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하층 진입
내가 전혀 평소답지 않은 말을 함으로써 일행을 기겁하게 만든 이후, 우리는 여관을 찾아 방을 잡았다.
돈이야 아직 제법 남아 있다. 스킬을 익히고 강화하는 데 사실상 대부분의 금화와 보석을 쓰긴 했지만, 아직 내 손에는 500골드 이상의 금화가 남아 있었다.
이것만 해도 이 시점에서 가질 수 없는 돈이다.
미궁의 몬스터를 잡으면 음식을 떨궜지 돈을 떨구진 않았으니까. 15층에서도 철조각과 음식이었다. 유일하게 얻은 아이템은 20층 보스를 잡고 얻은 미노타우로스의 수갑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근력 수치를 확인하자, 어느새 35를 넘어선 근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에서 35까지 복구하는 데 두 달이 좀 넘게 걸렸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두 달이 안 걸릴 터. 특히 남은주는 한자리 수로 떨어지는 만큼, 아마 더 빨리 회복할 거다.
나는 나서윤과 남은주를 향해 말했다.
"둘 다, 미노타우로스의 수갑 착용해. 이거 보정이 보통이 아냐."
"네?"
"나 거의 다 회복됬어. 대충 두 달 좀 넘게 걸렸네. 조금 더 있으면 원래 능력치 회복하고 그때부터 능력치 상승한다. 여기는 정보가 너무 적어.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니, 일찌감치 착용하는 것이 좋을 거다."
"알겠어요. 오빠."
"…신후 오빠, 나는 조금… 그거 쓰면 근력 9가 되버려서…."
흔쾌히 허락한 나서윤과 다르게, 남은주는 자신이 영 쓸모가 없어지는 상황이 두려운 듯했다. 12층에서 제법 친해진 덕에 저런 말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말도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편하게 하고 있었고. 전투 상황만 아니면 호칭도 편하게 하니, 괜찮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반말과 존댓말이 간간히 섞이는 것을 보면 미묘하긴 하지만.
확실히 근력 9가되면 현재 층에서 영 쓸모가 없다. 하지만 그 정도 근력은 지금 수준에 적당한 훈련이면 빠르게 10 중반까지 회복한다. 나나 나서윤과는 다르게 마력이 부족해 그 정도 근력이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방어를 주하연의 방어막에 의지하고 근력 강화에만 마력을 쏟아부으면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을 거다.
나는 거기에 더해 내 가설을 섞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력의… 성장이요?"
"그래."
마력의 성장. 어느 직업이든 마력이 중요하다. 지금만 봐도 알 수 있다. 마력은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능력치의 증폭은 가장 보편적인 사용 방법 중 하나다.
그 마력의 성장이 더딘 편인 남은주에게 나는 마력을 최대한 이용하라 주문하고 있었다.
"근력 능력치 상승을 위해 마력을 사용하면 근력 성장이 조금 더뎌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 성장 할 거다. 게다가 마력을 꾸준히, 그것도 전력으로 계속 사용하면 마력이 성장할 가능성이 있어. 내가 그랬거든."
사실이다. 근력을 키우려면 근육을 많이 써야 하듯, 마력도 마찬가지다. 물론 과하게 사용하면 정신적으로 피로해지고, 회로에도 무리가 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어지간한 건 힐로 치료가 가능하고, 남은주처럼 신체 능력치와 마력의 차이가 좀 있을 때는 무리해 봤자 회로에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과부하 시킬 마력도 안 된다고 할까? 덕분에 무리를 해도 피곤하고 머리 아픈 정도로 끝난다.
그렇기에 나는 마력을 최대한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게다가 내가 직접 지시한 일이다. 이걸 빌미로 쓸모없다고 내치지 않는다. 얘는 아직까지 그런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
아마 내 인성과는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난 뒤에는 그런 속마음을 스치듯 내비쳤으니까.
"확실히 마력을 많이 사용하면 그 뒤로 성장이 조금 빠른 것 같기는 해."
"맞아요. 저도 마법 연습할 때 그랬어요."
나연 자매 또한 내 말에 신빙성을 보태주었다. 둘 다 잠재력이 높은 만큼, 그런 성장에 있어서는 체감이 잘 되는 편이었겠지.
"그, 그런가? 나는 그냥 전투할 때마다 성장하는 느낌이라 잘 모르겠던데…."
남은주는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물론, 나와 나연 자매가 모두 같은 의견을 말하니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단지 자신은 느끼지 못하기에 자신도 그럴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재능의 차이가 드러났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일단 착용해 둬. 능력치 하나하나가 소중한 마당에 나중에 들어올 능력치들을 생각하면 하나라도 챙겨 두는 것이 좋아. 네가 그것 때문에 부족해지면 우리가 보충할 테니까."
"네 맞아요. 저도 도울게요, 은주 누나!"
"응… 네. 그렇게 할게…요. 신후 오빠. 유진이도 고마워."
곧바로 나서윤과 남은주는 미노타우로스의 수갑을 착용했고, 한동안 능력치가 다운되었다.
둘이 장비를 착용하자 우리는 여관 1층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생각이에요? 신후 씨가 이렇게 다음 층에 오자마자 먼저 쉬자고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나는 그간 다음 층에 오면 먼저 이것저것 준비하거나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해 노력을 하기 바빴지, 지금처럼 뭔가 알 수 없는 정보가 나왔을 때 천천히 하자고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렸고, 어차피 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하층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넓어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35구역이 35층이라고 예상되는 시점에서 벌써부터 달렸다간 되려 퍼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행을 둘러보고 말했다.
"물론 띵가띵가 놀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뜻은 아닙니다. 할 건 해야죠. 매일 훈련도, 정보 수집도 해야 합니다. 돈이야 아직 남은 것이 있으니 부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의뢰나 부탁은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한다면 평판이 중요할 테니까요."
