시 놀?"

"아뇨. 고블린입니다."

"…고블린에게… 그래서 저렇게…."

"공격력이 부족해서 그럴 뿐, 실제 방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유진이는 잘 싸우긴 했는데, 은주가 조금 부족했죠."

"유진이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뭐, 본인이 조금 더 잘했다면 이겼을 테니까요. 다음번에 스킬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단검술을 구해줘야겠더군요. 그것만 있었어도 둘이서 이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전투 내용에 대해서 주하연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둘 다 그렇군요."

"은주가 서윤이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아까 자신이 아니라 서윤이었으면 이겼을 거라고 하더군요."

"…확실히 서윤이는 좀 천재니까요. 아니, 많이 천재죠."

자신이 사제인 만큼, 스킬 없이 마법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주하연은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해도, 아직까지 스킬로 배운 굳건한 대지의 방패 말고는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기초적인 힐도, 실드도 사용이 불가능하다. 더 윗줄인 축복이나 정화는 아예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나서윤은 벌써 마법을 두 가지나 쓴다. 거기에 폭발이나 관통 같은 성질을 부여하기까지. 아마 일행 중 나를 제외하면 나서윤의 재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주하연일 것이다.

나연은 아예 정령이 다 써주는 거라서 예외고.

"덕분에 은주가 배워야 할 것이 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에 관한 훈련 플랜도 생각 해놨구요. 일정은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아마 효과가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은주가 민첩이 제법 되는데도 제대로 활용을 못 하더군요. 그래서… 응?"

주하연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내 말이 이어질수록 눈빛이 점점 묘하게 바뀌어갔다.

그 눈빛이 너무 따가워 말하다 말고 주하연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죠?"

"아뇨. 고단수다 싶어서요. 애를 약하게 만들어서 전투에 밀어 넣고는 위험하게 만들고, 그 순간 짠 등장 해서 구해주는 데다, 실력을 확인해서 불안하게 만들고는 훈련으로 다시 자신감을 불어 넣으려고 하다니… 밀당 솜씨가…."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아니기는요.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요? 서.방.님?"

짓궂은 얼굴.

그녀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또 버릴까 봐 걱정했을 거다. 그러다가 내가 버릴 생각은커녕, 단점을 보안할 방법을 줄줄이 읊어대자 안심해서 괜히 장난치는 거다. 이들 머릿속에 왜 이렇게까지 내가 쓰레기로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짓궂으시군요. 그거 명분 쌓기였습니다."

"어머, 우리 마음을 갖고 논 거예요?"

"…자꾸 그러시면 재미없습니다."

앗 뜨거라.

주하연은 내 협박을 웃으며 받아넘겼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고마워요. 최근에는 정말 좋네요. 여유도 있고."

"…무슨 소리입니까?"

"처음에는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어느샌가 의지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위로 올라갈 생각만 하는 모습에다가 알게 모르게 팀원들 밀어붙이고… 그런데도 갈수록 실력 차이가 심해졌죠. 서윤이나 신후 씨 모습 보면서 차이가 너무 나버려서 버려질까 봐 무서웠는데, 최근에는 그럴 걱정은 없겠다 싶어서요. 미궁에서부터 슬슬 느끼긴 했는데, 오늘 일로 확실해졌달까?"

주하연은 숨길 법도 한 말을 가볍게 털어놓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 입장은 분명히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애초에 버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밀어붙인 것도 다 그걸 위해서였어요. 만약 차이가 너무 난다 싶으면… 다른 역할이라도 부여했을 겁니다."

"다른 역할이면… 혹시…."

주하연의 시선이 미묘하게 상체와 하체를 왕복한다.

"…원래 이런 성격이셨습니까?"

"친해지면 좀 그래요. 설마, 친하지 않다고 할 생각은 아니죠? 섭섭하게?"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응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손해다. 나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가능하면 훈련은 은주랑 같이하세요. 고블린의 숲 위치를 아니까, 일행들끼리 실전 훈련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셋 이상이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남은주가 약해져서 그렇지, 방어만 한다고 가정했을 때, 세 명 이상이면 아까 고블린의 두 배가 와도 이길 수 있다.

조합의 힘이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왜 고마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은주 안 버려 줘서요."

"…안 그런다니까요. 도대체 왜…."

"신경 써준 것도 고맙고요."

"파티장이니, 당연한겁니다."

피식.

"그래요 그래."

주하연은 뭔가 졌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나보다도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을 남겼다.

"간 봐서 미안했어요. 이제는… 완전히 믿어요. 신후 씨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니 대답을 듣지도 않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남은주에게 가는 듯했다.

"…거 신뢰 한 번 받기 더럽게 힘드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이전에는 거지 같은 누명을 쓰면서 대충 지나갔는데, 그때 좀 친근해진 것 같다더니 그러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놓지는 않았나 보다.

어쩌면 천천히 간다는 말도 꼬아서 새 동료 모집한다고 생각한 거 아냐? 그럴 가능성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휴.

그래도 이제는 됐다. 가장 큰 산인 주하연이 완전히 마음을 열어버린 이상, 나머지 인원들과도 파티장으로서의 신뢰가 아닌, 인간으로써의 신뢰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오늘 주하연의 태도를 보면, 앞으로 사적으로 친근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은 조심해야지. 이전의 묘한 태도를 보면 약간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지구 물이 덜 빠졌으니까.

다시 한번 새어 나오는 한숨을 뒤로 한 채 남은 일정을 생각했다.

일단 고블린의 숲 정보 공유도 마쳤으니, 저녁쯤 남은주에게 민첩 활용 방법과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 방법을 알려주면 될 듯했다.

그 외에는 일정이 없었기에 훈련이라도 할까 싶다가도 남은주에게는 주하연이 찾아갔지만, 하유진에게는 아무도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걔도 8살이고, 꽤 풀이 죽은 모습이었으니,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별수 없이 나는 하유진의 방을 찾았다.

문을 두드리자 하유진은 직접 문을 열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하유진은 제법 괜찮은 표정이었다.

"아, 형. 어쩐 일이세요?"

"음… 아니.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네. 그냥…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유진은 단번에 내가 온 이유를 알아챘다. 어린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영특했다.

하유진은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제 스킬들이 기습 특화라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검술 같은 기술이 필요해요. 검술만 있으면 서넛은 정면으로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형, 제가 만약 마지막까지 그렇게 기습하지 않고 그상태로 정면으로 싸웠다면, 누나가 지치기 전에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요?"

"…된다. 아까 싸우는 것을 보면 가능하겠더구나."

실제로 마지막에 하유진은 전사 셋을 유인, 혼자서 셋을 쓰러뜨렸다. 그때 은신은 사용하지 않았었다.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확실한 것은 은신 후 기습을 반복했던 전투보다는 분명 빨리 끝났을 거라는 거다.

즉 실력적으로 이길 수는 있는데, 더 확실한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타임아웃이 되었던 것.

"역시… 조금 더 과감했으면 이겼을 텐데… 전사랑 궁수가 함께 있으면 위험하다는 판단에 끝까지 그렇게 싸운 거거든요."

확실히 자신감이 없을 만도 했다. 혼자서 그렇게 싸운 적은 아마 처음이었을 테니까.

지난 미궁에서 하유진의 포지션은 거의 키퍼의 보조에 가까웠으니까.

그 역할을 해주는 덕분에 나연의 화력이 전방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포지션을 유지할 수는 없다. 더 어울리는 역할을 배우고 그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

그래도 오래 자책하지 않고, 더 나아질, 해결할 방법을 찾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스킬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우선 무기술 스킬을 하나 배우자."

"…비싸던데…."

"그 정도 돈은 있다. 걱정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형. 더 잘할게요."

하유진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곤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적응력이 장난이 아니다. 최상급은 다 이런가? 나서윤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 내가 부끄러울 정도다 .

하유진은 내게 시간이 있으면 무기술을 더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왔고, 나는 어차피 저녁때까지는 할 일이 없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하유진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검. 단검술에 대해 엄청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유진 보다는 좀 낫다 .

무엇보다 가진 스킬이 모든 근접 무기에 관해 보정을 지닌 웨폰 마스터리라, 몇 번 휘두르다 보면 보정 덕분에 기본적인 움직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었다. 물론, 전문 단검술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지만.

애초에 웨폰마스터리가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운 존재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재능이나 스킬을 봐서는 한 무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냥 상황에 맞춰서 여러 무기를 쓰는 게 더 나아 그런 선택을 했다.

현재는 검 말고는 사용하지 않지만, 25구역에 가면 무기를 몇 개 더 장만할 계획이었다.

하유진은 그런 내 가르침을 빠르게 흡수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술을 알려주던 나는, 곧 저녁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나연이 우리를 부르기 위해 찾아왔다.

"저녁은 같이 먹을 거지?"

"그래. 곧 내려갈게."

나는 하유진을 데리고 1층으로 향했다. 다른 파티원들은 모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슬쩍 남은주를 살펴보자, 확실히 좀 더 나은 표정이었다.

주하연이 슬쩍 엄지를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친해졌다고 생각하니까 사석에서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은주를 향해 말했다.

"저녁 먹고 나 좀 보자."

"…응, 신후 오빠."

"주하연 씨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훈련 방법과 일정을 알려 줄 테니, 한동안 알려준대로 훈련해 봐. 좀 나을 거다."

"고맙습니다."

여전히 존댓말과 반말이 오가는 말투다. 그래도 낮보다는 나았다.

"오빠, 내일 잊은 거 아니죠?"

갑작스럽게 나서윤이 끼어들었다.

내일. 놀러 가기로 했었다.

"그래. 내일은 하루 쉬기로 했었지. 근데 여기서는 할 것도 없을 텐데?"

실제로 그렇다. 놀 것이 많은 지구와는 다르게, 여기는 놀 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마을에 지금 광대들이 놀러와 있는 상태도 아니고, 이런 외곽 마을에 극장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건 아마 성에 가도 없을 거다. 부유한 영지도 아니고, 국경에 인접한 성인데 그런게 있을 리가. 성주가 방탕한 사람도 아닌 걸로 기억한다.

"시장이라도 구경해요!"

그러나 나서윤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라 그럼."

나는 꺼냈던 말도 있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

다음 날이 되자, 아침부터 나서윤이 나를 찾아왔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씻은 후였고, 마침 아침 먹을 때긴 해서, 약간 놀라긴 했지만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거 아냐?"

"오늘 하루는 내가 독점이니까요!"

나는 나서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날 따르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 효과가 과했다.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 거다."

"네!"

나는 듯 1층으로 내려간 나서윤.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나자, 나서윤이 나는 듯 나를 끌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주하연이 미성년자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하연을 한 번 본 뒤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말은 무시가 상책이다.

그런 나와 주하연의 모습에 남은주와 나연이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내가 저런 농담에 어울려 준 적이 거의 없기는 했다.

나는 일행을 뒤로 한 채 나서윤과 여관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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