나는 튜토리얼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요한이 재판에서 우리를 모함할 때도, 기사와 병사들은 나를, 우리를 조금이나마 변호해 주었다. 비록 말뿐이었지만, 어차피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게 한계였다. 그러나 그 정도만 해도 분명 영주에게 어필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기서 평판을 만들어 두는 것은 중요하다. 어지간히 굵직하고 중요한 의뢰들은 대부분 신뢰 있는 이들에게 들어가니까. 지금 하층에 도착한 수련자들은 우리 파티가 전부. 그만큼 평판을 올리기 쉬운 환경인 데다, 우리는 무력까지 뛰어나다. 어차피 하층에서 올릴 수 있는 레벨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레벨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니, 평판만 괜찮으면 진짜 괜찮은 의뢰들은 이쪽으로 다 들어올 거다.
나는 그중에서 '광산 조사'의뢰를 받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평판과 실력을 올려서 그 광산 개발에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투자가 돈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전보다는 무력이다. 이곳의 성주와 협력해 무력을 투자,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 무력을 사용하는 데 어째서 투자냐고? 간단하다. 대가가 광산의 지분이기 때문이다.
1회차에서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광산 조사 의뢰를 받았지만, 그리 큰 이득을 얻을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진짜 조사와 토벌만을 하고는 끝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뒤늦게 알려진 사실인데, 이 광산 조사 의뢰는 히든 퀘스트중 하나였다고 한다. 중층의 한 플레이어가 제국의 지시로 놀의 영웅이 국가를 세우자 정벌을 위해 하층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이 퀘스트의 대상인 광산이 보통 광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 그리고 그걸 제국이 그냥 삼켜버렸고, 발견한 유저는 겨우 체면치레할 만큼의 돈만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게 다 당시 성의 힘이 너무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광산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지원을 더 얻었다고.
이 광산은 무려 마정석 광산으로 밝혀져, 훗날 영주에게 더 큰 충격을 주고 말았다. 마정석 광산은 금광보다도 더 비싸다.
억울할 만하다.
일단 그것 하나. 그리고 두 번째로 여기서 천천히 진행하며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정보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2회차이기에 사실상 알고는 있지만, 우리 파티원이나 여기 거주민들은 모른다.
놀의 영웅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황금 놀 부족이 움직이고 있다. 그걸 막아야 한다.
놀의 영웅이 부활하면 놀의 세력이 커지고, 서로 싸우는 다섯 부족이 뭉치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성장하면 놀의 영웅은 왕이 되어 국가랍시고 나서기 시작한다.
국가가 이름만 선포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하기에는 놀의 세력이 무지막지해져 제국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전설 스킬과 장비.'
그것들이 이 하층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대강 어딨는지는 알고 있지만….
위치를 모른다.
이게 뭔 소리인가 하면, 놀들은 한 장소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다.
정확히는 자주 돌아다닌다고 해야 하나?
물론 영역은 있는 만큼 그 안에서 활동하지만, 그래도 그게 좀 넓어야지. 내가 원하는 전설 스킬이나 아이템은 다섯 부족이 각각 나눠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하층에서 하고자 하는 목표는 이정도였다.
그 외에 중층으로 향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나중에 해도 괜찮다. 우선은 저 셋이 더 중요하다.
일찍 중층에 도착하는 것보다, 저걸 다 하고 중층에 도착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훨씬 낫다.
그런 만큼, 일행에게 빨리 강해지고 다음 층,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자 재촉하는 것은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미리 밑밥을 까는 거였다.
내 '핑계'를 들은 일행은 곧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너무 조급하면 되려 독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찬성이에요. 오빠.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이유라면… 그래요, 신후 오빠.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신후가 그렇다면."
"형, 그럼 이제 전 뭐 해야 돼요?"
내 말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행은 오히려 환영하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꾸준히 달려온 만큼, 한 번쯤 이렇게 대대적인 휴식을 하는 것도 좋다. 너무 퍼지면 안 되겠지만.
내가 놀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을 전했으니, 완전히 퍼지지는 않을 거다.
나는 한동안 이 여관을 거점으로 생활할 것이라 밝혔다.
이 마을에는 작지만 용병 길드 사무소도 있으니, 마침 잘된 일이다.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은 일행은 식사를 주문해 배를 채우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이 되자, 나는 오늘의 일정을 밝혔다.
"딱 두 명만 데리고 나갈 생각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여기 마을에 용병 길드 사무소가 있다더군요."
용병이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극히 드물 뿐. 일단 국경. 가진 게 무력밖에 없는 이상, 용병들은 이런 곳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물론 난이도에 비해 큰돈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주변 지형이나 정보도 얻을 겸 정찰이나 사냥 의뢰를 받아 해결할 생각입니다."
나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일행에게는 이게 더 자연스러울 거다.
게다가 정찰과 사냥 의뢰는 난이도가 높고 제법 위험한 편에 속하기에 평판 작업을 하기에도 좋다.
내 말에 나서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오빠 저요! 제가 갈래요!"
"미안. 안 돼. 데리고 갈 사람은 내가 이미 정했거든."
"네에에에?"
나서윤은 자신이 가장 도움이 된다며 자신을 데려가면 가장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떼를 쓸 만 한데도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내일 같이 놀아 줄 테니, 오늘은 쉬렴."
"…약속이에요?"
"그래."
하지만 역시 내일 놀아준다는 말에 가볍게 넘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저런 정찰이나 사냥 의뢰는 매일 나갈 생각이 없었다.
내일은 적당히 돌아다니며 안면이나 익힐 생각이었기에, 나서윤과 함께 다녀도 상관없었다.
나는 오늘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갈 두 명을 지목했다.